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승(驛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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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각 역도(驛道)에 파견되어 속역(屬驛)의 감독을 담당한 종9품 문관직.

개설

역승(驛丞)은 고려초기에 역(驛)이나 관(館)을 맡아보던 제도순관(諸道巡官)에서 비롯되었다. 1028년(고려 현종 19)에는 제도관역사(諸道館驛使)로 바뀌었고, 무신정변 이후 원종대에는 정역소복별감(程驛蘇復別監)으로 개칭되었다. 원나라 간섭기에는 잠치(站赤) 제도의 영향을 받아 포마차자색(鋪馬箚子色)을 설치하고, 다루가치(達魯花赤)과 토드코순[脫脫禾孫]을 파견하여 우역(郵驛) 사무를 지휘, 감독하게 하였다. 그 뒤 1389년(고려 공양왕 1)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역승이 설치되었다. 이후 별감(別監)과 분치되어 치폐를 거듭하다가, 1390년(고려 공양왕 2)에 역로의 소복을 주장한 조준(趙浚) 등의 건의에 따라 다시 설치되었다. 고려시대의 역제를 계승한 조선초기에는 역승 제도를 바탕으로 역도를 개편하였는데, 관에는 관승(館丞), 역에는 역승을 파견하여 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역승은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규정에 따라, 취재(取才)를 통해 선발된 서리(書吏)를 임명하였다. 서리의 취재법에는 강(講)·제술(製述)·서산(書算)이 있었는데, 강은 『경국대전』을 고사(考査)하고, 제술은 계본(啓本)·첩정(牒呈)·관(關) 중에서 하나를 택하며, 서산은 해서(楷書)·행산(行算)을 시험하였다. 이 세 가지에서 모두 합격한 자만이 역승으로 임명될 수 있었다. 그런데 역승은 품계가 너무 낮아 역무를 맡아보는 데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나중에는 종6품 찰방(察訪)을 파견하게 되었다.

담당 직무

역승의 주요 직무는 역도를 순행하면서 역마를 관리하고 역속을 감독하여 각 역의 업무를 원활하게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밖에도 역승은 매우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역승의 임무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유망인(流亡人)이나 유랑인을 체포하고 죄인을 압송하는 일, ② 삼척옥원역(沃原驛)의 경우처럼 군사 요충지를 방어하는 일, ③ 왕이 강무(講武)를 행하기 위해 지방에 행차했을 때 접대하는 일, ④ 역사(驛舍)나 관사(館舍)의 수리를 감독하는 일, ⑤ 도성의 축성 일꾼이나 유이민(流移民) 등을 구휼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그뿐 아니라 ⑥ 목장의 감목관을 겸직하며 목장을 관리하는 일, ⑦ 도첩(度牒)이 없는 승려를 수색해 보고하는 일, ⑧ 충청도 전의(全義) 지역에서 천연 약수인 초수(椒水)의 운송을 감독하는 일, ⑨ 흉년이 들었을 때 곡식 대여 및 구제 사업을 조사하는 일, ⑩ 불교의 재암(齋庵) 건립 등을 보고하는 일, ⑪ 환곡을 갚지 못할 경우 물자를 압령하는 일 등을 담당하였다.

역승에게는 인신(印信)을 주조해 지급하였으며, 임기를 채우거나 남다른 효행을 실천하거나 군공을 이룬 자는 고공법(考功法)에 따라 가자(加資)·승진·서용하는 등 많은 혜택을 주었다.

변천

조선시대의 역승은 역참의 신설과 이설 및 통합을 통해 역도-속역 체계를 재편하면서 확립되었다. 역도-속역 체계의 개편은 태종대부터 시작되었다. 1413년(태종 13) 9월에 서북면의 생양관에서 의순관까지 역승을 임명하고, 금교참에서 경천참까지는 관승을 임명하여, 그들의 관리 아래 역을 운영하도록 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경기도의 일부 역도를 개편했는데, 마산도(馬山道)를 청파도(靑坡道), 금곡도(金谷道)를 중림도(重林道), 풍해도칠참(豊海道七站)을 동선보산도(洞仙寶山道)로 개편하여 역승을 임명하고, 더불어 청교도(靑郊道)를 증설하였다. 또 1414년(태종 14)에는 평구도(平丘道)를 복치하고, 이듬해 4월에는 풍해도구참(豊海道九站)에 관승 1명을 더 두어 금교경천도관승(金郊敬天道館丞)이라 하였다. 그 뒤 1417년(태종 17) 10월에는 관승을 혁파하고 찰방 체제로 바꾸었다.

세종대에 들어와서는 태조 이후 동북 지방을 개척하면서 새로 설치한 역들을 관리하기 위해 평안도와 함길도의 역로 조직을 새롭게 편성하였다. 평안도의 경우 1429년 관로에는 관승 대신 찰방을 파견하고, 역도를 평안도 생양관로찰방(生陽館路察訪)과 평안도 신안관로찰방(新安館路察訪)으로 이원화하였다. 특히 압록강에서 두만강에 이르는 연변 지역에는 1423년(세종 5) 평안도감사의 요청에 따라 합배(合排)를 설치하고 역승을 임명하였다가, 1446년(세종 28) 의정부의 건의에 의해 역승 대신 찰방을 파견하였다.

함길도의 경우 1421년(세종 3) 6월에 함길도관찰사 신상(申商)의 요청에 따라, 기존의 고산도(高山道)와 시리도(施利道)를 고산도·시리도·주천도(酒泉道) 등 3개의 역도로 재편하였다. 1432년(세종 14)에는 함길도는 사신과 야인의 왕래가 빈번하므로 관품이 낮은 역승을 임명하는 것이 적당치 않다는 이조의 건의에 따라, 안변부 고산역에서 홍원현 평보역까지, 북청 거산역에서 용성역까지 찰방을 파견하도록 하였다. 그 후 6진 개척이 거의 마무리된 1440년(세종 22) 2월에는 의정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안변의 고산참에서 함흥의 덕산참까지를 고산도, 홍원의 신은참에서 길주의 고참까지를 거산도, 경성의 명원참에서 경원의 마유참까지를 수성도라 하여 역도 조직을 개편하고, 찰방의 주관 아래 운영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거산도·고산도·수성도의 3도 찰방 체제는 1445년(세종 27) 3월에 다시 고산도·화원도·거산도·명원도·연기도의 5도 역승 체제로 바뀌었다가, 이듬해 12월에 고산도·거산도·명원도·풍산도의 4도 역승 체제로 개편되었다.

그밖에 경상도 지역에는 1423년(세종 5) 7월에 황산도(黃山道)와 성현도(省峴道)를 설치하고 역승을 파견했으며, 경기도는 영서역에서 산예역까지를 경기우도 정역찰방(程驛察訪)으로, 양재역에서 무극역까지를 경기좌도충청도정역찰방으로 개편하였다.

세조대에는 1457년(세조 3) 9월에 도성 인근에 위치한 경기도의 여러 역과 강원도 및 충청도의 일부 역을 합속하여 경기좌도·경기우도·경기충청좌도·경기충청우도·경기충청도·경기강원도 등 6개 역도로 나누고, 역승을 폐지하고 각각 정역찰방을 설치하였다. 그 뒤 1464년(세조 10) 1월에는 각각의 찰방이 관할하는 역이 너무 많으므로 역승을 추가로 설치하자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그에 따라 그해 8월에 역로를 개편하면서, 충청도와 전라도에는 찰방과 역승을 각각 3명씩, 경상도에는 5명씩, 강원도에는 2명씩 두었고, 황해도에는 찰방 2명만을 두도록 하였다. 이 개편안은 이후 약간의 수정을 거쳐 『경국대전』에 수록됨으로써 역승 및 찰방의 정원에 관한 규정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하여 조선전기에는 다음의 <표1>과 같이 역승과 찰방이 병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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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후 중종대에 이르러 역승 혁파론이 본격적으로 대두되면서 역승과 찰방이 병존하던 상황은 변화를 맞게 되었다. 1506년(중종 1) 12월에 시강관 최숙생(崔淑生)이 역승의 작폐를 지적하면서 역승을 혁파하자고 주장한 데 이어, 1511년(중종 5)에는 유순(柳洵)의 건의에 따라 역로가 소복될 동안 임시로 역승을 혁파하고 그 대신 찰방을 임명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 조치는 서리의 거관 문제로 인해 다시 논란이 분분하였으나, 1535년(중종 30) 6월 좌의정 김안로(金安老)의 뜻에 따라 결국 서리의 거관 문제는 도승(渡丞)이나 내수사(內需司)별좌(別坐), 서제(書題)로의 서용만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마침내 역승을 혁파하고 찰방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조선시대 역의 관리 체계는 초기의 역승 중심에서 역승과 찰방의 병존을 거친 뒤 1535년에 이르러 찰방제로 확립되었다.

참고문헌

  •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 『경국대전(經國大典)』
  •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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