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포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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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진포대첩은, 고려 말기인 우왕 6년(1380년)에 나세, 심덕부, 최무선 등이 지휘하는 고려 수군이 한국의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사이 금강 하구인 진포에 상륙한 왜구의 전함을 함포 공격으로 불사르고 왜구의 후방 퇴각로를 끊은 전투이다.

배경

1350년부터 왜구는 고려를 본격적으로 침입하기 시작하여 우왕 때에는 왜구의 침입이 절정을 이루었다. 왜구가 이같이 창궐한 것은 1333~1392년에 일본의 왕조가 남북으로 갈라져 전란이 지속됨에 따라 민간의 생활이 피폐해진데다가 중앙 권력이 지방을 통제할 수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왜구는 해안 지역은 물론이고 내륙 깊숙이 침입하여 고려의 백성들을 약탈하고 수도인 개성까지 침입하여 왕조의 근간을 흔들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해상에서의 보딩(Boarding) 전술과 창칼을 잡고 휘두르는 단병접전에 뛰어난 왜구의 공격에 맞서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구에 맞서기 위해 고려 조정은 수군력을 복구하는데 힘을 기울였고, 우왕 3년(1377년) 최무선의 건의로 화통도감(火㷁都監) 을 설치하고 화약과 각종 대포 및 이를 실을 수 있는 전함 개량에 나섰다. 최무선화포 개발은 고려가 왜구에 맞서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할 수 있게 해준 전환점이었다.

경과

1380년 8월 왜구들은 500여 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오늘날의 금강 어구에 해당하는 진포에 침입하였다. 왜구는 약탈한 곡식들을 함선에 적재할 때 흔들리지 않도록 큰 밧줄로 배들을 서로 잡아매고, 인근 주, 군 고을로 흩어져 들어가 곳곳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벌였다. 《고려사》《고려사절요》는 이때의 모습에 대해 시체가 산과 들에 덮였고 배로 옮기다 땅에 떨어진 쌀만 한 자나 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조정에서는 나세를 상원수로, 심덕부, 최무선을 부원수로 임명하여 진포로 파견하여 화약 무기를 적재한 신형 함선 100척을 거느리고 왜구를 진압하게 하였다.

고려 함선들은 진포에 이르러 밧줄로 서로 묶여있는 적함을 향해 일제히 화포화전, 화통을 사용해 집중 사격을 퍼부었다. 화공을 통해 고려 함대는 적선 500척을 모조리 파괴·소각시키고 왜구들에게 붙잡혀 있던 330명의 고려 백성을 구출하였다.

결과

진포대첩으로 인해 해안에 정박하여 있다가 화포로 모든 배를 잃은 왜구들은 사실상 퇴로를 차단당하였다. 그들은 상주, 영동, 옥주 등지로 달아나면서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에 고려 정부는 이성계양광도·전라도·경상도 삼도 순찰사로 임명하고, 왜구 토벌 명령을 내려, 남원 운봉에서 왜구들을 소탕하였다. 이것이 황산대첩이다. 이 전투에서 왜구는 단지 70여 명 만이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망하였으나 곧 토벌되었다. 진포에 침입할 때 왜구의 수가 10,000명이 넘었는데, 진포대첩황산대첩에 의해 전멸되었던 것이다.

의의와 평가

진포대첩은 세계 해전사에서 처음으로 화포를 사용한 전투로, 왜구의 침입을 막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진포대첩으로 이성계황산대첩이 가능하였고, 그는 고려를 구한 영웅으로 추앙받아 새 왕조를 개창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진포대첩이 조선 왕조 개창에 일조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진포대첩의 전술은 조선 수군의 전술 모델이 되었다. 200년 이후에 일어난 임진왜란이순신 장군 역시 같은 전술을 사용할 정도로 선진적 전술이었던 것이다.

노드 및 관계 테이블

노드 관계 노드
진포대첩 ~이 지휘했다 최무선
진포대첩 ~가 지휘했다 심덕부
진포대첩 ~가 지휘했다 나세
진포대첩 ~에서 격전했다 진포
진포대첩 ~에 기록되어있다 고려사
진포대첩 ~에 기록되어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진포대첩 ~에 기록되어있다 조선왕조실록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