[팔정사 극락전]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101
[팔정사] 사진촬영:김은희 2022년
[팔정사 대웅전]사진촬영:김은희 2022년
[팔정사 대웅전] 사진촬영:김은희 2022년
출생
진우(眞愚)스님은 1949년 7월 18일 서울시 중구 수하동 12번지에서 아버지 김재식과 어머니 신정열 사이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이름은 김순희이다. 스님이 아직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였을 때 6·25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도 인연이 다했던지 같이 오래 살지 못하고 13살 되던 해에 헤어졌다.
출가
스님의 출가 동기는 지금의 사제스님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스님이 절에 와본 기억이라고는 국민학교 때 소풍 온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어린 나이에도 삭발한 동자스님의 모습이 그냥 좋아 보여 무작정 팔정사로 찾아갔다. 이렇게 하여 1961년 10월 15일에 13세의 어린 나이로 연호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이후 1965년 성북동 팔정사에서 수덕사 혜암 노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
다음 해에 동학사 강원에 입학하였으며, 대중의 막내로 강사이신 경봉 노스님의 시자 소임을 맡게 되었다. 한번은 강사스님께 맛있는 공양을 해드린다며 싸리버섯을 따다 삶지도 않고 날것으로 반찬을 올린 일이 있었다. 이를 보고 강사스님은 어처구니 없어 하면서도 어린 시자의 정성에 웃으면서 이것저것 많은 것을 자상하게 가르쳐주셨다. 스님은 지금도 싸리버섯을 보면 철없던 때의 시자 시절이 그리워진다고 한다.
그 후 스님은 『기신론』을 보다가 1969년에 외전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강원을 나왔다. 그해 중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1971년에 검정고시로 명성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명문학교였던 명성여고를 마친 뒤 1974년 동국대학교에 입학을 하여 1978년에 졸업하였다. 그 당시에도 지금처럼 모여서 합동으로 계를 받았는데, 스님은 1978년 쌍계사에서 고산스님께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
수행
동국대학교를 졸업한 진우스님은 세등선원에서 안거를 시작으로 학문의 길을 접고 자신의 일대사 인연을 해결하고자 선객의 길로 들어섰다. 대성암(1980년)에서 2년 안거, 수덕사 견성암(1982년)에서 3년 안거, 오대산(1985년)에서 2년 안거를 하는 등 10여 년간 제방 선원에서 안거를 성만하였다. 그 후 1988년 진주의 토굴에서 다도를 하는 원표스님과 5년 가까이 함께 정진하기도 하였다.
팔정사 주지소임을 맡다
은사스님이 연세가 많다 보니 사찰 관리가 여의치 않아서 스님은 본의 아니게 1994년부터 팔정사의 주지 소임을 맡아 현재까지 도량에 돌을 쌓고 큰 방과 선방을 증축하는 불사를 하고 있다. 앞으로는 요사채를 잘 지어서 시민선방으로 활용함으로써 모든 대중이 함께 정진할 수 있는 도량을 발원하고 있는데, 서울 시내에 그만큼 아늑하고 아름다운 도량은 드물 것이라며 자부심을 갖고 있다. 오랫동안 선객으로 지내다가 주지를 맡아 사찰을 운영하면서 문득문득 걸망을 지고 떠나고 싶은 유혹을 견디기 힘들다는 스님은 연로하신 은사스님을 사십 평생 모시면서도 언제나 자신을 한없이 낮춘다.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단경(䞡景)·준오(埈悟)스님이 있다.
팔정사 목보살좌상
[팔정사목보살좌상(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184호)] 사진촬영:김은희 2022년
팔정사 대웅전 목조 보살좌상은 아미타불의 우협시인 대세지보살상(大勢至菩薩像)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는 2004년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그 명칭이 ‘팔정사 목 보살좌상(대세지보살)’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 보살좌상의 명칭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보살좌상은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왼손을 어깨 높이로 들고 있는데 두 손은 지물(持物)인 연봉오리를 잡고 있다. 이처럼 왼손을 들고 있는 보살상은 주로 좌협시보살상으로 배치되는 것이 조선 후기의 일반적 현상이다. 삼존상의 경우 본존을 중심으로 좌우 협시상에서 좌우 대칭을 강조하는 손 표현은 17세기에 활약한 조각승 청헌에서 시작되어 승일, 응혜, 그리고 희장에게서 크게 성행하였다. 이처럼 팔정사 목조보살좌상은 아미타불의 우협시인 ‘대세지보살상’으로 알려져 왔지만 손 표현으로 보아서는 좌협시보살상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그 명칭을 변경할 필요성이 있다. 불상은 화염보주와 꽃으로 장식된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머리칼이 어깨에 세 가닥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얼굴은 정 사각형에 가까우며, 표정은 경쾌하고 양감이 풍부하다. 특히 콧날이 오똑하고 크며, 미소를 머금은 입술은 양 옆이 살짝 들어가게 표현하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오른쪽 어깨 위에 걸쳐진 대의 자락에 표현된 폭이 좁고 하단이 뾰족한 옷자락 표현이다. 넓게 열린 가슴 앞에는 지그재그 형태로 군의(裙衣) 상단을 표현하였으나 양감이 풍부한 얼굴과는 달리 가슴은 편평하게 처리하었다.
결가부좌한 두 다리 사이의 옷주름은 유연하게 표현하였고, 왼쪽 무릎 위에는 끝이 뾰족한 대의자락이 있다. 팔정사 대웅전 목 보살좌상은 정 사각형에 가까운 입체감있는 얼굴과 오른쪽 앞가슴에 끝이 뾰족한 대의 자락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17세기에 활약한 조각승 희장의 작품과 연관성을 갖는다. 조성기가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조성 연도와 조각승은 알 수 없지만, 전반적인 양식 특징으로 보아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제작된 보살상으로 조선 후기 불교 조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