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주-최익현 선생의 유해 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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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선생의 유해 환국
작가 이의주
제작연도 1976년
규격 300호(197x290.9cm)
유형 계몽/항일
분류 유화
소장처 미상


정의

1월 6일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서 일어난 최익현의 유해 환국을 담은 이의주 화백의 민족기록화.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정치인이며 독립운동가이자, 1905년 을사늑약에 저항한 대표적 의병장인 최익현은 1906년 1월 1일 대마도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최익현의 유해는 대마도 수선사(修善寺)에서 최익현과 함께 압송되어 감금되었던 임병찬이 1906년 1월 4일 제문을 읽은 이틀 후인 1월 6일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 도착하였다.

설명

작품 소재

1905년 11월 17일 강압적으로 체결된 을사늑약에 대항하여 최익현임병찬, 임락 등과 함께 1906년 6월 전라북도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거병하여, 정읍·순창을 지나 담양 방면으로 향하던중, 전주·남원 진위대와 대치하게 되었다. 그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하기 위하여[1] 의병진을 해산하였고, 1906년 6월 14일 끝까지 남아있던 최익현 이하 13인의 의병장들(임병찬, 고석진, 김기술, 문달환, 임현주, 유종규, 조우식, 조영선, 최제학, 나기덕, 이용길, 유해용)은 경성부로 압송되었고, 2개월간 일본군사령부에 감금된 끝에 최익현임병찬은 8월 하순 대마도 이즈하라 위술영 경비대에 이감되었다.
최익현은 일본 정부 측의 갖은 협박과 회유를 뿌리치고 단식에 돌입하였고, 1906년 1월 1일 쓰시마 섬 감옥에서 순국하였다.[2]
최익현의 유해는 1906년 1월 6일 부산 초량동에 닿았는데, 이른 아침에 최익현의 자제·조카·문인이 모두 부두 가에 나와 기다렸고, 상무사 사원 1천여 명이 큰 상여를 갖추고 큰 글씨로 '춘추대의 일월고충(春秋大義 日月孤忠)' 8자의 만장(輓章)을 비단에 써서 간대에 걸고 나와 영접했다고 한다.[3] 작품의 중앙에서 빨간 깃발에 흰 글씨로 새겨진 '춘추대의 일월고충(春秋大義 日月高忠)' 8자의 만장(輓章)과, 그 만장 옆으로 상여꾼들이 이고있는 그의 영구(靈柩)를 확인할 수 있다.
최익현의 제자인 권순도김영규가 영구를 옮기며 "이 배는 대한의 배요, 이 땅은 대한의 땅입니다."라고 울부짖으니 항구에 나와있던 시민들이 모두 최익현을 외쳐 부르며 통곡하였다고 하는데, 슬퍼하는 시민들의 모습도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늘 왼편에 그려진 구름 한가운데에 흰 옷을 입고 있고, 갓을 쓴 사람은 그의 복장으로 미루어 보아 최익현으로 추정되고, 그의 주변에 모인 많은 이들은 일제에 항거하다 목숨을 거둔 의병들로 추정된다.

작품 배경

작품의 공간적 배경은 부산 초량동에 위치했던 초량항이고,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최익현의 영구를 실은 배가 항구에 정박한 오전 8시 경으로 추정된다.
하늘 오른편에는 쌍무지개가 그려져 있는데, 실제로 최익현의 영구를 실은 배가 초량항에 도착하였을 때 구름이 끼고 가랑비가 내리던 날씨에서 쌍무지개가 서남쪽으로 뻗어 상무사에 닿았다고 한다.
최익현과 함께 의병활동을 주도했던 임병찬이 저술한 『대마도일기(對馬島日記)』에는 그 날의 날씨가 묘사되어 있다.

25px "그 날은 일기가 청명(晴明)하였는데, 배에서 내릴 때 갑자기 구름이 끼고 흐리더니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서쪽 하늘에 무지개가 섰었소. 상무회사(商務會社)와 각 학교, 거기에 사는 우리 백성 등 1천 5,6백 명이 모여들어 우니 우는 소리가 하늘과 땅을 움직였으며, 여학생 70여 명도 또한 울면서 영구(靈柩)가 쉬고 있는 상무회사(商務會社)로 몰려 들었소. 이 때 천기(天氣)는 도로 개었고... 25px
출처: "대마도일기·반구일기 해제(解題)", 『공훈전자사료관』online.


이 사실은 대한제국 말기부터 광복까지 애국지사들의 사적을 기록한 『기려수필(騎驢隨筆)』에도 나와 있다.

25px "선생의 대의는 우리 동국에서 천양되고 있나니/ 군자와 소인은 길이 같지 않음을 알겠도다/ 우뚝히 서 나라 위해 몸바쳐 충절의 혼백을 지녔으니/ 화란의 조짐을 막으려 임금께 직언하는 충성이라네/ 사적은 역사에 남고 꽃다운 이름 자부에 올릴 만하니/ 하늘이 무지개를 보내 상서로운 기운이 붉기도 하도다/ 널 앞에서 곡한 후 돌아와 단을 또 세우니/ 누가 다시 나라를 걱정하며 년풍(年豊)을 기원하리오." 25px
출처: "의충단 제영",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림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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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추후 제작 및 삽입 예정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이의주 이의주-최익현 선생의 유해 환국 A는 B를 그렸다 1976년
이의주-최익현 선생의 유해 환국 최익현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이의주-최익현 선생의 유해 환국 초량항 A는 B를 배경으로 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의주-최익현 선생의 유해 환국 A는 B를 대여하였다 1991년 11월 30일-1992년 11월 29일
최익현 지부복궐상소 A는 B와 관련이 있다 1876년 2월
지부복궐상소 조헌 A는 B와 관련이 있다
지부복궐상소 강화도조약 A는 B와 관련이 있다 1876년 2월 3일
최익현 을사의병 A는 B에 참가하였다 1906년 6월 4일-14일
을사늑약 을사의병 A는 B와 관련이 있다 1905년 11월 17일
임병찬 대마도일기 A는 B를 저술하였다 1906년
대마도일기 최익현 A는 B를 언급하였다
임병찬 최익현 A는 B와 관련이 있다
임병찬 을사의병 A는 B에 참가하였다 1906년 6월 4일-14일
최제학 반구일기 A는 B를 저술하였다 1906년 10월 19일-12월 22일
반구일기 최익현 A는 B를 언급하였다
최제학 최익현 A는 B의 제자이다
송상도 기려수필 A는 B를 저술하였다 1955년
기려수필 최익현 A는 B를 언급하였다
기려수필 임병찬 A는 B를 언급하였다
기려수필 안중근 A는 B를 언급하였다
기려수필 홍범식 A는 B를 언급하였다
기려수필 김좌진 A는 B를 언급하였다
최익현 선생 순국비 최익현 A는 B를 위한 비이다
최익현 선생 순국비 대마도 A는 B에 위치한다
최익현 최익현선생묘 A는 B에 묻혀있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976년 이의주가 이의주-최익현 선생의 유해 환국를 그렸다.
1991년 11월 30일-1992년 11월 29일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이의주-최익현 선생의 유해 환국을 대여하였다
1876년 2월 최익현지부복궐상소를 올렸다
1876년 2월 3일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1906년 6월 4일-14일 최익현을사의병에 참가하였다
1906년 6월 4일-14일 임병찬을사의병에 참가하였다
1906년 임병찬대마도일기를 저술하였다
1906년 10월 19일-12월 22일 최제학반구일기를 저술하였다
1955년 송상도기려수필을 저술하였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393554 127.053661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이의주-최익현 선생의 유해 환국을 대여하였다
35.1148246 129.0422093 초량항초량동에 위치했었다
36.5784297 126.7975753 최익현선생묘최익현이 묻혀 있는 묘이다
34.2017458 129.2908041 최익현 선생 순국비최익현을 위한 비이다

관련 민족기록화

시각자료

가상현실

추후 제작 및 삽입 예정

갤러리

영상

주석

  1. '최익현은 임병찬...위하여' - "을사의병", 『doopedia』online, 두산백과.
  2. '최익현은...순국하였다' - "최익현", 『위키백과』online.
  3. "대마도일기·반구일기 해제(解題)", 『공훈전자사료관』online.
  4. "민족기록화구국위업편1", 『국가기록원 기록물뷰어』online, 국가기록원.
  5. "민족기록화7", 『국가기록원 기록물뷰어』online, 국가기록원.
  6. "최규하 국무총리 민족기록화 구국위업편 전람회 관람", 『국가기록원 기록물뷰어』online, 국가기록원.
  7. "민족기록화구국위업편1", 『국가기록원 기록물뷰어』online, 국가기록원.
  8. "민족기록화7", 『국가기록원 기록물뷰어』online, 국가기록원.
  9. "최규하 국무총리 민족기록화 구국위업편 전람회 관람", 『국가기록원 기록물뷰어』online, 국가기록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