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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화시기에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01g1836b 개심사]에 들어가 대처승을 몰아내고 20여 명이 함께 여러 해 동안 공부하며 지냈다. 그 후 개심사를 나와 견성암에 머물고 있는데, 은사스님이 주지로 계시는 온양 봉곡사에서 스님을 불러 몇 해 동안 그곳에서 생활하다가 다시 견성암으로 돌아갔다. 스님의 은사스님은 만성스님이다. 만성스님은 공부에만 전념하시며 다른 것에는 전혀 관심조차 갖지 않던 분이었는데 전생의 연이 닿았는지 스님을 상좌로 들였다. | + | 현행스님은 정화시기에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01g1836b 개심사]에 들어가 대처승을 몰아내고 20여 명이 함께 여러 해 동안 공부하며 지냈다. 그 후 개심사를 나와 견성암에 머물고 있는데, 은사스님이 주지로 계시는 온양 봉곡사에서 스님을 불러 몇 해 동안 그곳에서 생활하다가 다시 견성암으로 돌아갔다. 스님의 은사스님은 만성스님이다. 만성스님은 공부에만 전념하시며 다른 것에는 전혀 관심조차 갖지 않던 분이었는데 전생의 연이 닿았는지 스님을 상좌로 들였다. |
현행스님은 은사스님에 대한 존경심과 효행심이 지극했다. 한번은 공부를 하러 가는 것을 일념으로 삼고 계신 은사스님께 보탬을 드리고 싶은 마음에 시계를 팔아 은사스님의 양식 값을 마련했다. 그 후에도 안거결제를 하러 가실 때에는 누룽지를 말려 빻아 미숫가루를 만들고, 설탕을 준비해서 은사스님을 홍성까지 배웅하기도 했다. 은사스님이 좋아서 더 멀리까지 배웅을 하고 싶었으나 그만오라고 하셔서 더 가지는 못했다. | 현행스님은 은사스님에 대한 존경심과 효행심이 지극했다. 한번은 공부를 하러 가는 것을 일념으로 삼고 계신 은사스님께 보탬을 드리고 싶은 마음에 시계를 팔아 은사스님의 양식 값을 마련했다. 그 후에도 안거결제를 하러 가실 때에는 누룽지를 말려 빻아 미숫가루를 만들고, 설탕을 준비해서 은사스님을 홍성까지 배웅하기도 했다. 은사스님이 좋아서 더 멀리까지 배웅을 하고 싶었으나 그만오라고 하셔서 더 가지는 못했다. | ||
2023년 2월 27일 (월) 15:40 판
현행(賢行)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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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현행(賢行) |
법호 | |
속명 | 서기순(徐基順) |
출생 | 1928.12.11. |
출가 | |
입적 | 2002년 (세수75세, 법랍58세) |
사찰 | 수덕사 견성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2-3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현행스님은 수덕사 견성암에서 출가하여 대중스님들과 잘 화합했으며, 특히 은사스님에 대한 존경심과 효행심이 지극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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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 | 충남 부여 출생 |
1945 | 수덕사 견성암에서 만성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46 | 만공(滿空) 월면(月面)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55 | 서울 숭인동 청룡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55 | 내원사, 대원사, 해인사, 승가사 등 안거 성만 |
1977 | 견성암 입승 |
1989 | 견성암 도감 |
1989 | 견성암 선원장 |
1989 | 단일구족계단 비구니 증사 (별소계단 8, 9, 10, 11, 12, 13, 14회 존증아사리) |
2002 | 견성암에서 입적(세수 75세, 법랍 58세) |
문중 | 실상문중(實相) |
수행지침 | 청정하게 참선 수행 |
수계제자 | 명안(明岸)·명관(明官)·명선(明仙)·명지(明志)·명상(明尙)·돈오(頓悟) |
활동 및 공헌
출가 결심
현행(賢行)스님은 1928년 12월 11일 충남 부여군 홍산면 북촌리에서 아버지 서길봉과 어머니 박은옥 사이의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백강이며, 이름은 서기순이다.
어느 날 만공 큰스님의 법제자인 용음스님이 홍성에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오신 일이 있었다. 현행스님은 용음스님의 법문을 듣고 부처가 되는 공부를 하고 싶다는 발심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세상살이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욕심을 갖지도 않고 출가를 자신의 길로 삼았다. 그래서 어머니께 어렵게 출가의 뜻을 밝혔고, 어머니는 며칠 간 고심한 끝에 출가를 허락했다.
만공스님의 가르침을 받다
스님은 1945년 나이 18세에 쌀 두 말과 옷 서너 벌을 준비해서 버스를 타고 수덕사 아랫마을에 내려 정혜사로 올라가는데, 산이 얼마나 웅장한지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들이 무섭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한참을 올라가던 스님은 용음스님을 만나서 스님이 되려고 왔다는 말씀을 드렸다. “스님이 돼? 스님이 되면 좋지. 그런데 날이 너무 어두워서 못 올라가겠다. 내가 등불 하나 준비 해줄 테니 저기 비구니스님들 사는 곳으로 가거라.” 스님은 용음스님이 주신 등불을 가지고 당시 정혜사 바로 밑에 있던 견성암으로 갔다. 견성암에 도착하자 스님이 되려는 사람이 한 명 왔다는 소리에 명주 목도리를 두른 젊은 스님 9명이 우르르 몰려나와 스님을 바라보았다. 그런 모습들이 마치 세상 사람처럼 보이지 않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만 같았다. 잠시 후 대중들은 만공 큰스님이 간월도 간월암에 가셨다가 돌아오신다며 마중을 나갔다. 흰 동정에 검은 장삼을 입고 홍 가사를 걸친 스님 4명이 만공 큰스님을 모시고, 나머지 100여 명의 대중스님들이 줄지어 뒤따라왔다. 그 모습 또한 신선이 하강하는 것만 같아서 환희심이 일었다. 대중이 인사를 한 후 스님도 인사를 드리자 큰스님께서 “응, 왜 왔니?” 하고 물으셨다. “승려 생활이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스님이 이렇게 공손히 여쭈어 올리니 만공스님은 기특해 하시며 “그럼 한번 해봐라.” 했다. 스님은 이후 만공 큰스님 밑에서 10여 년을 생활했다.
은사 만성스님과의 인연
현행스님은 정화시기에 개심사에 들어가 대처승을 몰아내고 20여 명이 함께 여러 해 동안 공부하며 지냈다. 그 후 개심사를 나와 견성암에 머물고 있는데, 은사스님이 주지로 계시는 온양 봉곡사에서 스님을 불러 몇 해 동안 그곳에서 생활하다가 다시 견성암으로 돌아갔다. 스님의 은사스님은 만성스님이다. 만성스님은 공부에만 전념하시며 다른 것에는 전혀 관심조차 갖지 않던 분이었는데 전생의 연이 닿았는지 스님을 상좌로 들였다. 현행스님은 은사스님에 대한 존경심과 효행심이 지극했다. 한번은 공부를 하러 가는 것을 일념으로 삼고 계신 은사스님께 보탬을 드리고 싶은 마음에 시계를 팔아 은사스님의 양식 값을 마련했다. 그 후에도 안거결제를 하러 가실 때에는 누룽지를 말려 빻아 미숫가루를 만들고, 설탕을 준비해서 은사스님을 홍성까지 배웅하기도 했다. 은사스님이 좋아서 더 멀리까지 배웅을 하고 싶었으나 그만오라고 하셔서 더 가지는 못했다.
입적
현행스님은 응민스님과 절친한 도반이었다. 공부에 대해 늘 탁마를 하며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인연이 짧았는지 응민스님은 먼저 입적했다. 현행스님은 남아 있는 자신이 응민스님의 몫까지 더욱 열심히 공부를 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님은 80세 가까운 고령에도 세세생생 사람으로 태어나 불법을 만나 열심히 살면 신장님, 불보살님이 도와주신다는 믿음으로 수행에 임했다.
현행스님은 2002년 견성암에서 수행의 열정을 후학에게 남기고 세수 75세, 법랍 58세로 입적했다.
수계제자로는 명안(明岸)·명관(明官)·명선(明仙)·명지(明志)·명상(明尙)·돈오(頓悟)스님 등이 있다.
음성 미타사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法住寺)의 말사이다.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현존하는 사찰의 유물로 보아 고려 말기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임진왜란 때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4년 이 폐사에 수덕사의 비구니 명안(明岸)이 중창의 원력(願力)을 세워 1965년 4월 8칸의 당우를 건립하였으며, 승려 금오(金烏)와 혜암(惠庵)이 수도자가 도를 깨칠만한 도량이라고 하였다. 그 뒤 1979년 사역대확장작업과 함께 흙벽 8칸의 기와집을 헐고 그 자리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집 극락전과 삼성각(三聖閣)을, 그리고 이듬해 선방 등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고려 말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높이 90㎝의 석조 아미타여래좌상과 미타사 입구에서 서쪽으로 약 700∼800m 지점에 있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된 높이 230㎝의 마애불이 있다. 이 중 아미타여래좌상은 현몽을 하여 이 절을 중창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삼성각 안에 봉안되어 있다.
이 밖에 1976년 법당 앞 채소밭에서 출토된 지름 75㎝의 맷돌과 범자(梵字) 등이 새겨진 명문와(名文瓦), 9개의 연꽃잎이 3중으로 조각된 고려 말기의 숫막새, 대웅전 기초공사를 하다 출토된 물오리 모양의 기와, 1973년 3월 법당 뒤에서 출토된 금동불(金銅佛) 등 많은 유물들이 있다.
-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20029
음성 미타사 마애여래입상 (陰城 彌陀寺 磨崖如來立像)
자연 암벽을 이용하여 불신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머리와 어깨 부분을 깊이 새겨 상반신의 입체감을 부각시켰다. 전체 높이 4.05m이며 민머리 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높은 머리묶음, 부피있는 네모난 얼굴, 눈·코·입의 처리 등에서 형식화가 뚜렷이 진행되고 있다.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주름은 사선으로 흐르고 있다. 오른손은 밑으로 내렸고, 왼손은 들어 가슴 앞에 댄 모습으로 당시 불상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평판적인 신체, 직선적인 윤곽, 여기에 얇게 빚은 듯한 계단식 옷주름, 옷자락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 거구의 불상양식을 계승한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p. 617~620.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31.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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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賢行)스님 | 본항목 | 현행스님(賢行, 1928生~2002) | 賢行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현행스님(賢行,_1928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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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賢行)스님 | 실상문중(實相) | ~의 일원이다 | |
현행(賢行)스님 | 만성(萬性)스님 | ~의 수계제자이다 | |
현행(賢行)스님 | 예산 수덕사 견성암 | ~에서 출가하다 | |
현행(賢行)스님 | 만공(滿空)스님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현행(賢行)스님 | 석암(昔岩)스님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현행(賢行)스님 | 예산 수덕사 견성암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선원장 |
현행(賢行)스님 | 구족계단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비구니 증사(별소계단 8-14회 존증아사리) |
현행(賢行)스님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양산 내원사, 산청 대원사, 합천 해인사, 서울 승가사(구기동), 예산 수덕사 견성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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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수덕사 견성암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2-3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