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은스님(大恩, 1852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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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 | ===출가=== | ||
− | 대은스님은 충남 공주군 반포면 영곡리에서 1852년 아버지 유영원(兪永源)과 어머니 이(李)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로지 선과 염불로써 평생을 살았고 평소에는 대강백이라 불릴 만큼 화엄경에서부터『금강경』『능엄경』및 모든 경을 줄줄 외웠다. | + | 대은스님은 충남 공주군 반포면 영곡리에서 1852년 아버지 유영원(兪永源)과 어머니 이(李)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로지 선과 염불로써 평생을 살았고 평소에는 대강백이라 불릴 만큼 화엄경에서부터『금강경』『능엄경』및 모든 경을 줄줄 외웠다. 20세 때에 어머님을 여의고 너무 슬퍼하며 안타까워 깊은 실의에 잠겨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사람에게 우담바라화(3천년 만에 한 번 피는 성스러운 꽃)를 보면 어머님께서 다시 살아올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동학사로 찾아가 스님들에게 그 말씀을 드렸다. </br> |
− | 20세 때에 어머님을 여의고 너무 슬퍼하며 안타까워 깊은 실의에 잠겨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사람에게 우담바라화(3천년 만에 한 번 피는 성스러운 꽃)를 보면 어머님께서 다시 살아올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동학사로 찾아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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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담바라화는 볼 수 없는 꽃이며, 그 말은 스님이 되라는 말이다." </br> | "우담바라화는 볼 수 없는 꽃이며, 그 말은 스님이 되라는 말이다." </br> | ||
스님은 그 말을 듣고 난 후 그 자리에서 바로 스님이 되었다. 은사 스님은 신경전(申敬典) 스님이다. 사미니계는 1871년 동학사에서 만화(萬化)스님으로 받았고, 비구니계는 1914년 마곡사에서 보명 영수(普明 永守)화상으로부터 받았다. </br> | 스님은 그 말을 듣고 난 후 그 자리에서 바로 스님이 되었다. 은사 스님은 신경전(申敬典) 스님이다. 사미니계는 1871년 동학사에서 만화(萬化)스님으로 받았고, 비구니계는 1914년 마곡사에서 보명 영수(普明 永守)화상으로부터 받았다. </br> | ||
===수행=== | ===수행=== | ||
− | 10년이 지나면 강산도 변한다는 옛말이 있듯이 스님은 동학사 미타암 한 곳에서 무려 여덟 번이나 강산이 변하도록 정진했으니 후일 좌탈입망 하신 모습이 굳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 + | 10년이 지나면 강산도 변한다는 옛말이 있듯이 스님은 동학사 미타암 한 곳에서 무려 여덟 번이나 강산이 변하도록 정진했으니 후일 좌탈입망 하신 모습이 굳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스님은 출가 이후 동학사 미타암에서 80여년을 한결같은 인내력과 정진력은으로 수행하였고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선과 염불로 평생을 살았다. 80년 동안 하루 같이 여일하기만 하였으니 그 수행의 행장이야말로 불교사에 기록되고도 남을 만한 여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경(經)·율(律)에 통달하셨던 스님은 주위 비구니스님들을 많이 가르쳤다. 특히 안변 서광사 백년암으로 밤마다 비구니 스님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받았다고 전한다. 스님은 금강경과 지장경을 주로 설하여 평소,‘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었다. 8. 15 해방 직후엔 대전에서 평양까지 도보로 걸으며 5전, 10전씩 탁발을 하여 현재 미타암 대중을 외호하였다. 운달스님의 재중창으로 현재에 이르는 동학사 미타암은 바른 사상과 바른 행으로써 대중을 보살핀 대은스님의 선맥이 전해지는 곳이다.<br/> |
− | 스님은 출가 이후 동학사 미타암에서 80여년을 한결같은 인내력과 정진력은으로 수행하였고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선과 염불로 평생을 살았다. 80년 동안 하루 같이 여일하기만 하였으니 그 수행의 행장이야말로 불교사에 기록되고도 남을 만한 여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 + | 스님은 어찌나 깔끔하였던지 평소에는 화장실에 가는 옷까지 따로 두었으며, 열반에 드는 날까지 예불을 빠뜨리지 않았다. 스님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건강이 매우 좋았다. 작설차를 평소 즐겨 마시는 다인(茶人)이었기 때문에 남다른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엽차는 스님의 주식이기도 하였다. 자비로웠던 스님은 일본 등지에 살고 있는 지인이 귤과 엽차를 보내 주면 귀한 물건일수록 대중 스님들과 나누어 들었다. 미타암에 노스님들이 워낙 많이 계셨는데 대은스님은 할아버지라고 불려졌다. 스님이 할아버지처럼 대중을 아끼고 사랑해 주었기 때문이다. </br> |
− | 경(經)·율(律)에 통달하셨던 스님은 주위 비구니스님들을 많이 가르쳤다. 특히 안변 서광사 백년암으로 밤마다 비구니 스님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받았다고 전한다. 스님은 금강경과 지장경을 주로 설하여 평소,‘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었다. | + | 식량이 부족한 시절인지라 도토리 밥이 주식이었고, 보리를 돌확에 갈아 공양을 지었는데 한 사람이 탁발해 온 곡식이 세 홉씩 배당되었다. 그것마저도 모자라서 아침에는 죽, 점심에는 밥, 저녁에는 아예 굶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오로지 정진에만 몰두하였고, <br/> 하루 삼천이백배씩 반드시 절을 하도록 하여 기강을 세운 엄격한 성품이 좌탈입망하시게 된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스님은 생활 자체가 선이요, 염불이었으며 그 단아한 성품은 30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후예들에게 큰 힘을 주고 있다. 탁발을 나간 대중스님이 행여 늦게 돌아와 저녁이라도 굶을세라 밥이든 죽이든 넉넉히 지으라고 말하는 자상한 분이었다. </br> |
− | 8. 15 해방 직후엔 대전에서 평양까지 도보로 걸으며 5전, 10전씩 탁발을 하여 현재 미타암 대중을 외호하였다. 운달스님의 재중창으로 현재에 이르는 동학사 미타암은 바른 사상과 바른 행으로써 대중을 보살핀 대은스님의 선맥이 전해지는 곳이다.<br/> | ||
− | 스님은 어찌나 깔끔하였던지 평소에는 화장실에 가는 옷까지 따로 두었으며, 열반에 드는 날까지 예불을 빠뜨리지 않았다. 스님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건강이 매우 좋았다. 작설차를 평소 즐겨 마시는 다인(茶人)이었기 때문에 남다른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 ||
− | 자비로웠던 스님은 일본 등지에 살고 있는 지인이 귤과 엽차를 보내 주면 귀한 물건일수록 대중 스님들과 나누어 들었다. 미타암에 노스님들이 워낙 많이 계셨는데 대은스님은 할아버지라고 불려졌다. | ||
− | 스님이 할아버지처럼 대중을 아끼고 사랑해 주었기 때문이다. </br> | ||
− | 식량이 부족한 시절인지라 도토리 밥이 주식이었고, 보리를 돌확에 갈아 공양을 지었는데 한 사람이 탁발해 온 곡식이 세 홉씩 배당되었다. 그것마저도 모자라서 아침에는 죽, 점심에는 밥, 저녁에는 아예 굶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오로지 정진에만 몰두하였고, <br/> 하루 삼천이백배씩 반드시 절을 하도록 하여 기강을 세운 엄격한 성품이 좌탈입망하시게 된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 ||
− | 스님은 생활 자체가 선이요, 염불이었으며 그 단아한 성품은 30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후예들에게 큰 힘을 주고 있다. 탁발을 나간 대중스님이 행여 늦게 돌아와 저녁이라도 굶을세라 밥이든 죽이든 넉넉히 지으라고 말하는 자상한 분이었다. </br> | ||
===대은스님의 예언=== | ===대은스님의 예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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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적=== | ===입적=== | ||
− | 1954년 음력 사월 초하루 아침 “나는 죽을 테니 종신할 사람은 모이라”하여서 주위에 있던 스님들이 모였다. “너희들은 아침 공양하고, 나는 송죽이나 한 그릇 끓여 달라.” 하시고는 그냥 앉은 채 참선과 염불만 하였다. | + | 1954년 음력 사월 초하루 아침 “나는 죽을 테니 종신할 사람은 모이라”하여서 주위에 있던 스님들이 모였다. “너희들은 아침 공양하고, 나는 송죽이나 한 그릇 끓여 달라.” 하시고는 그냥 앉은 채 참선과 염불만 하였다. 대중스님들은 ‘할아버지께서 공연한 말씀을 하셨구나.’하는 생각으로 일본 관청에 바칠 공출 나물을 캐러 산에 올라갔다, 그러나 예감이 이상하여 더덕 몇 뿌리만 캐서 내려와 보니 명망이 높으신 큰 스님들이 모두 와 있었다. </br> |
− | 대중스님들은 ‘할아버지께서 공연한 말씀을 하셨구나.’하는 생각으로 일본 관청에 바칠 공출 나물을 캐러 산에 올라갔다, 그러나 예감이 이상하여 더덕 몇 뿌리만 캐서 내려와 보니 명망이 높으신 큰 스님들이 모두 와 있었다. </br> | + | 스님은 새벽부터 장장 9시간 동안 적정삼매에 둔 채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다 오후 1시에 상좌 도길 스님의 종신으로 “내가 가거든 바로 뒤따라오라.”는 말씀을 남기고, 평생 수행하여 온 그대로 영겁의 나래를 피며 조용히 앉아 좌탈입망(坐脫立亡)에 들었다. 스님의 세수는 103세요, 법랍은 84세이었다. </br> |
− | 스님은 새벽부터 장장 9시간 동안 적정삼매에 둔 채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다 오후 1시에 상좌 도길 스님의 종신으로 “내가 가거든 바로 뒤따라오라.”는 말씀을 남기고, 평생 수행하여 온 그대로 영겁의 나래를 피며 조용히 앉아 | ||
− | 좌탈입망(坐脫立亡)에 들었다. 스님의 세수는 103세요, 법랍은 84세이었다. </br> | ||
− | 스님께서 입적에 든 뒤, 지현스님<ref> 지현스님 : 대은스님의 증손상좌</ref>은 대은스님의 몸에 뽀얀 분꽃이 피어난 것을 보았다. 스님이 출가하실 때 구하고자 했던 우담바라 꽃과도 같았다. | + | 스님께서 입적에 든 뒤, 지현스님<ref> 지현스님 : 대은스님의 증손상좌</ref>은 대은스님의 몸에 뽀얀 분꽃이 피어난 것을 보았다. 스님이 출가하실 때 구하고자 했던 우담바라 꽃과도 같았다. 우담바라화는 삼천년 만에 한 번 피는 신령스러운 꽃으로, 매우 드물고 희귀한 일을 비유할 때 여러 불경에서 자주 쓰인다. 불경에 의하면, 인도에 그 나무는 있지만 꽃이 없고, 여래가 세상에 태어날 때 꽃이 피며, 전륜성왕이 나타날 때면 그 복덕의 상징으로 꽃이 핀다고 한다. 우담바라화를 찾아서 출가 수행하였던 스님은 스스로 열반 세계에 들어 우담바라화를 나투셨던 것이다. </br> |
− | 우담바라화는 삼천년 만에 한 번 피는 신령스러운 꽃으로, 매우 드물고 희귀한 일을 비유할 때 여러 불경에서 자주 쓰인다. 불경에 의하면, 인도에 그 나무는 있지만 꽃이 없고, 여래가 세상에 태어날 때 꽃이 피며, | ||
− | 전륜성왕이 나타날 때면 그 복덕의 상징으로 꽃이 핀다고 한다. 우담바라화를 찾아서 출가 수행하였던 스님은 스스로 열반 세계에 들어 우담바라화를 나투셨던 것이다. </br> | ||
===수계제자=== | ===수계제자=== |
2023년 4월 16일 (일) 20:36 판
대은(大恩)스님 | |
---|---|
법명 | 대은(大恩) |
법호 | |
속명 | 유대은(兪大恩) |
출생 | 1852년 |
출가 | 1871년 |
입적 | 1954.05.03(음4.1) (세수103세, 법랍84세) |
사찰 | 동학사 미타암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787-2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대은(大恩)스님은 출가 이후 미타암에서 80여 년을 한결같은 인내력과 정진력으로 참선과 염불수행 정진하신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
1852 | 충남 공주 출생 |
1871 | 동학사 미타암에서 경전(敬典)스님을 은사로 출가 |
동학사에서 만화(萬化)스님으로부터 사미니계 수지 | |
1914 | 마곡사에서 보명(普明) 영수(永守)스님으로부터 비구니계 수지 |
평생을 동학사 미타암에서 참선 수행정진하여 경(經)·율(律)에 통달함 | |
1954 | 동학사 미타암에서 입적(세수 103세, 법랍 84세) |
문 중 | 삼현(三賢)문중 |
생활신조 | 평생 선(禪)과 염불(念佛)로 일관 |
수계제자 | 도상(道祥)·도길(道吉)·도홍(道弘)·도현(道玄)·도각(道覺)·윤옥(潤玉)·혜안(慧眼)·체월(滯月)·도선(道善)·혜일(慧日)·견성(見性)스님 |
활동 및 공헌
출가
대은스님은 충남 공주군 반포면 영곡리에서 1852년 아버지 유영원(兪永源)과 어머니 이(李)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로지 선과 염불로써 평생을 살았고 평소에는 대강백이라 불릴 만큼 화엄경에서부터『금강경』『능엄경』및 모든 경을 줄줄 외웠다. 20세 때에 어머님을 여의고 너무 슬퍼하며 안타까워 깊은 실의에 잠겨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사람에게 우담바라화(3천년 만에 한 번 피는 성스러운 꽃)를 보면 어머님께서 다시 살아올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동학사로 찾아가 스님들에게 그 말씀을 드렸다.
"우담바라화는 볼 수 없는 꽃이며, 그 말은 스님이 되라는 말이다."
스님은 그 말을 듣고 난 후 그 자리에서 바로 스님이 되었다. 은사 스님은 신경전(申敬典) 스님이다. 사미니계는 1871년 동학사에서 만화(萬化)스님으로 받았고, 비구니계는 1914년 마곡사에서 보명 영수(普明 永守)화상으로부터 받았다.
수행
10년이 지나면 강산도 변한다는 옛말이 있듯이 스님은 동학사 미타암 한 곳에서 무려 여덟 번이나 강산이 변하도록 정진했으니 후일 좌탈입망 하신 모습이 굳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스님은 출가 이후 동학사 미타암에서 80여년을 한결같은 인내력과 정진력은으로 수행하였고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선과 염불로 평생을 살았다. 80년 동안 하루 같이 여일하기만 하였으니 그 수행의 행장이야말로 불교사에 기록되고도 남을 만한 여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경(經)·율(律)에 통달하셨던 스님은 주위 비구니스님들을 많이 가르쳤다. 특히 안변 서광사 백년암으로 밤마다 비구니 스님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받았다고 전한다. 스님은 금강경과 지장경을 주로 설하여 평소,‘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었다. 8. 15 해방 직후엔 대전에서 평양까지 도보로 걸으며 5전, 10전씩 탁발을 하여 현재 미타암 대중을 외호하였다. 운달스님의 재중창으로 현재에 이르는 동학사 미타암은 바른 사상과 바른 행으로써 대중을 보살핀 대은스님의 선맥이 전해지는 곳이다.
스님은 어찌나 깔끔하였던지 평소에는 화장실에 가는 옷까지 따로 두었으며, 열반에 드는 날까지 예불을 빠뜨리지 않았다. 스님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건강이 매우 좋았다. 작설차를 평소 즐겨 마시는 다인(茶人)이었기 때문에 남다른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엽차는 스님의 주식이기도 하였다. 자비로웠던 스님은 일본 등지에 살고 있는 지인이 귤과 엽차를 보내 주면 귀한 물건일수록 대중 스님들과 나누어 들었다. 미타암에 노스님들이 워낙 많이 계셨는데 대은스님은 할아버지라고 불려졌다. 스님이 할아버지처럼 대중을 아끼고 사랑해 주었기 때문이다.
식량이 부족한 시절인지라 도토리 밥이 주식이었고, 보리를 돌확에 갈아 공양을 지었는데 한 사람이 탁발해 온 곡식이 세 홉씩 배당되었다. 그것마저도 모자라서 아침에는 죽, 점심에는 밥, 저녁에는 아예 굶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오로지 정진에만 몰두하였고,
하루 삼천이백배씩 반드시 절을 하도록 하여 기강을 세운 엄격한 성품이 좌탈입망하시게 된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스님은 생활 자체가 선이요, 염불이었으며 그 단아한 성품은 30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후예들에게 큰 힘을 주고 있다. 탁발을 나간 대중스님이 행여 늦게 돌아와 저녁이라도 굶을세라 밥이든 죽이든 넉넉히 지으라고 말하는 자상한 분이었다.
대은스님의 예언
대은스님은 종종 수좌들에게 다음과 같은 예언의 말씀을 들려 주었다.
- 앞으로 너희들은 좋은 세상을 볼 것이며, 허공으로 날아다닐 것이고 (비행기), 앉아서 삼천리 서서 구만리를 볼 것이며(TV), 아무리 작은 소리로 속삭여도 다 알 수 있는 비밀이 없는 세상이 올 것이다.(컴퓨터 시대)
- 죽고도 살아있는 척을 하는 시대(녹음테이프)가 올 것이다.
- 앞으로 스님이 하산하고 (비산 비하) 세인들은 바랑을 메고 산으로 갈 것이다. (등산)
- 앞으로 모든 이가 반 중이 될 것이다.(낭자를 끊고 머리를 짧게 자르는 모습)
- 여자들이 장엄할 것이다.(귀걸이, 코걸이, 목걸이, 반지)
- 앞으로 변소를 행주로 닦을 것이다.(수세식 화장실)
- 길가에서 밥알을 주워 먹을 것이다.(아스팔트)
입적
1954년 음력 사월 초하루 아침 “나는 죽을 테니 종신할 사람은 모이라”하여서 주위에 있던 스님들이 모였다. “너희들은 아침 공양하고, 나는 송죽이나 한 그릇 끓여 달라.” 하시고는 그냥 앉은 채 참선과 염불만 하였다. 대중스님들은 ‘할아버지께서 공연한 말씀을 하셨구나.’하는 생각으로 일본 관청에 바칠 공출 나물을 캐러 산에 올라갔다, 그러나 예감이 이상하여 더덕 몇 뿌리만 캐서 내려와 보니 명망이 높으신 큰 스님들이 모두 와 있었다.
스님은 새벽부터 장장 9시간 동안 적정삼매에 둔 채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다 오후 1시에 상좌 도길 스님의 종신으로 “내가 가거든 바로 뒤따라오라.”는 말씀을 남기고, 평생 수행하여 온 그대로 영겁의 나래를 피며 조용히 앉아 좌탈입망(坐脫立亡)에 들었다. 스님의 세수는 103세요, 법랍은 84세이었다.
스님께서 입적에 든 뒤, 지현스님[1]은 대은스님의 몸에 뽀얀 분꽃이 피어난 것을 보았다. 스님이 출가하실 때 구하고자 했던 우담바라 꽃과도 같았다. 우담바라화는 삼천년 만에 한 번 피는 신령스러운 꽃으로, 매우 드물고 희귀한 일을 비유할 때 여러 불경에서 자주 쓰인다. 불경에 의하면, 인도에 그 나무는 있지만 꽃이 없고, 여래가 세상에 태어날 때 꽃이 피며, 전륜성왕이 나타날 때면 그 복덕의 상징으로 꽃이 핀다고 한다. 우담바라화를 찾아서 출가 수행하였던 스님은 스스로 열반 세계에 들어 우담바라화를 나투셨던 것이다.
수계제자
- 제자로 도상(道祥)·도길(道吉)·도홍(道弘)·도현(道玄)·도각(道覺)·윤옥(潤玉)·혜안(慧眼)·채월(滯月)·도선(道善)·혜일(慧日)·견성(見性)스님이 있다.
참고문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53~57.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66.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81.
- 삼현문중 계보 및 구승적본 참조
- 운문회보 발취 : 불기 2529년 (1985년 1월 15일) 제 11호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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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은(大恩)스님 | 본항목 | 대은스님(大恩, 1852~1954) | 大恩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대은스님(大恩,_1852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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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은(大恩)스님 | 삼현문중(三賢) | ~의 일원이다 | |
대은(大恩)스님 | 경전(敬典)스님 | ~의 수계제자이다 | |
대은(大恩)스님 | 공주 동학사 미타암 | ~에서 출가하다 | |
대은(大恩)스님 | 만화(萬化)스님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대은(大恩)스님 | 보명(普明)스님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대은(大恩)스님 | 공주 동학사 미타암 | ~에서 입적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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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동학사 미타암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787-2
주석
- ↑ 지현스님 : 대은스님의 증손상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