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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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영규대사(靈圭大師)는 임진왜란 때의 승병장이다.
조헌과 함께 금산전투에 참전하여 순국하였으며, 금산 칠백의총에 모셔져 있다.

생애

영규대사의 출가 전 속성(俗姓)은 밀양_박씨로 전해진다. 공주시 유평리에서 태어났으며,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공주_갑사에서 불목하니를 하였다고 전해진다.[1] 출가한 뒤 휴정의 제자가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에 대한 연유는 확실하지 않다. 공주_갑사 청련암에서 불법을 닦으면서 함께 무예를 익혔는데 그 재능을 따를 자가 없었으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분을 이기지 못하고 3일 동안 통곡하고 스스로 승병장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승병 1천명을 모집하여 옥천_가산사에서 승병을 훈련시켰다고 한다. 이후 의병장 조헌 선생과 함께 청주성_전투에서 왜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청주성의 수복은 청주지역을 회복한 것일뿐만 아니라 왜군이 호남지역과 충청지역으로 진출하는 데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는 거점을 빼앗았다는 측면에서 일대의 쾌거라고 할 수 있었다. 청주성_전투를 통해 영규대사는 조헌 선생과 인연을 맺고, 2차 금산전투에 참전하나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영규대사와 조헌 선생을 포함한 700명 모두가 그 자리에서 싸우다 순절하는 결과를 맞게 된다. 의주까지 피난을 갔던 선조 임금은 청주성에서의 승전소식을 듣고 영규대사에게 벼슬과 옷을 하사하였는데, 하사한 선물이 도착하기도 전에 영규대사는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조직하여 봉기한 것은 영규대사가 최초로, 이를 바탕으로 이후 전국 곳곳에서 승병이 봉기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선조 임금은 영규대사의 높은 공적을 인정해 사후 종2품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의 직위를 하사하였다.

연보

  • 해당사항 없음

저서와 작품

  • 해당사항 없음

평가

승려로서의 모습

  • 승려로서 영규대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자료는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의병으로서의 모습

  • 1592년 8월 1일 청주성_전투에서의 승리는 임진왜란 발발 4개월여만의 첫 지상전 승리로 알려져 있다.

이어 8월 18일 조헌이 이끄는 700명의 의병과 영규 대사가 이끄는 800명의 승병이 금산전투에 참전해 모두 순절하였으며, 이로부터 4일 뒤 조헌의 제자들이 시체를 거두어 커다란 하나의 무덤을 만들었으니 그것이 현재의 칠백의총에 해당한다. 이와 관련하여 그동안 불교계에서는 조선 시대 뿌리 깊은 배불(排佛)정책으로 인해 승장 영규 대사와 8백 명의 승군은 칠백의총에 함께 묻히지 못했다고 주장해왔다. 실제 선조수정실록은 조헌금산전투에 의병 700명을 이끌고 참전하자 영규 대사가 조헌을 혼자 죽게 할 수 없다며 승병 800명을 데리고 함께 싸워 모두 전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전투에서의 공적이 왜곡되거나 승병들의 활약상이 공적에서 누락되는 일이 흔하게 발생하였음을 고려할 때 그와 같은 맥락을 온전히 부정하기도 어렵다.

멀티미디어 자료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영규대사 대제"(2012.09.04)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영규대사전장기적비"(2012.10.04)


관련정보

민족기록화_작품

인물

  • 영규대사는 조헌과 함께 의병활동을 하였다.
  • 영규대사는 휴정의 제자이다.

공간

사건

문헌

개념

각주

  1. 공주_갑사에서.....전해진다: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편 "영규대사"

참고자료

온라인

● 전문기관 저작물

● 공공이용 저작물

● 보도방송 저작물

● 개인공간 저작물

오프라인

● 단행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