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수인스님(守仁, 1899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bigun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스님의 청정계행)
(스님의 청정계행)
102번째 줄: 102번째 줄:
 
   
 
   
 
수인스님은 조석예불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예불 후에는 반드시 두 시간씩 기도정근을 하며 웬만한 의식들은 직접 집전하였다. 또한 기억력이 어찌나 좋은지 제경서문(諸經序文)들을 다 외울 정도였다. 시공을 초월한 확고부동한 신심과 원력에 근거한 법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수인스님은 조석예불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예불 후에는 반드시 두 시간씩 기도정근을 하며 웬만한 의식들은 직접 집전하였다. 또한 기억력이 어찌나 좋은지 제경서문(諸經序文)들을 다 외울 정도였다. 시공을 초월한 확고부동한 신심과 원력에 근거한 법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손주상좌 송탁스님에 의하면 수인스님은 만년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빨래조차 시봉에게 맡기지 않고 손수하셨다. 수행자는 자기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하면서 늘 수행을 열심히 하라고 강조하셨다. 스님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간경과 독송을 하셨다.
+
손주상좌 송탁스님에 의하면 수인스님은 만년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빨래를 시봉에게 맡기지 않고 손수하셨다. 수행자는 자기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하면서 늘 수행을 열심히 하라고 독려하셨다. 스님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간경과 독송을 지속하셨다고 한다.
  
 
===입적===
 
===입적===

2023년 3월 27일 (월) 22:26 판



정의

수인스님은 운문사 초대 주지로서 운문사 강원을 만들어 현재의 운문사를 만드는데 초석을 다진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899 경북 월성 출생
1907 청도 운문사 청신암에서 행민(幸敏)스님을 은사로 출가
1912 긍파사리(肯坡舍利)[1]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16~1922 통도사 해담(海曇)스님을 강사로 수의과 졸업
1922 마하사(반야사) 선방의 만공스님 회상에서 하안거를 시작으로 20여 안거
1923 통도사에서 해담(海曇)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40 수영 금련사 옛터에 서운암 창건
1941 서운암 주지
1955~1966 운문사 비구니 초대, 2·3대 주지 역임
1956~1959 영주암 주지
1959 제2대 중앙종회의원
1967 경남 기장 보명사 대웅전 창건 및 주지 취임
1983 범어사 단일구족계단 비구니 증사(3년간)
1997. 3. 12 부산 서운암에서 입적 (세수 99세, 법랍 90세)
문중 보운문중(普雲)
수행지침 간탐어물(慳貪於物)은 시마권속(是魔眷屬)이요, 자비보시(慈悲布施)는 시법왕자(是法王子)니라.
생활신조 참선, 주력(관세음보살) 간경, 잊지 말고 정진
수계제자 창법(昌法)⋅성우(性雨)⋅영옥(永玉)⋅혜엽(慧燁)⋅덕만(德挽)

활동 및 공헌

출가

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113
1963. 5. 26 운문사에서
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115
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116

성월당(性月堂) 수인(守仁)스님은 1899년 9월 3일 경북 월성군 산내면 심천리에서 아버지 유석곤과 어머니 윤영호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기계이며, 이름은 유수인이다. 남달리 총명한 유년시절을 보내던 중에 8세 때 아버지를 잃고 하루하루 슬픔에 잠겨 지내던 스님은 운문면 신원동 고모님 댁으로 가게 되었다.

당시 청신암은 대중이 모여 사는 선방이었는데, 주지스님은 후학의 연(緣)을 위해 늘 기도하셨다. 기도 회향 날 신원리로 탁발을 갔다가 어린 수인스님을 만났다. 그것이 인연(因緣)이 되어 수인스님은 청신암으로 오게 되었다.

행민(幸敏)스님을 은사로 삭발염의한 때가 9세였는데, 철없을 시절이었음에도 별리(別離)의 슬픔과 새로운 출발의 벅참이 엇갈리어 눈물이 솟았다.

수행

스님은 18세에 통도사 강원에서 초발심자경문과 치문을 배우고 법화경과 화엄경까지 다 보았는데 특히 법화경을 일심전념으로 보았다. 그 공덕으로 후학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으며, 신도들을 제접할 때도 법화경을 전거로 들어 법문을 설하였다.

1922년 통도사 강원을 졸업한 후에 부산 금련산 마하사 선방인 반야암에서 만공 선사 밑에서 안거를 지냈고 그 후로 부산 범어사 대성암, 양산 내원사, 금강산 유점사와 보덕암, 신계사 법기암 등의 선방에서 20안거를 지냈다.

운문사 주지를 맡다

수인스님은 정화운도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팔공산 동화사 비구니총림에서 소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이 때 스님은 동화사를 점거하고 떠나기를 거부하던 대처승들과 잘 타협하여 동화사 정화를 성공적으로 해냈다. 그 후 종단에서 동화사를 비구니총림으로 삼겠다던 계획을 취소하자 스님은 밀양 표충사로 옮겨가게 되었다. 스님은 표충사의 대처승들과도 지혜롭게 타협하여 표충사의 정화를 성공적으로 해냈다. 그후 운문사로 옮겨와 주지 소임을 맡았는데, 대처승이 휩쓸고 간 운문사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1955년 스님은 운문사 주지직을 맡아 직접 후학의 도제양성을 위해 강원 교육 체제를 신설하면서 각종 불사에 전념하였다. 평소에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수인스님은 능인학원 이사를 역임하는 등 청소년 포교에도 관심이 많았다. [2] 그러던 중 대처승의 모함과 소송 제기로 법정에 세 번이나 서게 되었다. 마지막 재판 때에는 승소한 줄도 모르고 그 자리에서 합장한 채로 관음주력삼매에 들어 있었다고 한다.

굴뚝 하나도 온전하지 못했던 운문사를 새로운 청정도량으로 가꾸어가는 데는 수년의 세월이 걸렸다.

한번은 오백나한전이 협소하여 고심하고 있는데, 마침 통도사 극락암 조실이신 경봉 큰스님께서 운문사 사리암 기도를 마치고 큰절에 들르셨다. 나한전을 참배한 뒤 큰스님이 나한님 한 분을 살며시 들자 그 밑에서 연기(내력)가 나왔다. 그래서 대웅전 석편(石便)으로 나한전을 신축하게 되었다. 대웅전에 모셔 놓았던 오백나한전의 주불이신 석가모니불을 옮겨 모시는데, 토불이라 옮기는 게 쉽지 않아 동민(洞民) 30여 명을 동원하였다.

당시만 해도 정화 직후라 비구니가 큰절을 맡았다고 하면 비구스님들이 와서 둘러보고 노골적으로 무시를 하며 애를 먹이던 때였다. 하루는 한 객승이 와서 마당 한 편이 움푹 파여 물이 고인 것을 보고 “저것이 무엇이오?"라고 물었다. 그러자 수인스님은 ”그것은 연당(蓮塘)이오.“하고 대답하였다. 객승이 이번에는 다 무너져가는 요사채 굴뚝을 보고 물었다.

”저것은 무엇이오?“

”저것은 첨성대요.“

수인스님의 재치 있는 말씀에 객승은 더 이상 흠을 잡지 못한 채 오히려 감탄을 했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 당시 운문사 사답 전부가 상환된 적이 있었다. 소작인들이 이미 상환료를 지불한 상태여서 상황은 매우 나빴다. 그때 수인 스님은 마을에 내려가서 가가호호 방문을 하였다. 그리고 사리 밝고 자비로운 말씀으로 한 사람 한 사람 설득하여 토지를 다시 운문사로 돌려주겠다는 도장을 받았고, 결국 사답 백여 마지기를 빠짐없이 되찾아 놓았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유수인 주지스님이 아니라면 논을 절대로 내놓지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 특명인데 왜 내놓았겠느냐. 멀리 외지에서 온 낯선 스님네라면 턱도 없었을 것이다. 절대 도장을 찍지 않았을 것이다.’ 등등의 말을 했다고 한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인근에는 ‘유수인 스님 화내는 것을 볼래, 동문 안 노스님 웃는 것을 볼래? 김 안 나고 뜨거운 사람이 바로 수인스님이다.’ 라는 말이 돌기도 하였다.

스님의 청정계행

출가 이후 평생 참선과 간경(看經), 주력(呪力)정진을 놓지 않았던 스님의 거침없는 말씀은 오늘날 출가수행자들에게 날카로운 경책으로 다가온다. 수행자로서 스님의 청정계행은 모든 비구니 납자들의 규범이 되어 지금도 후학들에게 그 법향을 전하고 있으니, 비구니 종풍의 근간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수인스님은 조석예불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예불 후에는 반드시 두 시간씩 기도정근을 하며 웬만한 의식들은 직접 집전하였다. 또한 기억력이 어찌나 좋은지 제경서문(諸經序文)들을 다 외울 정도였다. 시공을 초월한 확고부동한 신심과 원력에 근거한 법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손주상좌 송탁스님에 의하면 수인스님은 만년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빨래를 시봉에게 맡기지 않고 손수하셨다. 수행자는 자기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하면서 늘 수행을 열심히 하라고 독려하셨다. 스님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간경과 독송을 지속하셨다고 한다.

입적

평소 아랫사람들에게 ‘간탐어물(慳貪於物)은 시마귀속(是魔眷屬)이요 자비보시(慈悲布施)는 시법왕자(是法王子)니라.’는 교훈으로 경책하던 수인스님은 1997년 3월 12일 운문사 청신암에서 세수 99세, 법랍 90세로 사바의 연을 접었다.

수계제자로 창법(昌法)⋅성우(性雨)⋅영옥(永玉)⋅혜엽(慧燁)⋅덕만(德挽), 손상좌 명희·신원·순행·상영·혜광·상진·지안·묘전·일원·현덕·종성·수환·현원·현성·도명스님이 있다.

운문사

운문사
사진출처 : 산따라 물따라 (인터넷 블로그) https://blog.daum.net/bori-yo/5186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신승이 창건한 절로 608년(진평왕 30)에는 원광법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크게 중창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 권4 원광서학(圓光西學) 및 보양이목조(寶壤梨木條)에 원광법사와 운문사는 관련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적기 寺蹟記〉에 따르면 고려시대인 937년(태조 20) 중국 당(唐)나라에서 법을 전수받고 돌아온 보양국사(寶壤國師)가 까치떼의 도움으로 이 절을 짓고 작갑사(鵲岬寺)라 했으나, 943년 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이 보양국사가 절을 세웠다는 말을 듣고 많은 전답과 함께 '운문선사'(雲門禪寺)라고 사액한 뒤부터 운문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105년(숙종 10)에 원진국사(圓眞國師)가 중창한 이후로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으며, 조선시대인 1690년(숙종 16) 설송(雪松)이 임진왜란 때 폐허화된 절을 다시 중건하여 어느 정도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현재 이 절에는 조계종 운문승가대학이 설치되어 많은 비구니들의 교육과 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경내에는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만세루(萬歲樓)를 비롯하여 대웅보전(보물 제835호)·미륵전·작압전(鵲鴨殿)·금당·강당·관음전·명부전·오백나한전 등 조선시대의 많은 건물들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금당앞석등(보물 제193호)·동호(보물 제208호)·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사천왕석주(보물 제318호)·3층석탑(보물 제678호) 등이 있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수인(守仁)스님 본항목 수인스님(守仁, 1899~1997) 守仁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수인스님(守仁,_1899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수인(守仁)스님 보운문중(普雲) ~의 일원이다
수인(守仁)스님 행민(幸敏)스님 ~의 수계제자이다
수인(守仁)스님 청도 운문사 청신암 ~에서 출가하다
수인(守仁)스님 긍파사리(肯坡舍利)스님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수인(守仁)스님 해담(海曇)스님 ~(으)로부터 수계하다 비구니계
수인(守仁)스님 양산 통도사 서운암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감원(주지)
수인(守仁)스님 청도 운문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
수인(守仁)스님 부산 영주암(망미동)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감원(주지)
수인(守仁)스님 기장 보명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
수인(守仁)스님 부산 서운암(망미동) ~을(를) 창건하다
수인(守仁)스님 기장 보명사 ~을(를) 중창하다
수인(守仁)스님 안거 ~을(를) 성만하다 부산 마하사(반야사, 연산동) 등
수인(守仁)스님 구족계단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비구니 증사(별소계단, 3년간)

한국 비구니 인명사전 데이터 아카이브로 가기

지도



주석

  1. 운문사부도군(雲門寺浮屠群)에 대선사긍파당대연사리부도비(大禪師肯坡堂大淵舍利浮屠碑(1915))가 있음(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 한국비구니수행담록은 수인스님이 1955년 초대 주지를 맡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운문사 홈페이지 (http://unmunsa.or.kr/?c=79/86/95/159 )에는 금광(금룡)스님이 초대, 수인스님은 2대와 3대 주지를 맡은 것으로 되어 있음


다른 비구니 스님

각림스님(覺棽, 1927년생) 각심스님(覺心, 1936년생) 경도스님(敬道, 1941년생) 경륜스님(暻輪, 1953년생) 경문스님(京門, 1963년생)
경법스님(敬法, 1922년생) 경순스님(景順, 1925년생) 경신스님(敬信, 1947년생) 경원스님(庚圓, 1960년생) 경주스님(敬柱, 1935년생)
경준스님(敬俊, 1933년생) 경훤스님(敬昍, 1946년생) 경희스님(慶喜, 1931년생) 계수스님(桂修, 1946년생) 계전스님(戒田, 1889년생)
계주스님(季珠, 1914년생) 계환스님(戒環, 1953년생) 관월스님(觀月, 1904년생) 관정스님(觀晶, 1937년생) 관주스님(觀柱, 1922년생)
광옥스님(光玉, 1943년생) 광우스님(光雨, 1926년생) 광호스님(光毫, 1915년생) 금룡스님(金龍, 1892년생) 긍탄스님(亘坦, 1885년생)
뇌묵스님(雷默, 1919년생) 능인스님(能忍, 1944년생) 능인스님(能仁, 1946년생) 대각스님(大覺, 1914년생) 대영스님(大英, 1903년생)
대우스님(大愚, 1949년생) 대은스님(大恩, 1852년생) 대행스님(大行, 1927년생) 대현스님(大玄, 1916년생) 대현스님(大玄, 1957년생)
덕념스님(德念, 19세기중엽년생) 덕수스님(德修, 1922년생) 덕운스님(德雲, 1942년생) 도광스님(度光, 1952년생) 도문스님(道門, 1942년생)
도상스님(道常, 1937년생) 도성스님(道成, 1922년생) 도연스님(道鍊, 1911년생) 도원스님(道圓, 1904년생) 도준스님(道準, 1900년생)
도헌스님(度憲, 1939년생) 도훈스님(道勳, 1933년생) 동근스님(東根, 1951년생) 동성스님(東城, 1913년생) 동현스님(東玄, 1945년생)
동희스님(東熙, 1945년생) 만선스님(萬善, 1883년생) 만선스님(萬善, 1906년생) 만선스님(萬善, 996년생) 만성스님(萬性, 1897년생)
명길스님(明吉, 1931년생) 명륜스님(明倫, 1937년생) 명성스님(眀星, 1931년생) 명수스님(明洙, 1925년생) 명심스님(明心, 1947년생)
명안스님(明岸, 1941년생) 명오스님(明悟, 1916년생) 명완스님(明完, 1937년생) 명주스님(明珠, 1904년생) 명철스님(明哲, 1939년생)
묘각스님(妙覺, 1928년생) 묘각스님(妙覺, 1942년생) 묘관스님(妙觀, 1936년생) 묘관스님(妙觀, 1948년생) 묘광스님(妙硄, 1946년생)
묘길스님(妙吉, 1900년생) 묘담스님(妙湛, 1776년생) 묘순스님(妙洵, 1946년생) 묘엄스님(妙嚴, 1931년생) 묘운스님(妙雲, 1921년생)
묘전스님(妙全, 1938년생) 묘정스님(妙精, 1943년생) 묘정스님(妙靜, 1949년생) 묘찬스님(妙璨, 1926년생) 묘희스님(妙喜, 1937년생)
무구스님(無垢, 1959년생) 무진스님(無盡, 외국인) 무진스님(無盡, 1954년생) 문수스님(紋秀, 1939년생) 백졸스님(百拙, 1936년생)
범조스님(梵早, 1941년생) 법공스님(法空, 1471년생) 법공스님(法空, 1937년생) 법농스님(法農, 1962년생) 법능스님(法能, 1932년생)
법륜스님(法倫, 1948년생) 법선스님(法船, 1899년생) 법성스님(法性, 1914년생) 법성스님(法惺, 1938년생) 법성스님(法性, 1940년생)
법용스님(法涌, 1936년생) 법운스님(法雲, 1927년생) 법운스님(法雲, 1937년생) 법인스님(法印, 1930년생) 법일스님(法一, 1904년생)
법전스님(法田, 1927년생) 법전스님(法典, 1945년생) 법종스님(法宗, 1945년생) 법진스님(法眞, 1942년생) 법천스님(法泉, 1944년생)
법형스님(法衡, 1921년생) 법홍스님(法弘, 1943년생) 법희스님(法喜, 1887년생) 법희스님(法稀, 1923년생) 법희스님(法希, 1930년생)
법희스님(法熺, 1952년생) 보각스님(普覺, 1904년생) 보각스님(寶覺, 1938년생) 보명스님(寶明, 1946년생) 보명스님(寶明, 1954년생)
보문스님(普門, 1938년생) 보선스님(普善, 1946년생) 보영스님(普暎, 1937년생) 보원스님(普願, 1944년생) 보인스님(寶仁, 1924년생)
보인스님(普仁, 1933년생) 보현스님(普賢, 1934년생) 보화스님(普和, 1933년생) 본각스님(本覺, 1952년생) 본공스님(本空, 1907년생)
봉려관스님(蓬廬觀, 1865년생) 불필스님(不必, 1937년생) 상근스님(祥根, 1872년생) 상덕스님(常德, 1951년생) 상덕스님(常德, 1952년생)
상덕스님(尙悳, 1925년생) 상락스님(常樂, 1928년생) 상륜스님(相侖, 1929년생) 상명스님(尙明, 1909년생) 상원스님(相源, 1939년생)
상조스님(常照, 1951년생) 상훈스님(常熏, 1944년생) 서용스님(瑞庸, 1948년생) 선경스님(禪敬, 1904년생) 선광스님(善光, 1949년생)
선재스님(善財, 1956년생) 선주스님(禪周, 1938년생) 선진스님(善眞, 1961년생) 선행스님(善行, 1934년생) 선혜스님(善慧, 1911년생)
설오스님(說吾, 1958년생) 설호스님(雪皓, 1933년생) 성경스님(晟鏡, 1941년생) 성관스님(性觀, 1940년생) 성관스님(成觀, 1951년생)
성덕스님(盛德, 1942년생) 성륜스님(性輪, 1918년생) 성림스님(成林, 1916년생) 성문스님(性文, 1893년생) 성법스님(性法, 1929년생)
성수스님(性樹, 1948년생) 성연스님(性蓮, 1920년생) 성연스님(聖蓮, 1928년생) 성우스님(惺牛, 1918년생) 성원스님(性源, 1918년생)
성월스님(性月, 1947년생) 성일스님(性一, 1944년생) 성주스님(性主, 1825년생) 성주스님(性住, 1938년생) 성주스님(性珠, 1946년생)
성지스님(聖智, 1926년생) 성진스님(性眞, 1896년생) 성총스님(聖叢, 1944년생) 성타스님(性陀, 1934년생) 성탄스님(性坦, 1911년생)
성해스님(性海, 1889년생) 성현스님(聖賢, 1927년생) 세등스님(世燈, 1926년생) 소림스님(昭林, 1937년생) 수옥스님(守玉, 1902년생)
수인스님(守仁, 1779년생) 수인스님(守仁, 1899년생) 수진스님(守珍, 1916년생) 수진스님(修眞, 1950년생) 수현스님(修賢, 1940년생)
수현스님(修賢, 1941년생) 수환스님(修還, 1950년생) 순희스님(順姬, 1917년생) 신전스님(信典, 1934년생) 연호스님(蓮湖, 1930년생)
영수스님(暎修, 1941년생) 영운스님(靈雲, 1946년생) 영원스님(盈圓, 1949년생) 영춘스님(永春, 1894년생) 예순스님(禮順, 1587년생)
운달스님(雲達, 1942년생) 원오스님(圓悟, 1933년생) 원표스님(圓表, 1951년생) 월혜스님(月慧, 1895년생) 육년스님(六年, 1906년생)
육문스님(六文, 1946년생) 윤호스님(輪浩, 1907년생) 은영스님(恩榮, 1910년생) 응민스님(應旼, 1923년생) 인성스님(仁成, 1901년생)
인완스님(仁完, 1930년생) 인정스님(仁貞, 1899년생) 인허스님(印虛, 1911년생) 인홍스님(仁弘, 1908년생) 인화스님(忍和, 1912년생)
일광스님(一光, 1899년생) 일선스님(一禪, 1952년생) 일연스님(一衍, 1947년생) 일엽스님(一葉, 1896년생) 일조스님(日照, 1910년생)
일지스님(逸智, 1944년생) 일초스님(一超, 1943년생) 일현스님(一玄, 1952년생) 일홍스님(一弘, 1939년생) 일효스님(一曉, 1934년생)
자광스님(慈光, 1936년생) 자득스님(慈得, 1945년생) 자민스님(慈珉, 1939년생) 자산스님(慈山, 1933년생) 자원스님(慈元, 1937년생)
자윤스님(慈允, 1928년생) 자은스님(慈恩, 1943년생) 자현스님(慈賢, 1896년생) 장일스님(長一, 1916년생) 재근스님(在根, 1940년생)
재문스님(載文, 1943년생) 재현스님(在玄, 1946년생) 재호스님(宰毫, 1938년생) 재홍스님(在洪, 1931년생) 적조스님(寂照, 1942년생)
정관스님(靜觀, 1945년생) 정덕스님(正德, 1933년생) 정률스님(廷律, 1963년생) 정명스님(淨明, 1940년생) 정명스님(正明, 1954년생)
정목스님(正牧, 1960년생) 정묘스님(靜妙, 1941년생) 정성스님(定星, 1940년생) 정수스님(貞守, 1939년생) 정수스님(淨洙, 1941년생)
정심스님(定心, 1918년생) 정심스님(正心, 1925년생) 정안스님(正眼, 1950년생) 정안스님(淨岸, 1951년생) 정운스님(淨雲, 1954년생)
정원스님(正圓, 1939년생) 정인스님(正忍, 1946년생) 정일스님(淨日, 1934년생) 정행스님(淨行, 1902년생) 정화스님(淨華, 1922년생)
정화스님(貞和, 1923년생) 종수스님(宗秀, 1922년생) 종수스님(鍾修, 1922년생) 종식스님(宗植, 1944년생) 종실스님(宗實, 1951년생)
지광스님(志光, 1934년생) 지광스님(智光, 외국인) 지명스님(智明, 1921년생) 지문스님(志門, 1958년생) 지성스님(志性, 1939년생)
지순스님(芝順, 1913년생) 지연스님(知衍, 1947년생) 지오스님(智悟, 1955년생) 지우스님(至牛, 1935년생) 지원스님(知元, 1931년생)
지원스님(智圓, 1938년생) 지원스님(智願, 1942년생) 지인스님(智因, 1937년생) 지행스님(智行, 1941년생) 지향스님(智向, 1941년생)
지현스님(智玄, 1916년생) 지현스님(智賢, 1933년생) 지형스님(志炯, 1947년생) 지호스님(智毫, 1956년생) 지환스님(知幻, 1261년생)
지환스님(智環, 1936년생) 지훈스님(志訓, 1947년생) 진관스님(眞觀, 1928년생) 진오스님(眞悟, 1904년생) 진우스님(眞愚, 1934년생)
진우스님(眞愚, 1949년생) 창법스님(昌法, 1918년생) 창수스님(昌守, 1842년생) 창호스님(彰浩, 1889년생) 천일스님(天日, 1912년생)
청룡스님(靑龍, 1925년생) 쾌민스님(快敏, 1916년생) 쾌유스님(快愈, 1907년생) 탁연스님(卓然, 1949년생) 탄형스님(呑炯, 1948년생)
태경스님(泰鏡, 1930년생) 태구스님(泰具, 1920년생) 하경스님(荷景, 1937년생) 해성스님(海成, 1958년생) 해운스님(海雲, 1920년생)
해주스님(海住, 1951년생) 행원스님(行願, 1927년생) 허경스님(虛鏡, 1440년생) 현각스님(玄覺, 1935년생) 현묵스님(炫默, 1932년생)
현성스님(賢星, 1945년생) 현수스님(賢秀, 1943년생) 현정스님(玄定, 1948년생) 현진스님(玄眞, 1934년생) 현진스님(玄眞, 1937년생)
현찬스님(賢讚, 1934년생) 현행스님(賢行, 1928년생) 혜경스님(慧鏡, 1924년생) 혜광스님(慧光, 1940년생) 혜근스님(慧根, 1935년생)
혜돈스님(慧頓, 1949년생) 혜등스님(慧燈, 1946년생) 혜명스님(慧明, 1917년생) 혜문스님(慧門, 1930년생) 혜소스님(慧沼, 1931년생)
혜안스님(慧眼, 1912년생) 혜안스님(慧眼, 1923년생) 혜옥스님(慧玉, 1901년생) 혜운스님(慧雲, 1911년생) 혜원스님(慧圓, 851년생)
혜은스님(慧隱, 1937년생) 혜일스님(慧日, 1919년생) 혜일스님(慧日, 1947년생) 혜전스님(慧田, 1929년생) 혜종스님(慧宗, 1930년생)
혜주스님(慧珠, 1925년생) 혜준스님(慧俊, 1935년생) 혜춘스님(慧春, 1919년생) 혜해스님(慧海, 1921년생) 회선스님(會善, 1926년생)
효성스님(曉星, 1898년생) 효성스님(曉惺, 1927년생) 효성스님(曉星, 1948년생) 효천스님(曉天, 1941년생) 효탄스님(曉呑, 1955년생)
희선스님(喜善, 1929년생) 희원스님(喜圓, 1951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