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광스님(一光, 1899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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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922년(태조 5)에 승려 도선(道詵)이 창건하였다. | + |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922년(태조 5)에 승려 도선(道詵)이 창건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도선이 산 너머에 있는 구성면 연곡(燕谷)에 절터를 닦고 목수를 불러 재목을 다듬는데, 까마귀들이 날아와서 재목을 다듬고 난 조각들을 자꾸 물어가기에 신기하게 생각하고 따라가 보니 지금의 봉곡사 터였다.그 자리가 더 훌륭한 곳임을 판단한 도선은 자신이 미물인 새만도 못하다고 탄식하면서 자리를 옮겨지었다고 한다. |
창건 이후의 자세한 역사는 전래되지 않으나 전성기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40여동의 당우와 오층석탑·석교(石橋) 등이 있었으며, 승려 1,000여명이 기거하였고 경남 일원과 전북 일원까지 말사(末寺)를 거느렸던 큰 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소규모로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창건 이후의 자세한 역사는 전래되지 않으나 전성기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40여동의 당우와 오층석탑·석교(石橋) 등이 있었으며, 승려 1,000여명이 기거하였고 경남 일원과 전북 일원까지 말사(末寺)를 거느렸던 큰 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소규모로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2023년 3월 14일 (화) 06:00 판
일광(一光)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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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일광(一光) |
법호 | 벽천(碧天) |
속명 | 양인환(梁仁煥) |
출생 | 1899.02.13. |
출가 | 1947년 |
입적 | 1982.03.20.(음2.25) (세수84세, 법랍36세) |
사찰 | 봉곡사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 880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벽천(碧天) 일광(一光)스님은 일엽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평생 참선수행 정진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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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 | 충남 서천 출생 |
1909 | 사서오경 수학, 숙명여고 2학년 재학 중 최초의 학원인 태화학당에서 공부 |
1947~1972 | 견성암에서 일엽(一葉)스님을 은사로 출가, 천은사, 범어사 대성암, 통도사 취운암, 진주 대원사 등에서 안거 성만 운문사 16나한전에서 4년 수행, 진주 월명암에서 2년 수행, 해인사 삼선암, 약수암, 상주 화북면 토굴에서 5년 수행 |
1982 | 1982.3.20(음2.25) 봉곡사에서 입적(세수 84세, 법랍 36세) |
문중 | 일엽문중(一葉) |
수계제자 | 지우(至牛)·태헌·성주(性珠) |
활동 및 공헌
출가
벽천(碧天) 일광(一光)스님은 1899년 2월 13일 충남 서천군 화양면 금당리에서 양씨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이며, 이름은 양인환이다. 스님은 1909년 열한 살에 낮에는 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사서오경 등 한학을 공부했다. 숙명여고 2학년 때, 숙명여고에서는 영어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하여 최초의 학원인 태화학당에 들어갔다. 스님의 학구열은 어렸을 때부터 대단했다. 어린아이가 책만 본다고 어른들이 말리면 이불을 쓰고 공부를 할 정도였다.
스님은 1947년 49세의 늦은 나이로 수덕사 견성암에서 일엽(一葉)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경봉스님과의 인연
경봉 큰스님께서는 당시 여자로서는 드물게 글(한문)을 많이 안다며 화엄경소와 화엄경 회현기 등을 갖다 주기도 하셨다. 한 번에 다 주지 못해서 세 번에 나누어주셨다.
이렇게 해서 스님은 속가에서 화엄경을 섭렵했다.
스님은 글 솜씨가 매우 뛰어났다. 하루는 스님의 상좌가 대구 옥련암에 법문하러 오신 경봉 큰스님께 인사를 드리니 “너희 스님은 글이 아주 좋으니까 네가 다 뺏어라.” 하실 정도였다.
스님은 세수 82세 때에 고등학교 역사책과 영어책을 빌려 보기도 했다. 상좌스님이 이유가 궁금하여 왜 그런 책을 보는지 여쭈었다.
“혹시 미국에 태어나면 영어가 모자라니 지금 배워둬야지.” 일광스님의 배움에 대한 의지는 나이를 초월할 만큼 대단히 강했다. 스님 곁에 있으면 특별히 옥편이 필요 없었다. 모르는 한자가 있으면 대강 모양만 말씀드려도 금세 가르쳐주었다.
수덕사에서 나온 후 정화 당시에는 천은사에서 지객[1] 등의 소임을 보았으며, 범어사 대성암에서 오래 살았다. 대성암 만성스님은 맛있는 반찬이 있으면 스님에게 갖다 주기도 하셨다.
그 후 대성암을 떠나게 되자 경봉 큰스님께서 통도사 취운암에서 공부를 하라고 내주셔서 잠시 그곳에 머물며 공부했다. 스님은 취운암에서 나올 때, 도제양성에 쓰라며 화주금과 가지고 있던 현금까지 다 주고
걸망만 메고 나왔다. 통도사에서는 전무후무한 일이라며 모든 대중이 놀라워했다.
『경봉대선사 원광한화집(鏡峰大禪師 圓光閒話集)』(명정스님 저, 1979, p. 161)에는 일광스님이 경봉 큰스님의 제자로 기록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증 제자벽천일광비구니(贈 弟子碧天一光比丘尼)
벽천운산일광원(碧天雲山一光圓) 푸른 하늘에 구름 흩어져 한 빛이 뚜렷하니
만고장명불변진(萬古長明不變眞) 만고에 길이 밝아 변함없이 참되네.
도차문군지차지(到此問君知此旨) 여기에서 그대에게 묻노니 이 의지(意旨)를 아는가?
월래선탑수류천(月來禪榻水流川) 달은 선탑(禪榻)에 뜨고 물은 개울로 흐르네.
운문사, 해인사(삼선암, 약수암) 생활
취운암에서 나온 스님은 이후 대원사 등 여러 곳에서 상좌인 성주스님과 함께 공부를 했다.
성주스님과 같이 다니다 보니 '노인네가 참빗 장사처럼 젊은이를 끌고 다닌다.'는 뒷말이 돌았다. 그래서 하루는 묘전스님께서 일광스님에게 '성주는 경을 공부해야 하니까 동학사로 보내는 게 어떻겠느냐?' 고 하셨다. 그러나 당시 일광스님께 틈틈이 글을 배우던 성주스님은 자신이 강원에 가고 나면 시봉이 없는 은사스님이 혼자 계실 것이 걱정이 되어 운문사 강원에 스님을 모시고 갔다.
운문사에는 마땅히 거처할 방사가 없었다. 그래서 16나한전을 선방으로 개조하여 사용했다. 성주스님이 강원을 졸업한 뒤에도 두 스님은 1년을 더 머물러 운문사에서 4년여 동안 함께 수행하였다.
운문사에서 나온 일광스님은 진주 월명암에서 2년 동안 수행한 후 해인사로 갔다. 1971년 해인사 삼선암에서 철을 나고, 그 다음해 스님의 나이 74세에 약수암에서 두 철을 지냈다.
성철스님과의 인연
일광스님은 해인사 삼선암에 1년 동안 머물며 성철 큰스님께 궁금한 점이 있으면 종종 친견하러 다녔다. 성철 큰스님은 일광스님이 맨 처음 방문했을 때는 방안에서 인사를 했다. 그러다가 두 번째는 마루까지 나오셨고, 세 번째는 마당 끝까지 나오시면서 “저 노장 잘 모시고 가라.” 하며, 스님에 대해 예우를 표하셨다. 큰스님께서는 일체 면회를 사절할 때에도 삼선암 비구니 노장이 오면 무조건 통과시키라고 말씀하실 정도였다.
어느 날 큰스님께서 말씀 도중 무엇인가 쓰시고는 돋보기를 스님께 벗어주시면서 보라고 하셨다. 스님은 “저는 돋보기 필요 없습니다." 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큰스님께서 “나이가 얼만데?" 하고 물으셨다.
스님이 칠십일곱이라고 대답하자 큰 스님은 깜짝 놀라시며, “그렇게 안 보이는데........., 나는 벌써 돋보기를 끼는데.” 라고 말씀하셨다.
또 한번은 '판치생모'에 대한 것을 묻고 답하는데, 큰스님께서 “아, 그거는 내가 가르쳐주겠소.” 라고 하셨다. 이어 또 다른 것을 묻고 답하다가 일광스님이 무슨 말씀인가를 하시자 큰스님께서 “노장, 그거 어디서 썼소. 그거 나 좀 보여줄 수 없소?” 라고 하셨다. 이때 스님은 웃으면서 “스님, 빌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제 머릿속에 있습니다.” 라고 답할 만큼 박학다식했다. 큰스님은 “지금껏 수백 명의 비구니를 봤지만 노장 같은 비구니는 처음 봤소.”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성철 큰스님은 일광스님이 의문이 있어 물어오면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문헌을 찾아서 답을 보내주셨다. 답을 받은 스님은 “나 같은 비구니를 그냥 넘기지 않고 정성껏 답해주시는 성의가 고맙다.” 며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큰스님의 글씨를 도인의 친필이라며 액자에 넣어 소중히 간직했다.
경북 신도회 성불회가 지은 성불사의 전신인 토굴이 상주시 화북면에 있었는데, 스님이 처음으로 절을 맡아 5년을 살기도 했다.
봉곡사에 주석
봉곡사에는 80세가 되던 1978년 1월 19일에 상좌인 성주스님과 함께 오게 되었다. 원래 성주 스님은 봉곡사가 도반스님이 사는 절인 줄 알고 빌려서 살 생각으로 왔었다.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 도반스님은 없고 어느 비구스님이 살고 있다는데, 절은 비어 있었다.
절터를 둘러본 스님이 저녁 무렵 발길을 돌리려고 하는데, 봉곡사의 주지라는 비구스님이 돌아 왔다. 성주스님은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절을 하면서 부처님을 시봉하게 해달라고 발원을 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직지사에 들러 절이 비면 연락해 달라는 부탁을 해놓았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절이 비어 있다는 연락이 왔고, 성주스님과 일광스님은 봉곡사로 거처를 옮겼다. 봉곡사에 온 지 며칠 뒤 당시 봉녕사에 상주하셨던 묘전스님과 경주 보리사 주지스님께서 다니러오셨다. 그런데 솥이 없어 공양을 제대로 지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임시방편으로 이웃집에 공양을 부탁해야 했다. 봉녕사의 묘전스님께서는 안 본 것만 못하다며 안타까워 하셨다. 일광스님이 봉곡사에 들어올 때 가지고 온 것은 숟가락 5개와 그릇 5개, 석유풍로 1개가 전부였다. 절에 남아 있던 식기라고는 달랑 양은솥 하나였고, 그나마 물이 새서 사용할 수가 없었다.
법당에 계신 부처님 몸에는 먼지가 수북하고, 마루에는 새똥만 쌓여 있었다. 명부전은 70도 정도 기울어져 쓰러지기 직전이었고, 바닥도 없는 상태였다. 대웅전은 8평이었는데, 봉곡사에 온 그해 여름에 대웅전 앞쪽의 기와가 무너져 내려 서까래를 갈고 기와를 다시 이었다. 설상가상으로 1979년 8월에 내린 비로 측면이 무너져 다시 수리를 하고 나니 이번에는 후면까지 무너졌다.
일광스님은 산철과 결제철 없이 참선으로 일관된 생활을 했고, 연세가 많아 법당에 못 갈 때에는 방안에서 예불, 대참회, 신심명, 증도가 등을 하루 일과로 정해두고 반드시 했으며, 신심명과 증도가는 평생을 두고 계속 했다.
입적
입적하기 8개월 전에는 “이제는 못 앉을 것 같다. 내가 혹시 노망이 들어 고기를 원하거든 고사리를 다져서 볶아주면서 고기라고 해라.” 하며 흩어짐 없는 모습으로 마지막 가는 길을 준비하였다. 15일 전에는 갈 때가 며칠 남지 않았으니 첫째로 놀라지 말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둘째로 장작을 준비하고, 셋째로 아미타경을 읽어달라는 당부를 했다. 그래서 상좌스님이 한 번 읽어 드리니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5일 전에는 마을의 신도들에게 인사를 하고, 3일 전에는 상좌스님들을 불러놓고 고맙다고 하며 '어차피 신세진 것 끝까지 져야 되겠다.'며 사후의 후신을 부탁했다. 입적하기 전 고구마를 먹고 싶어 하여 상좌스님이 준비해서 드렸는데, 체기가 있었다. 체기가 가신 뒤에 정신이 맑아지면서 “봉곡사 터가 좋은 곳이라 제방 30년보다 봉곡사에서의 5년이 더 유익했다.” 라고 말했다. 평소에도 스님은 '봉곡사는 해태심[2]이 나지 않고 새록새록 정신이 새로워지는 곳' 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1982년 음력 2월 25일 새벽 5시 30분, 스님은 봉곡사에서 세수 84세, 법랍 36세로 입적했다.
수원 봉녕사 묘엄스님이 법주를 맡아 49재를 올리는데, 평소 일광스님이 좋아하는 음식을 잘 알고 있었기에 찰밥, 잡채, 적 등을 골고루 준비하여 차렸다. 하지만 제상이 너무 초라하게 보였는지 묘엄스님이 “성주야! 음식을 놓았으나 이렇게 초라하다. 한번 봐라.” 했다. 그리고 스님의 뜻을 어겨서 그렇다며 음식을 다 치우게 하고 그 자리에 꽃을 놓으니 제상이 확연히 드러났다.
일광스님은 입적할 때 “내가 죽거든 나는 염불은 싫다. 그건 내가 많이 했으니까 다만 ‘스님, 공부합시다.’ 이렇게 말하며 죽비 치고 너희들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앉아주어라! 제상에는 절대 음식을 놓지 마라!” 라는 말을 남겼었다.
일광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지우(至牛)·태헌·성주(性珠)스님 등이 있다.
김천 봉곡사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922년(태조 5)에 승려 도선(道詵)이 창건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도선이 산 너머에 있는 구성면 연곡(燕谷)에 절터를 닦고 목수를 불러 재목을 다듬는데, 까마귀들이 날아와서 재목을 다듬고 난 조각들을 자꾸 물어가기에 신기하게 생각하고 따라가 보니 지금의 봉곡사 터였다.그 자리가 더 훌륭한 곳임을 판단한 도선은 자신이 미물인 새만도 못하다고 탄식하면서 자리를 옮겨지었다고 한다.
창건 이후의 자세한 역사는 전래되지 않으나 전성기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40여동의 당우와 오층석탑·석교(石橋) 등이 있었으며, 승려 1,000여명이 기거하였고 경남 일원과 전북 일원까지 말사(末寺)를 거느렸던 큰 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소규모로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명부전·동상실(東上室)을 비롯하여 부속건물 2동이 있다. 대웅전은 1707년(숙종 33)에 세 번째의 중수를 거쳐 1916년에 단청과 함께 중수되었으며, 명부전은 1690년에 승려 대완(大完)이 중건하였고, 1908년에 중수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봉곡사(鳳谷寺))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3803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p. 677~684.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64.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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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一光)스님 | 본항목 | 일광스님(一光, 1899~1982) | 一光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일광스님(一光,_1899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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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一光)스님 | 일엽문중(一葉) | ~의 일원이다 | |
일광(一光)스님 | 일엽(一葉)스님 | ~의 수계제자이다 | |
일광(一光)스님 | 예산 수덕사 견성암 | ~에서 출가하다 | |
일광(一光)스님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구례 천은사, 부산 범어사 대성암(청룡동), 양산 통도사 취운암, 진주 대원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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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봉곡사 :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 880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