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경순스님(景順, 1925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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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마음을 찾아라”)
(“너의 마음을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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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고봉스님께서 밤에 미타사에 오신다는 소리를 듣고 고봉스님의 법문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학감은 “학인이 건방지게 어디를 가느냐.”호통쳐 몰래 큰방 부엌에서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봉스님께서 밤에 미타사에 오신다는 소리를 듣고 고봉스님의 법문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학감은 “학인이 건방지게 어디를 가느냐.”호통쳐 몰래 큰방 부엌에서 들었다.
 
차신불향금생도(此身不向今生度) 갱대하생도차신(更待何生度此身) '마음의 심월은 어디서 오는 것도 아니고 누가 주는 것도 아니다. 원래 있는 것이다. 칠팔월 장마에 운무가 잠시 흩어진 사이 보이는 빛이 여우 빛이다. 그것이 심월인데 심월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여래의 빛이다. 개는 하늘의 달을 보라, 해를 보라 해도 아래의 먹을 것을 찾는다. 삼척동자는 아버지가 달달 하면 손가락 끝의 달을 본다. 꼭꼭 숨어있는 여래를 찾아라. 그것이 극락이고 도솔천이다. 반복적인 생활이 원칙이라 하더라도 인신난득(人身難得) 불법난봉(佛法難逢)이라 했다.  
 
차신불향금생도(此身不向今生度) 갱대하생도차신(更待何生度此身) '마음의 심월은 어디서 오는 것도 아니고 누가 주는 것도 아니다. 원래 있는 것이다. 칠팔월 장마에 운무가 잠시 흩어진 사이 보이는 빛이 여우 빛이다. 그것이 심월인데 심월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여래의 빛이다. 개는 하늘의 달을 보라, 해를 보라 해도 아래의 먹을 것을 찾는다. 삼척동자는 아버지가 달달 하면 손가락 끝의 달을 본다. 꼭꼭 숨어있는 여래를 찾아라. 그것이 극락이고 도솔천이다. 반복적인 생활이 원칙이라 하더라도 인신난득(人身難得) 불법난봉(佛法難逢)이라 했다.  
스님은 그때 그동안 내가 빛을 따라 다니기만 했구나.' 하는 깨달음이 들었다. 다음날 고봉 큰스님은  '대자大慈' 라는 이름을 지어주시며 화두를 잡으라고 했다. 경순스님은 이때부터 화두를 잡기 시작했는데, 몇 년 동안 계속해 온 '옴마니밧메훔'을 버리는데 3년이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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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그때 그동안 내가 빛을 따라 다니기만 했구나.' 하는 깨달음이 들었다. 다음날 고봉 큰스님은  '대자(大慈)' 라는 이름을 지어주시며 화두를 잡으라고 했다. 경순스님은 이때부터 화두를 잡기 시작했는데, 몇 년 동안 계속해 온 '옴마니밧메훔'을 버리는데 3년이나 걸렸다.
  
 
===함께 출가했던 동생의 죽음===
 
===함께 출가했던 동생의 죽음===

2023년 4월 24일 (월) 20:02 판



정의

대자(大慈) 경순(景順)은 25세에 복전암 주지를 맡아 대전 최고의 비구니 암자로 키우는데 평생을 바쳤으며, 동학사가 비구니사찰로 되는 데에 결정적 기여를 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25 충북 보은 출생
1931 법주사 여적암에서 도학(道學)스님을 은사로 출가
1932 서울 돈암도 적조암으로 입산, 박성기 노스님의 보살핌으로 성장
1932 11월 15일 신흥사 원명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33 서울 안국동 화광초등학교 입학
1939 화광초등학교 졸업, 15세까지 청룡암에 머물며 화광야학에서 수학
1945 서울 보문사 불교니승전문학원(佛敎尼僧專門學院) 입학, 수옥스님께 중강
1946 하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47 탑골 미타사에서 박고봉(朴古峯) 선사께 참회계 수계
1950 서울 보문동 불교니승전문강원 1회 졸업
1951 대전 보문산 복전암 주지 취임
1952 고봉 큰스님을 모시고 대전 복전암 원통선원 개원
1954 대전 복전암 원통선원에서 동안거 성만
1959 복전암 대웅전과 요사채 신축
1962 대한불교조계종 선학원에 사찰 등록, 농림부장관 산림녹화 유공 수상
1968 대전경찰서장 청소년 선도 유공 수상
1981 동학사 주지
동학사 주지 사임
1983 (재)선학원 이사
1985 조계종 전국비구니회 부회장
단일구족계단 비구니 증사 1, (9, 10, 11, 12, 13, 14, 17 특 2회 존증아사리)
2022년 현재 복전암 주석
문중 법기문중(法起)
수행지침 염불, 참선
수계제자 법진法眞·법성法性·명원明圓·법일法一·보현普賢·법찬法贊·성원性源·보관普觀. 보상寶常·보안寶眼·보운普云·보명普明·보림寶林·보천普天·보중普中·보공普空.보련普蓮·보성普誠·보월寶月·보여普如·보영普榮·보인普仁·보장寶藏·보춘普春·보적普寂·보타普陀·보일·보견 · 보행 · 보우·보주·보전·보석·보길·보화·보민

활동 및 공헌

출가

[경순스님의 모습]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359
[복전암 보제루]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360
[복전암 큰방의 큰스님]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361
[복전암 복전선원]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363
[복전암 종각]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364
[복전암 전경]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368

대자(大慈) 경순(景順)스님은 1925년 5월 29일 충북 보은에서 아버지 이영훈과 어머니 이하성 사이에서 1남3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이름은 이상월이다. 불교신자였던 아버지는 삼백석지기 대가(大家)의 삼형제 중 막내아들이었고, 어머니는 약국집 맏딸이었다. 두 분은 보은읍에서 살았는데, 조부께서 작고하시고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어렵게 4남매(위로 오빠와 언니, 아래로 여동생)를 키우셨다. 불교신자인 어머니는 크고 작은 일들을 스님들과 의논했는데, 어느 날 스님께서 아이를 출가시키라는 조언을 하셨다. 동생과 함께 법주사의 말사인 여적암에서 삭발을 했는데, 스님의 나이 6세, 동생은 3세 때였다.

여적암은 높은 산에 위치해 있었는데, 2km쯤 내려가면 대여섯 가구가 모여 사는 작은 동네가 있었다고 한다. 동네에서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 소 울음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소리를 들을 때면 ‘고향집에도 있었는데…’ 하는 생각에 집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고 한다. 해우소(解憂所)에 숨어 어머니와 올라왔던 오솔길을 내려다보며 한없이 울었다고 한다. 급기야 앓아눕고 말았다. 걱정이 된 여적암의 스님이 한의사를 모셔왔다. 의원은 맥을 짚어보고 어린 스님의 귀에 대고 물었다. “원이 무엇이냐.” “집에 가고 싶어요.” 어머니와 집이 그리웠던 것이다. 한달음에 달려온 어머니는 어린 스님을 끌어안고 한참동안 눈물을 흘렸다.

최초 비구니전문 강원인 보문사비구니강원 제1회 졸업생

이듬해 봄, 어린 경순스님은 대전에서 스님과 서울로 올라와 돈암동 적조암에서 지내게 되었다. 적조암의 노스님 비구니 박성기 스님은 출가 전 한일강제합방이 된 후 자결한 영의정 이종근 대감의 부인이셨던 분이다. 정경부인이었던 노스님은 삼천 석을 가지고 적조암에 들어와 일생 동안 고종황제와 남편의 왕생극락, 나라의 독립을 기도하며 사셨다. 노스님은 어린 경순스님을 관철동 화광초등학교에 보내주셨고, 경순스님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있지 않아 돌아가셨다. 이후 경순 스님은 성북동 청룡암에서 7년 동안 살다가 열아홉 살 때 신설동 탑골승방인 보문사로 갔다. 보문사로 간 이유는, 그곳에서 불교니승전문강원을 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니승'이란 비구니스님을 말하며, 보문사 은영스님이 최초의 비구니전문강원을 정식으로 세웠다. 경순스님은 강원의 제1회 졸업생이다.

강원시절 에피소드

강원 시절, 그는 공부를 하기 위해 오대산 지장암에서 머문 적이 있다. 그때 상원사의 한암스님께 화두를 타러 도반(道伴) 스님들과 함께 상원사까지 수km를 걸어간 적이 있다. 그런데 입승(立繩)스님이 “비구니들이 어디를 펄럭거리며 다니느냐. 근처에는 얼씬대지도 말라”면서 그와 도반 스님들을 내쫓았다고 한다. 남녀 스님이 함께 공부하지 않는 것은 불가의 엄격한 원칙이었다. “그때 마침 점심 공양 시간이라 배가 몹시 고팠는데, 물 한 모금 못 얻어 마시고 돌아서야 했다. 돌아서는데 발이 부르터서 걷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그날 밤 사건이 일어났다. 상원사 비구 스님 40명이 몰려와 지장암 비구니 스님들을 보려고 울타리에 매달렸다가 담이 무너졌다. 그 바람에 장독이 다 깨졌다. 다음날 아침 어른 스님들은 ‘젊은 스님들 데리고 있다가 큰일 나겠다’며 우리 비구니 스님들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내쫓기듯 지장암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야 했죠.”라고 회고 했다.

매일 '옴마니밧메훔' 을 10만 독씩 외우다

스님은 16세 때부터 21세까지 매일 '옴마니밧메훔' 을 10만 독씩 외웠다. 당시 20명 정도의 대중이 함께 살았는데, 경순스님이 학교를 나왔다는 이유로 외면을 하곤 하였다. 하루는 큰스님께서 미래계획이 무엇인지 물으셨다. 그날 경순스님은 어리고 고달픈 마음에 큰스님께 “남의 마음속을 알고 싶습니다.” 하고 여쭈었다. “하루에 10만 독씩 '옴마니밧메훔' 을 10년 동안 부르면 된다.” 고 하여 경순스님은 매일 ‘옴마니밧메훔' 을 외우기 시작했다. 3년이 흐르자 스님은 시간이 지날수록 의식이 맑아져서 어떤 생각을 하면 무엇이든지 금방 알게 되었고, 진정한 스승을 만나고 싶어졌다. '옴마니밧메훔'은 스님에게 많은 것을 얻게 해주었다. 5·16 군사정변 직전 쌍용자동차가 고비를 맞은 적이 있는데, 이때 김재원회장은 경순스님의 권유로 하루에 '옴마니밧메훔 3만 독을 100일 동안 외웠다. 그러는 사이 김 회장은 힘든 시기를 무사히 넘겼다고 한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경순스님은 절을 하거나 주력을 하면 무엇이든 이루어진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너의 마음을 찾아라”

그러던 어느 날, 고봉스님께서 밤에 미타사에 오신다는 소리를 듣고 고봉스님의 법문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학감은 “학인이 건방지게 어디를 가느냐.”호통쳐 몰래 큰방 부엌에서 들었다. 차신불향금생도(此身不向今生度) 갱대하생도차신(更待何生度此身) '마음의 심월은 어디서 오는 것도 아니고 누가 주는 것도 아니다. 원래 있는 것이다. 칠팔월 장마에 운무가 잠시 흩어진 사이 보이는 빛이 여우 빛이다. 그것이 심월인데 심월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여래의 빛이다. 개는 하늘의 달을 보라, 해를 보라 해도 아래의 먹을 것을 찾는다. 삼척동자는 아버지가 달달 하면 손가락 끝의 달을 본다. 꼭꼭 숨어있는 여래를 찾아라. 그것이 극락이고 도솔천이다. 반복적인 생활이 원칙이라 하더라도 인신난득(人身難得) 불법난봉(佛法難逢)이라 했다. 스님은 그때 그동안 내가 빛을 따라 다니기만 했구나.' 하는 깨달음이 들었다. 다음날 고봉 큰스님은 '대자(大慈)' 라는 이름을 지어주시며 화두를 잡으라고 했다. 경순스님은 이때부터 화두를 잡기 시작했는데, 몇 년 동안 계속해 온 '옴마니밧메훔'을 버리는데 3년이나 걸렸다.

함께 출가했던 동생의 죽음

강원 졸업식 날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다. 1·4후퇴 때 어머니가 계신 대구로 피난을 가, 대구 정혜사에서 17명의 도반 스님과 함께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예산 수덕사 견성암에 있는 동생이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약국을 하는 오빠가 약을 한아름 싸줘서 짊어지고 수덕사로 갔지만, 동생은 사흘 전에 이미 입적(入寂)한 상태였다. 그때 동생 나이 23세였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그는 화장터에 가서 밤새 울었다.

25세에 복전암 주지가 되다

그 즈음, 그는 평생의 스승이라 여기던 고봉스님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절을 구했지만 건강이 악화돼 치료를 받아야 하니, 와서 주지를 맡아달라는 내용이었다. 고봉스님이 그를 믿고 맡긴 절이 지금의 복전암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25세에 복전암 주지가 되었다. 얼마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비구 선사 고봉스님께서 16명의 비구니스님들과 같이 복전암으로 피난을 오셨고, 이를 계기로 복전암에 원통선원이라는 선방을 운영하였다.

“당시 민심이 흉흉했어요. 전쟁 상황임을 감안한다 해도 텃세가 무척 심했고, 거지와 건달패를 비롯해 일부 상이용사의 횡포까지 더해져 비구니 스님들이 생활하기가 어려웠죠. 그래도 부처님께 의지해 겨우겨우 탁발을 하고 배급을 받아 살아갔어요. 우리 스님들은 불이나 때고 쌀만 있으면 되잖아요. 다른 욕심이 뭐가 있겠어요. 그러니 어렵지만 그런 대로 살아갈 수 있었죠. 그러던 중 고봉스님이 비구니 스님 16명을 데리고 복전암으로 돌아와 식구가 30여 명으로 늘어났어요.”경순스님은 이분들을 돌보느라 발이 부르트도록 탁발을 다녔지만 마음만은 환희로웠다. 이후에도 많은 비구니가 복전암을 거쳐 갔다고 한다.

복전암은 현재의 도량으로 터를 잡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원래 복전암의 땅은 학교부지였 고, 건물주는 따로 있었다. 복전암 부지가 공원묘지에 속해 있어서 마음대로 집을 짓지 못하였다. 그래서 400개 정도 묘를 이장하고 밤나무 200그루와 잣나무 100그루를 심었다. 법당과 삼성각은 32세 때 비로소 지었고, 근래에 들어서 보제루를 지었다.

경순스님은 상좌만 80명 가까이 되는데, 비구니계에서는 드문 경우라 하겠다.

동학사를 비구니사찰로 만들다

1981년 경순스님은 동학사의 주지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훌륭한 두 스님을 두고 세 번째 후보였던 경순스님에게 주지 발령이 떨어지자 일련의 소란이 벌어졌다.

동학사는 경순스님이 어린 시절에 잠깐 살았던 절이었다. 동학사는 정화 운동 당시 대처승이 살던 절이었고, 미타사는 비구니 처소로서 70~80명 정도의 비구니스님들이 살고 있었다. 고봉스님이 복전암에 계실 때 김서원 (총무원장) 스님 등 비구스님 다섯 분이 내려와 한 달 반가량 미타사에서 지내셨다. 신광사, 마곡사, 동학사 등을 정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경순스님은 법원, 경찰서, 신문사 등을 찾아다니면서 앞장 서 소개하고 인사하며 심부름을 해드렸다. 정화 결과 신광사를 받아 들어가게 되었을 때는 선반도 떼어가고 빗자루도 가져갔다. 절 살림에 필요한 것이 하나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여서 스님은 이불, 곡식, 푸성귀 등의 필수품들을 급한 대로 모두 챙겨드렸다. 그때 서원스님이 감사의 뜻으로 경순스님에게 손목시계를 풀어주고 가셨다고 한다.

정화 후 서원스님이 동학사 주지로 부임하면서, 비구와 비구니가 한 산중에 못 산다며 나가라고 하였다. 하지만 경순스님이 서원스님께 청탁하여 비구니스님으로 주지 물망에 대현스님과 경순스님이 올랐다. 경합 끝에 경순스님이 주지를 맡게 되었지만 고봉 큰스님 병환치료와 복전암 선방 운영 중이라 대현스님에게 주지 맡아 줄 것을 부탁하였다.

동학사는 수량이 풍부하고 평지인데다 또 도시와 가까워 비구니 처소로 적격이어서 10여년 후 일현스님의 협조로 비구니사찰로 만들었다. 주지 소임 2년 정도한 뒤 1983년 선학원 복전암 허가가 나자 곧 사임하였다. 비구니스님들이 모여 마음껏 수행 정진할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앞으로 더욱 발전시킬 역량 있는 스님이 뒤를 잇는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이었다.

전국 비구니회 부회장직을 역임하다

1985년부터 25년간 전국 비구니회 부회장직을 역임한 바 있는 스님은 복전암 스님이 아니더라도 비구니 스님들은 모두 한 식구라고 생각한다. 한번은 생면부지의 스님이 탁발을 나갔다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신분을 알 수 없어서 그냥 화장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물어물어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병원 영안실을 찾아갔다. 거기서 시체들을 일일이 다 확인해 스님의 시신을 찾아낸 후, 각고의 노력 끝에 신분을 밝혀내 가족을 찾아주었다.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이후 사흘 동안 심하게 앓았다.

스님은 스님네들이 서로 아끼고 위해줘야 합니다. 스님들이 양로원에 가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파요. 제가 60대만 같아도 스님들을 위한 양로원을 하나 지어 운영해보겠는데,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천일기도 회향날 부처님 이적

1989년 천일기도 회향 날이었다. 며칠간 비가 계속 내리는 중이었고, 그날도 200mm의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다. 회향식이 걱정된 스님은 밤 12시에 잠에서 깨어났는데, 1시에 목욕재계하고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는데,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비가 물동이 째 쏟아 붓듯이 내렸다. 목탁을 잡고 부처님을 부르다가 목탁을 내려놓고 부처님께 사정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렇게 날이 새고 아침 7시가 되자 갑자기 비가 뚝 그치고 햇빛까지 비췄다. 그날 수많은 신도들이 참석하여 천일기도 회향은 성대히 잘 치러졌다. 스님은 범패를 하는 10명의 스님들이 보는 앞에서 사다라니와 상주권공을 하였다.

그런데 회향식이 끝난 후 깜짝 놀랄 소식을 들었다. 대전 중앙시장이 모두 물바다가 되는 등 온통 물난리가 났는데, 복전암 근방에만 비가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순스님은 부처님께서 이적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믿었다.

형무소 포교 중 죄수들을 감동시키다

스님이 형무소에 법문을 갔을 때의 일이다. “저는 큰 형무소에서 왔고, 여러분은 작은 형무소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곳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곳이며, 그동안의 죄를 닦는 곳입니다. 우리는 생사무대에 나와 언제 죽을지 모른 채로 살 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밥 먹여주고 잠 재워줄 때 공부를 하십시오. '인신난득人身難得 장부난득丈夫難得 불법난봉佛法難逢'이라 했는데, '염염보리심念念菩提心 처처안락국處處安樂國' 입니다. 부디 갑갑한 나쁜 마음 내지 말고 '이 나이 먹도록 내 마음 찾지 못하고 무엇 했느냐.' 하고 생각하십시오. 간수들은 채근하는 법사라고 생각하십시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조용한 시간에 꼿꼿이 앉아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찾으십시오. 이 집에서 나오고 싶으면 '관세음보살' 을 매일 10만독씩 부르십시오. 그렇게 100일이면 귀인을 만나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칠흑통에 갇힌 마음을 발견하고, 바늘구멍을 통해서 광채를 본다면 문이 열립니다. 부처님께서 열어주십니다. 제천이 여의식이라 선신들이 약속하셨습니다.” 스님의 법문이 끝나자 일제히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관건은 참선이다

무엇보다 시주의 은혜를 잊지 않고, 부처님께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경순 스님은 늘 참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스님은 21세부터 참선을 했는데, 참선을 하면 지금도 잊었던 글이 다시 살아난다고 한다. 스님은 '염불은 내쏟는 것으로 빛을 쫓는 것과 같아 이름을 드러나게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참선은 가라앉히는 것이다.' 라며 참선을 권한다.

인욕보살이 되어야 한다

또한 스님은 참선, 염불, 범패에도 능하다. 못 만드는 꽃이 없을 정도로 솜씨가 좋고, 직접 가사를 지을 정도로 바느질 솜씨도 대단하다. 먹물도 잘 들이고, 음식도 잘 하고, 떡방아를 찧어서 떡도 잘 만든다. 스님은 농사일을 비롯하여 어린 시절부터 많은 일을 배우고 해왔기 때문에 절집 살림을 꾸려가는 능력이 탁월하였다. 그런 스님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참는 것이다.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스님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인욕이라고 생각한다.

“피부로 느끼고 체험한 것은 정진으로 끝을 내야 합니다. 누가 뺨을 때리면 인과응보라고 여기고 얼굴색도 붉히지 않고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동요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정진의 힘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2023년 현재 세수 99세인 경순스님은 복전암(복전선원)에 주석 중이며, '이제 열반에 들 때가 되었다. 며 모든 것을 정리하고, 대중스님들께 모범을 보이고자 낮잠 밤잠을 삼가 조심하며 수행 정진하고 있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경순(景順)스님 본항목 경순(景順, 1925~) 景順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경순스님(景順,_1925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경순(景順)스님 법기문중(法起) ~의 일원이다
경순(景順)스님 도학(道學)스님 ~의 법계제자이다
경순(景順)스님 보은 법주사 여적암 ~에서 출가하다
경순(景順)스님 원명스님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경순(景順)스님 동산(東山)스님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경순(景順)스님 공주 동학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
경순(景順)스님 대전 복전암(석교동)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
경순(景順)스님 서울 보문사(보문동3가) ~에서 수학하다 강원
경순(景順)스님 구족계단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비구니 증사(별소계단 9, 10, 11, 12, 13, 14, 17 특 2회 존증아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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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복전암 : 대전광역시 중구 석교동 207-7



주석


다른 비구니 스님

각림스님(覺棽, 1927년생) 각심스님(覺心, 1936년생) 경도스님(敬道, 1941년생) 경륜스님(暻輪, 1953년생) 경문스님(京門, 1963년생)
경법스님(敬法, 1922년생) 경순스님(景順, 1925년생) 경신스님(敬信, 1947년생) 경원스님(庚圓, 1960년생) 경주스님(敬柱, 1935년생)
경준스님(敬俊, 1933년생) 경훤스님(敬昍, 1946년생) 경희스님(慶喜, 1931년생) 계수스님(桂修, 1946년생) 계전스님(戒田, 1889년생)
계주스님(季珠, 1914년생) 계환스님(戒環, 1953년생) 관월스님(觀月, 1904년생) 관정스님(觀晶, 1937년생) 관주스님(觀柱, 1922년생)
광옥스님(光玉, 1943년생) 광우스님(光雨, 1926년생) 광호스님(光毫, 1915년생) 금룡스님(金龍, 1892년생) 긍탄스님(亘坦, 1885년생)
뇌묵스님(雷默, 1919년생) 능인스님(能忍, 1944년생) 능인스님(能仁, 1946년생) 대각스님(大覺, 1914년생) 대영스님(大英, 1903년생)
대우스님(大愚, 1949년생) 대은스님(大恩, 1852년생) 대행스님(大行, 1927년생) 대현스님(大玄, 1916년생) 대현스님(大玄, 1957년생)
덕념스님(德念, 19세기중엽년생) 덕수스님(德修, 1922년생) 덕운스님(德雲, 1942년생) 도광스님(度光, 1952년생) 도문스님(道門, 1942년생)
도상스님(道常, 1937년생) 도성스님(道成, 1922년생) 도연스님(道鍊, 1911년생) 도원스님(道圓, 1904년생) 도준스님(道準, 1900년생)
도헌스님(度憲, 1939년생) 도훈스님(道勳, 1933년생) 동근스님(東根, 1951년생) 동성스님(東城, 1913년생) 동현스님(東玄, 1945년생)
동희스님(東熙, 1945년생) 만선스님(萬善, 1883년생) 만선스님(萬善, 1906년생) 만선스님(萬善, 996년생) 만성스님(萬性, 1897년생)
명길스님(明吉, 1931년생) 명륜스님(明倫, 1937년생) 명성스님(眀星, 1931년생) 명수스님(明洙, 1925년생) 명심스님(明心, 1947년생)
명안스님(明岸, 1941년생) 명오스님(明悟, 1916년생) 명완스님(明完, 1937년생) 명주스님(明珠, 1904년생) 명철스님(明哲, 1939년생)
묘각스님(妙覺, 1928년생) 묘각스님(妙覺, 1942년생) 묘관스님(妙觀, 1936년생) 묘관스님(妙觀, 1948년생) 묘광스님(妙硄, 1946년생)
묘길스님(妙吉, 1900년생) 묘담스님(妙湛, 1776년생) 묘순스님(妙洵, 1946년생) 묘엄스님(妙嚴, 1931년생) 묘운스님(妙雲, 1921년생)
묘전스님(妙全, 1938년생) 묘정스님(妙精, 1943년생) 묘정스님(妙靜, 1949년생) 묘찬스님(妙璨, 1926년생) 묘희스님(妙喜, 1937년생)
무구스님(無垢, 1959년생) 무진스님(無盡, 외국인) 무진스님(無盡, 1954년생) 문수스님(紋秀, 1939년생) 백졸스님(百拙, 1936년생)
범조스님(梵早, 1941년생) 법공스님(法空, 1471년생) 법공스님(法空, 1937년생) 법농스님(法農, 1962년생) 법능스님(法能, 1932년생)
법륜스님(法倫, 1948년생) 법선스님(法船, 1899년생) 법성스님(法性, 1914년생) 법성스님(法惺, 1938년생) 법성스님(法性, 1940년생)
법용스님(法涌, 1936년생) 법운스님(法雲, 1927년생) 법운스님(法雲, 1937년생) 법인스님(法印, 1930년생) 법일스님(法一, 1904년생)
법전스님(法田, 1927년생) 법전스님(法典, 1945년생) 법종스님(法宗, 1945년생) 법진스님(法眞, 1942년생) 법천스님(法泉, 1944년생)
법형스님(法衡, 1921년생) 법홍스님(法弘, 1943년생) 법희스님(法喜, 1887년생) 법희스님(法稀, 1923년생) 법희스님(法希, 1930년생)
법희스님(法熺, 1952년생) 보각스님(普覺, 1904년생) 보각스님(寶覺, 1938년생) 보명스님(寶明, 1946년생) 보명스님(寶明, 1954년생)
보문스님(普門, 1938년생) 보선스님(普善, 1946년생) 보영스님(普暎, 1937년생) 보원스님(普願, 1944년생) 보인스님(寶仁, 1924년생)
보인스님(普仁, 1933년생) 보현스님(普賢, 1934년생) 보화스님(普和, 1933년생) 본각스님(本覺, 1952년생) 본공스님(本空, 1907년생)
봉려관스님(蓬廬觀, 1865년생) 불필스님(不必, 1937년생) 상근스님(祥根, 1872년생) 상덕스님(常德, 1951년생) 상덕스님(常德, 1952년생)
상덕스님(尙悳, 1925년생) 상락스님(常樂, 1928년생) 상륜스님(相侖, 1929년생) 상명스님(尙明, 1909년생) 상원스님(相源, 1939년생)
상조스님(常照, 1951년생) 상훈스님(常熏, 1944년생) 서용스님(瑞庸, 1948년생) 선경스님(禪敬, 1904년생) 선광스님(善光, 1949년생)
선재스님(善財, 1956년생) 선주스님(禪周, 1938년생) 선진스님(善眞, 1961년생) 선행스님(善行, 1934년생) 선혜스님(善慧, 1911년생)
설오스님(說吾, 1958년생) 설호스님(雪皓, 1933년생) 성경스님(晟鏡, 1941년생) 성관스님(性觀, 1940년생) 성관스님(成觀, 1951년생)
성덕스님(盛德, 1942년생) 성륜스님(性輪, 1918년생) 성림스님(成林, 1916년생) 성문스님(性文, 1893년생) 성법스님(性法, 1929년생)
성수스님(性樹, 1948년생) 성연스님(性蓮, 1920년생) 성연스님(聖蓮, 1928년생) 성우스님(惺牛, 1918년생) 성원스님(性源, 1918년생)
성월스님(性月, 1947년생) 성일스님(性一, 1944년생) 성주스님(性主, 1825년생) 성주스님(性住, 1938년생) 성주스님(性珠, 1946년생)
성지스님(聖智, 1926년생) 성진스님(性眞, 1896년생) 성총스님(聖叢, 1944년생) 성타스님(性陀, 1934년생) 성탄스님(性坦, 1911년생)
성해스님(性海, 1889년생) 성현스님(聖賢, 1927년생) 세등스님(世燈, 1926년생) 소림스님(昭林, 1937년생) 수옥스님(守玉, 1902년생)
수인스님(守仁, 1779년생) 수인스님(守仁, 1899년생) 수진스님(守珍, 1916년생) 수진스님(修眞, 1950년생) 수현스님(修賢, 1940년생)
수현스님(修賢, 1941년생) 수환스님(修還, 1950년생) 순희스님(順姬, 1917년생) 신전스님(信典, 1934년생) 연호스님(蓮湖, 1930년생)
영수스님(暎修, 1941년생) 영운스님(靈雲, 1946년생) 영원스님(盈圓, 1949년생) 영춘스님(永春, 1894년생) 예순스님(禮順, 1587년생)
운달스님(雲達, 1942년생) 원오스님(圓悟, 1933년생) 원표스님(圓表, 1951년생) 월혜스님(月慧, 1895년생) 육년스님(六年, 1906년생)
육문스님(六文, 1946년생) 윤호스님(輪浩, 1907년생) 은영스님(恩榮, 1910년생) 응민스님(應旼, 1923년생) 인성스님(仁成, 1901년생)
인완스님(仁完, 1930년생) 인정스님(仁貞, 1899년생) 인허스님(印虛, 1911년생) 인홍스님(仁弘, 1908년생) 인화스님(忍和, 1912년생)
일광스님(一光, 1899년생) 일선스님(一禪, 1952년생) 일연스님(一衍, 1947년생) 일엽스님(一葉, 1896년생) 일조스님(日照, 1910년생)
일지스님(逸智, 1944년생) 일초스님(一超, 1943년생) 일현스님(一玄, 1952년생) 일홍스님(一弘, 1939년생) 일효스님(一曉, 1934년생)
자광스님(慈光, 1936년생) 자득스님(慈得, 1945년생) 자민스님(慈珉, 1939년생) 자산스님(慈山, 1933년생) 자원스님(慈元, 1937년생)
자윤스님(慈允, 1928년생) 자은스님(慈恩, 1943년생) 자현스님(慈賢, 1896년생) 장일스님(長一, 1916년생) 재근스님(在根, 1940년생)
재문스님(載文, 1943년생) 재현스님(在玄, 1946년생) 재호스님(宰毫, 1938년생) 재홍스님(在洪, 1931년생) 적조스님(寂照, 1942년생)
정관스님(靜觀, 1945년생) 정덕스님(正德, 1933년생) 정률스님(廷律, 1963년생) 정명스님(淨明, 1940년생) 정명스님(正明, 1954년생)
정목스님(正牧, 1960년생) 정묘스님(靜妙, 1941년생) 정성스님(定星, 1940년생) 정수스님(貞守, 1939년생) 정수스님(淨洙, 1941년생)
정심스님(定心, 1918년생) 정심스님(正心, 1925년생) 정안스님(正眼, 1950년생) 정안스님(淨岸, 1951년생) 정운스님(淨雲, 1954년생)
정원스님(正圓, 1939년생) 정인스님(正忍, 1946년생) 정일스님(淨日, 1934년생) 정행스님(淨行, 1902년생) 정화스님(淨華, 1922년생)
정화스님(貞和, 1923년생) 종수스님(宗秀, 1922년생) 종수스님(鍾修, 1922년생) 종식스님(宗植, 1944년생) 종실스님(宗實, 1951년생)
지광스님(志光, 1934년생) 지광스님(智光, 외국인) 지명스님(智明, 1921년생) 지문스님(志門, 1958년생) 지성스님(志性, 1939년생)
지순스님(芝順, 1913년생) 지연스님(知衍, 1947년생) 지오스님(智悟, 1955년생) 지우스님(至牛, 1935년생) 지원스님(知元, 1931년생)
지원스님(智圓, 1938년생) 지원스님(智願, 1942년생) 지인스님(智因, 1937년생) 지행스님(智行, 1941년생) 지향스님(智向, 1941년생)
지현스님(智玄, 1916년생) 지현스님(智賢, 1933년생) 지형스님(志炯, 1947년생) 지호스님(智毫, 1956년생) 지환스님(知幻, 1261년생)
지환스님(智環, 1936년생) 지훈스님(志訓, 1947년생) 진관스님(眞觀, 1928년생) 진오스님(眞悟, 1904년생) 진우스님(眞愚, 1934년생)
진우스님(眞愚, 1949년생) 창법스님(昌法, 1918년생) 창수스님(昌守, 1842년생) 창호스님(彰浩, 1889년생) 천일스님(天日, 1912년생)
청룡스님(靑龍, 1925년생) 쾌민스님(快敏, 1916년생) 쾌유스님(快愈, 1907년생) 탁연스님(卓然, 1949년생) 탄형스님(呑炯, 1948년생)
태경스님(泰鏡, 1930년생) 태구스님(泰具, 1920년생) 하경스님(荷景, 1937년생) 해성스님(海成, 1958년생) 해운스님(海雲, 1920년생)
해주스님(海住, 1951년생) 행원스님(行願, 1927년생) 허경스님(虛鏡, 1440년생) 현각스님(玄覺, 1935년생) 현묵스님(炫默, 1932년생)
현성스님(賢星, 1945년생) 현수스님(賢秀, 1943년생) 현정스님(玄定, 1948년생) 현진스님(玄眞, 1934년생) 현진스님(玄眞, 1937년생)
현찬스님(賢讚, 1934년생) 현행스님(賢行, 1928년생) 혜경스님(慧鏡, 1924년생) 혜광스님(慧光, 1940년생) 혜근스님(慧根, 1935년생)
혜돈스님(慧頓, 1949년생) 혜등스님(慧燈, 1946년생) 혜명스님(慧明, 1917년생) 혜문스님(慧門, 1930년생) 혜소스님(慧沼, 1931년생)
혜안스님(慧眼, 1912년생) 혜안스님(慧眼, 1923년생) 혜옥스님(慧玉, 1901년생) 혜운스님(慧雲, 1911년생) 혜원스님(慧圓, 851년생)
혜은스님(慧隱, 1937년생) 혜일스님(慧日, 1919년생) 혜일스님(慧日, 1947년생) 혜전스님(慧田, 1929년생) 혜종스님(慧宗, 1930년생)
혜주스님(慧珠, 1925년생) 혜준스님(慧俊, 1935년생) 혜춘스님(慧春, 1919년생) 혜해스님(慧海, 1921년생) 회선스님(會善, 1926년생)
효성스님(曉星, 1898년생) 효성스님(曉惺, 1927년생) 효성스님(曉星, 1948년생) 효천스님(曉天, 1941년생) 효탄스님(曉呑, 1955년생)
희선스님(喜善, 1929년생) 희원스님(喜圓, 1951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