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선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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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토론) 사용자의 2017년 6월 14일 (수) 21:1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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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도 - 기려수필 : 의병장 묶어..?

해당 작품은 삼일운동을 준비하는 데 앞장선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이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3·1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모습이다.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 대표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김완규, 나용환, 이종훈, 홍병기, 이종일, 최린 15명과,
그리스도교 대표 이승훈, 박희도, 이갑성, 오화영, 최성모, 이필주, 김창준, 신석구, 박동완, 신홍식, 양전백, 이명룡,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16명,
불교측 대표 한용운백용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오후 2시에 모이기로 했던 33인 중 기독교 소속 4인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를 제외한 29인이 태화관에 모여 3시까지 4인을 기다리다 29인만이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고, 오후 4시경에 행사를 끝냈다.

『파릉산집(巴陵散集)』에는 '許浚在於孔庵 下漏屋 是洞作著 浚卒爲庵'라는 글이 있는데 공암(孔庵)은 공암(孔巖)의 오류이며, 동(洞)은 허가바위에 뚫려있는 동굴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이 동굴 속에서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저술을 완성하였다는 뜻이다

해당 작품은 허준이 유배지에서 동의보감을 저술하던 장면을 그린것이라 추정된다. 허준의 유배지에 대해서는 해남 아래 등 이라고 추정되나, 아직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허준이 공암 아래에 있는 누옥에서 기거하였느데, 이 동굴에서 저술활동을 하였다.

구암학보(1993년 12월호)에 강훈덕교수(전 성심여대 민속학 교수)가 쓴 “許浚史蹟址 孔巖에 대한 考察”이란 제호의 글에는 파릉산집에 있는 「」(허준이 누수(빗물)가 뚝뚝 흐르는 동굴암자에서 책을 저술하였으며 또 암자에서 돌아가셨다)이라는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파릉산집의 저자는 산허거사(山墟居士)라고 되어있다.

출처: http://gskyk.tistory.com/101 [더불어 잘사는 행복도시 강서구] 답사정보 / 경기-1106 / 답사지정보


민영환

민영환(閔泳煥) 집터 견지동 27-2번지 지금의 조계사 입구 쪽에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에 분격하여 자결한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민영환이 살던 집이 있었다. 민영환은 고종15년(1878) 문과에 급제 한 뒤 동부승지, 병조판서, 한성판윤 등을 거쳤으며 고종32년(1895) 주미전권공사에 이어 1897년에는 영국 등 6개국을특명대사로 다녀오는 등으로 해외 문물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는 이에 자극을 받아 정부 개혁을 주장하고 독립협회를 후원하는 등으로 인해 같은 민씨들로 부터 미움을 받았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민영환은 국가의 대세가 이미 기울었음을 알고 11월 30일 새벽 6시 전동 이완식의 집(지금의 공평동2번지)에서 국민과 외교사절, 고종황제에게 보내는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그가 순국할 때 큰 별이 서쪽하늘에서 떨어지고 까치가 떼로 몰려와 울었다고 한다. 순국 후 피 묻은 옷과 칼을 상청(喪廳) 마루방에 걸어두었는데 이듬해 5월 상청의 문을 열고 보니 대나무 4줄기가 마룻바닥과 피 묻은 옷을 뚫고 올라왔으므로 사람들은 그의 충정이 혈죽(血竹)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이 나무를 절죽(節竹)이라고 하였다. 그의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조병세를 비롯한 많은 인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였다 [출처] 견지동(堅志洞), 조계사, 우정총국, 민영환집터|작성자 2008jsl

http://blog.naver.com/ripejoy/40195366743

http://blog.naver.com/hhej88/10100003236


http://pub.chosun.com/client/news/print.asp?cate=C01&mcate=M1003&nNewsNumb=20151018483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22600329205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2-26&officeId=00032&pageNo=5&printNo=10586&publishType=00020 ->고증오류 관련 : 사명당, 곽재우, 김태, 계백장군 봉오동, 최대섭 등...





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작가 손수광
제작연도 1976년
규격 300호(197x290.9cm)
유형 항일
분류 유화
소장처 독립기념관



설명

해당 작품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순국지사 충정공 민영환(閔泳煥)이 1905년 11월 30일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한 장면을 그린 기록화이다.

민영환은 조선왕조 고종때의 문신으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될 때 의정 대신 조병세(趙秉世)와 조약의 폐기를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고하는 세 통의 유서를 남기고 1905년 11월 30일 새벽에 홀로 자결하였다.
유서는 작품 왼쪽 아래 위치한 앉은뱅이 책상 위에 그려져 있는데, 작은 명함에 쓰여진 유서 한 통이 국민에게 각성을 요망하는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訣告我大韓帝國二千萬同胞)>이고, 두루마기에 쓰여진 유서 두 통이 미국 공사관에 있는 친지에게 보낸 유서로, 일본의 침략을 바로 보고 한국을 구해줄 것을 요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또 다른 한 통의 유서는 고종 황제에게 올린 글이다.

작품 속 민영환은 훈장과 견장을 단 서구식 예복을 입고 있고, 왼손 근처에 작은 칼이 놓여져 있다. 실제 그의 자결과 관련하여 여러가지 상반되는 의견들이 있는데, 당시 그의 최후를 목격했던 김우현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민영환은 한복차림으로 사망했고, 장도(粧刀)로 몸의 여러부분을 찔러 유혈이 낭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사망 현장 목격자 중 한 명인 시종무관 어담(魚潭)은 그가 오른손에 손톱 깎기만한 작은 칼을 쥔 채로 사망하였고, 할복 자살을 시도하였다가 실패하여 목을 찔러 두 치 넓이의 구멍을 내었다고 회고하였고, 민영환의 장남 민장식의 아들인 민병진도 그의 조부가 단도로 목숨을 끊었다고 밝혔다.

작품에 묘사된 배경은 승려와 마당의 석등[1] 등을 고려하였을 때 조계사 뒤편에 있던 민영환 자택으로 추정되며 유해가 갈무리되지 않고 자결할 당시의 상태 그대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민영환순국 자결한 장소는 의관 이완식의 집이라는 것이 국사편찬위원회의 고증을 거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시종무관 어담(魚潭)김우현 목사, 민병진의 회고에 따르면, 민영환의 집민영환의 어머니와 가족이 있었기에 자결 장소를 청지기였던 이완식의 집으로 택했으며, 그의 유해가 이완식의 집에서 발견된 뒤 본저(本邸)로 옮겨졌기 때문에 자결한 당시 모습을 하인 한 사람과 청지기 식구만 목격했다고 한다.

현재 이완식의 집 터는 민영환 자결터로서 추모 조형물이 세워져 있으며, 민영환자택이 위치했던 조계사 경내에는 민영환의 동상과 함께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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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민족기록화

항일운동 소재 작품

관련항목

A항목 B항목 관계
김지선 기타 손수광 A는 B에 의해 그려졌다
김지선 기타 독립기념관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김지선 기타 민영환 자결터 A는 B를 배경으로 한다
김지선 기타 민영환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시간정보

중심 시간정보명 시간값
김지선 기타 제작연도 1976년
김지선 기타 국립현대미술관 대여기간 1979년 1월 8일-1992년 1월 7일
김지선 기타 독립기념관 이전 연도 1998년

공간정보

중심 연결정보 공간정보이름 경도 위도
김지선 기타 前 소장처 국립현대미술관 37.4312234 127.0182276
김지선 기타 現 소장처 독립기념관 36.7835383 127.2210151

그래프

임시

참고문헌

  • 민영환 고증 오류 관련 문헌

1. 시종무관 어담(魚潭)의 회고 : 조정래, <아리랑 1: 조정래 대하소설>, 해냄, 2001, 325쪽; 윤병석, <한국독립운동의 해외사적 탐방기>, 지식산업사, 1994, 291쪽.

오전 5시경에 급사로부터 작야(昨夜) 민씨가 자살하였다는 말을 듣고 놀라 민씨저(閔氏邸)로 뛰어갔다. 민씨저가 의외로 조용하기로 집 사람에게 물은즉 괴정동(槐井洞)의 집사 집이라 하기로 또 그리로 뛰어가다가 중도에서 가인(家人)들과 친척들에게 떠받들리어 본저(本邸)로 돌아오는 민씨의 유해를 실은 교자(轎子)를 만나게 되어 따라 들어갔다. 곧 교자에서 이불에 쌓인 유해를 모셔내어 침실로 옮겼다. 언뜻 얼굴을 보니 옆으로 두 치 정도의 구멍이 난 목줄기로부터 아직까지 피가 흐르고 있었고 원망하는 듯 노한 듯 딱 부릅뜨고 있는 양쪽 눈은 처절하고도 가여웠다. 다음 오른손에 꽉 쥐고 있는 작은 칼을 풀어내고 의복을 벗기니 일(一)자로 할복하고 있었다. 칼을 만져보니 손톱 깎기에 쓰는 퍽 작은 칼로서 깊이 찌를 수 없었기에 다시 상처 위로 좌로 우로 몇 번이나 칼질한 것 같았다. 그 증거로 의복의 양 무릎에 좌우 손을 닦은 듯한 핏자욱이 묻어 있는데, 생피가 찐덕찐덕하여 작은 칼을 쓰기 어렵게 되자 좌우 손으로 칼을 바꿔 쥐어가며 한 손의 피를 무릎에 닦은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같이 하고도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목구멍을 옆으로 끊어 젖힌 것이 아닌가! 참으로 장절한 죽음이었다.

2. "민족기록화 대부분 사실과 달라", 『경향신문』, 1980.02.26(2017년 3월 2일 확인)

...그러나 당시 자결장소인 이완식의 집에 글공부하러드나들던 김우현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閔忠正公(민충정공)은 한복차림에 이른새벽에 자결했고 아침 일찌기 시신을 본가로 옮겨 하인 한 사람과 청지기 식구 외엔 목격한 사람이 없다는 것. 또 유서를 남길 마땅한 지필묵이 없어 손바닥크기의 종이에 유서를 남겼고 자결에 사용한 칼도 粧刀(장도)여서 몸의 여러부분을 찔러 유혈이 낭자했다는 것. 이러한 고증은 국사편찬위원장 최영희씨 등 국사학자들의 고증과도 일치하는데도 이 기록화는 전연 다르게 묘사되고 있다.

3. 민영환의 손자 민병진의 회고 : 김태완, "항일(抗日)과 친일로 이어진 명성황후 후손들의 120년 영락", 『월간조선』, 2015.10.06(2017년 3월 2일 확인)

"1905년 11월 4일 새벽 할아버지는 자택(서울 종로구 계동 133번지)으로 가시지 않고 청지기 집엘 갔었어요. 집에 어머니(증조모)와 가족이 있으니까 자결 장소를 청지기 집으로 택한 겁니다. 그곳에서 각국 공사에게 (을사늑약 파기를) 고하는 유서를 남기고 단도로 목숨을 끊으셨어요..."

주석

  1. "현재까지의 유물조사에 의하면 석등은 주로 사찰·능묘, 그리고 그 유적지에 주로 남아 있으며, 궁궐이나 저택 등의 유적지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다."- "석등",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비스(2017년 3월 2일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