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화스님(忍和, 1912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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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덕혜(德慧) 인화(忍和)스님은 1912년 충남 청양군 화성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김화순이다. 스님은 37세 되던 해인 1948년 부여 무량사에서 성인스님의 위패 상좌<ref name ="위패상좌"> 돌아가신 분을 은사로 삼아 계를 받아 제자가 되는 것 </ref>로 출가하여, 그곳에서 반생을 보냈다. [[File:361-03.jpg|섬네일| | + | 덕혜(德慧) 인화(忍和)스님은 1912년 충남 청양군 화성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김화순이다. 스님은 37세 되던 해인 1948년 부여 무량사에서 성인스님의 위패 상좌<ref name ="위패상좌"> 돌아가신 분을 은사로 삼아 계를 받아 제자가 되는 것 </ref>로 출가하여, 그곳에서 반생을 보냈다. [[File:361-03.jpg|섬네일|300px]] |
===청빈한 생활 인자한 스님=== | ===청빈한 생활 인자한 스님=== | ||
− | 무량사 시절 인화스님은 주지스님인 우진스님을 도와 불사에 진력하였다. 당시 섬네일|무량사는 강원과 선방이 함께 있어서 늘 대중이 많았고, 스님은 매일 장을 보며 온갖 살림을 맡아 절을 꾸려나갔다. [[File:361-02.jpg|섬네일| | + | 무량사 시절 인화스님은 주지스님인 우진스님을 도와 불사에 진력하였다. 당시 섬네일|무량사는 강원과 선방이 함께 있어서 늘 대중이 많았고, 스님은 매일 장을 보며 온갖 살림을 맡아 절을 꾸려나갔다. [[File:361-02.jpg|섬네일|300px]] |
평생 선방을 다닌 스님은 바느질 솜씨가 유난히 좋아서 큰스님들의 누비옷이나 무명옷을 여러 벌 지어드렸다고 한다. 한 번은 전라도의 큰절에 가서 광목 몇 필을 사다놓고 수십 명이나 되는 스님들의 장삼을 일일이 만들어 드린 적도 있었다. | 평생 선방을 다닌 스님은 바느질 솜씨가 유난히 좋아서 큰스님들의 누비옷이나 무명옷을 여러 벌 지어드렸다고 한다. 한 번은 전라도의 큰절에 가서 광목 몇 필을 사다놓고 수십 명이나 되는 스님들의 장삼을 일일이 만들어 드린 적도 있었다. | ||
인화스님은 찬물도 씻어 먹는다고 할 정도로 청백하게 살았다. 스님은 오랜 시간 동안 무량사 도감 별좌 소임을 맡았었는데, 언제나 삼보정재를 무섭게 여기고 한 푼도 헛되게 쓴 일이 없었다. | 인화스님은 찬물도 씻어 먹는다고 할 정도로 청백하게 살았다. 스님은 오랜 시간 동안 무량사 도감 별좌 소임을 맡았었는데, 언제나 삼보정재를 무섭게 여기고 한 푼도 헛되게 쓴 일이 없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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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화문중 중심 무량사 대중의 공양=== | ===육화문중 중심 무량사 대중의 공양=== | ||
스님이 출가한 1950년대 무량사는 200명이 넘는 대중이 살았다. 무량사에 이토록 많은 대중이 있었던 것은 비구니 육화문중이 모두 함께 생활했기 때문이다. 별다른 숙박시설이 없었던 당시 무량사는 부여를 찾는 사람들이 숙식을 해결하던 곳이기도 했다. 이는 수학여행 온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은 숙박비로 한 끼에 쌀 한 되를 냈는데 거기서 일부를 남겨 대중이 생활하는 데 사용했다. | 스님이 출가한 1950년대 무량사는 200명이 넘는 대중이 살았다. 무량사에 이토록 많은 대중이 있었던 것은 비구니 육화문중이 모두 함께 생활했기 때문이다. 별다른 숙박시설이 없었던 당시 무량사는 부여를 찾는 사람들이 숙식을 해결하던 곳이기도 했다. 이는 수학여행 온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은 숙박비로 한 끼에 쌀 한 되를 냈는데 거기서 일부를 남겨 대중이 생활하는 데 사용했다. | ||
− | 무량사 대중에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까지 들어오면 공양간은 그야말로 난리였다. 최소 400여명이 먹을 공양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공양간도 컸고, 해야 할 일도 무척 많았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엄청난 크기의 가마솥 다섯 개를 걸어 세 개는 밥을 짓고, 두 개는 국을 끓였다. 대중이 소임을 나눠 진행하면 못할 것이 없었으나 동네 사람들이 절일을 돕고 양식을 얻어가게 했다.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 그렇게라도 지역 주민들과 나누며 살아야 한다는 게 당시 어른스님들의 생각이었다.[[File:361-01.jpg|섬네일| | + | 무량사 대중에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까지 들어오면 공양간은 그야말로 난리였다. 최소 400여명이 먹을 공양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공양간도 컸고, 해야 할 일도 무척 많았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엄청난 크기의 가마솥 다섯 개를 걸어 세 개는 밥을 짓고, 두 개는 국을 끓였다. 대중이 소임을 나눠 진행하면 못할 것이 없었으나 동네 사람들이 절일을 돕고 양식을 얻어가게 했다.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 그렇게라도 지역 주민들과 나누며 살아야 한다는 게 당시 어른스님들의 생각이었다.[[File:361-01.jpg|섬네일|300px]] |
[출처] 법보신문 인터넷 2016.6.7. | [출처] 법보신문 인터넷 2016.6.7. | ||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92840) |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92840) | ||
===입적=== | ===입적=== | ||
− | 주지스님이셨던 우진스님이 열반한 뒤 상좌 법천스님과 함께 살던 인화스님은 1999년 9월 5일 세수 88세, 법랍 52세로 무량사에서 입적 하였다. 평소 특별히 아픈 데 없이 건강한 편이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기운이 없다고 하더니 위경련이 재발하여 시름시름 앓다가 갑자기 열반에 들고 말았다.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 입적이었다. 다비식 뒤에 무척 영롱한 사리가 나왔으며, 현재 논산 대둔산 영주사 부도탑에 보관되어 있다. [[File:361-04.jpg|섬네일| | + | 주지스님이셨던 우진스님이 열반한 뒤 상좌 법천스님과 함께 살던 인화스님은 1999년 9월 5일 세수 88세, 법랍 52세로 무량사에서 입적 하였다. 평소 특별히 아픈 데 없이 건강한 편이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기운이 없다고 하더니 위경련이 재발하여 시름시름 앓다가 갑자기 열반에 들고 말았다.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 입적이었다. 다비식 뒤에 무척 영롱한 사리가 나왔으며, 현재 논산 대둔산 영주사 부도탑에 보관되어 있다. [[File:361-04.jpg|섬네일|300px]] |
인화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법천스님(法泉, 1944生, 비구니)|법천(法泉)스님]]이 있다. | 인화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법천스님(法泉, 1944生, 비구니)|법천(法泉)스님]]이 있다. |
2022년 11월 22일 (화) 17:28 판
인화(忍和)스님 | |
---|---|
법명 | 인화(忍和) |
법호 | 덕혜(德慧) |
속명 | 김화순(金花順) |
출생 | 1912년 |
출가 | 1948년 |
입적 | 1999.09.05. (세수88세, 법랍52세) |
사찰 | 영주사 충청남도 논산시 벌곡면 덕곡리 508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덕혜(德慧) 인화(忍和)스님은 찬물도 씻어 먹는다고 할 정도로 청빈한 삶을 실천하면서도 수많은 대중스님과 수학여행 온 아이들에게도 후덕했고, 동네 사람들이 절일을 돕고 양식을 얻어가게 하는 공덕을 베풀었다.
생애
경력
연도 | 내용 |
---|---|
1912 | 충남 청양 출생 |
1948 | 무량사에서 성인(性仁)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48 | 박동원(朴東遠)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49 | 충남 보덕사에서 수선 안거 성만 |
무량사에서 사미니과 수료 | |
무량사에서 10여 년간 원주 별좌 소임 | |
1961 |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99 | 무량사에서 입적(세수 88세, 법랍 52세) |
문중 | 육화(六和)문중 |
수계제자 | 법천(法泉) |
활동 및 공헌
출가
덕혜(德慧) 인화(忍和)스님은 1912년 충남 청양군 화성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김화순이다. 스님은 37세 되던 해인 1948년 부여 무량사에서 성인스님의 위패 상좌[1]로 출가하여, 그곳에서 반생을 보냈다.
청빈한 생활 인자한 스님
무량사 시절 인화스님은 주지스님인 우진스님을 도와 불사에 진력하였다. 당시 섬네일|무량사는 강원과 선방이 함께 있어서 늘 대중이 많았고, 스님은 매일 장을 보며 온갖 살림을 맡아 절을 꾸려나갔다.
평생 선방을 다닌 스님은 바느질 솜씨가 유난히 좋아서 큰스님들의 누비옷이나 무명옷을 여러 벌 지어드렸다고 한다. 한 번은 전라도의 큰절에 가서 광목 몇 필을 사다놓고 수십 명이나 되는 스님들의 장삼을 일일이 만들어 드린 적도 있었다. 인화스님은 찬물도 씻어 먹는다고 할 정도로 청백하게 살았다. 스님은 오랜 시간 동안 무량사 도감 별좌 소임을 맡았었는데, 언제나 삼보정재를 무섭게 여기고 한 푼도 헛되게 쓴 일이 없었다. 스님은 기억력이 비상하여 육화문중(무량사)의 계보를 만들 때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 승속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절에 찾아오면 무엇이든 대접을 하려고 애쓰는 등 성품이 매우 자비로웠다.
육화문중 중심 무량사 대중의 공양
스님이 출가한 1950년대 무량사는 200명이 넘는 대중이 살았다. 무량사에 이토록 많은 대중이 있었던 것은 비구니 육화문중이 모두 함께 생활했기 때문이다. 별다른 숙박시설이 없었던 당시 무량사는 부여를 찾는 사람들이 숙식을 해결하던 곳이기도 했다. 이는 수학여행 온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은 숙박비로 한 끼에 쌀 한 되를 냈는데 거기서 일부를 남겨 대중이 생활하는 데 사용했다.
무량사 대중에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까지 들어오면 공양간은 그야말로 난리였다. 최소 400여명이 먹을 공양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공양간도 컸고, 해야 할 일도 무척 많았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엄청난 크기의 가마솥 다섯 개를 걸어 세 개는 밥을 짓고, 두 개는 국을 끓였다. 대중이 소임을 나눠 진행하면 못할 것이 없었으나 동네 사람들이 절일을 돕고 양식을 얻어가게 했다.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 그렇게라도 지역 주민들과 나누며 살아야 한다는 게 당시 어른스님들의 생각이었다.
[출처] 법보신문 인터넷 2016.6.7.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92840)
입적
주지스님이셨던 우진스님이 열반한 뒤 상좌 법천스님과 함께 살던 인화스님은 1999년 9월 5일 세수 88세, 법랍 52세로 무량사에서 입적 하였다. 평소 특별히 아픈 데 없이 건강한 편이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기운이 없다고 하더니 위경련이 재발하여 시름시름 앓다가 갑자기 열반에 들고 말았다.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 입적이었다. 다비식 뒤에 무척 영롱한 사리가 나왔으며, 현재 논산 대둔산 영주사 부도탑에 보관되어 있다.
인화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법천(法泉)스님이 있다.
참고문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2~35.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61.
- 법보신문 인터넷 2016.6.7.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92840)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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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화(忍和)스님 | 본항목 | 인화스님(忍和, 1912~1999) | 忍和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인화스님(忍和,_1912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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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화(忍和)스님 | 육화문중(六和) | ~의 일원이다 | |
인화(忍和)스님 | 성인(性仁)스님 | ~의 수계제자이다 | |
인화(忍和)스님 | 부여 무량사 | ~에서 출가하다 | |
인화(忍和)스님 | 박동원(朴東遠)스님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인화(忍和)스님 | 동산(東山)스님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인화(忍和)스님 | 부여 무량사 | ~에서 입적하다 | |
인화(忍和)스님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충남 예산 보덕사 |
지도
- 영주사 : 충청남도 논산시 벌곡면 덕곡리 508
주석
- ↑ 돌아가신 분을 은사로 삼아 계를 받아 제자가 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