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루가치(達魯花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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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에 원(元)나라가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기 위해 서북면 등 주요 거점 지역에 설치한 외관직.

개설

몽골은 원래 유목민의 습속에 따라 점령지를 직접적으로 다스리지 않았다. 그러나 칭기즈 칸의 대원정 사업으로 영토가 크게 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복속된 땅을 통치하는 관원으로 다루가치[達魯花赤]를 파견하기 시작했다. 고려에는 1231년 제1차 침입 이후에 처음으로 배치되었다. 원나라와 고려의 전쟁이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고려 정부 등과 다루가치 간에 강력한 마찰이 있었다. 정식으로 원나라의 간섭을 받으면서 다루가치를 통한 내정 간섭이 본격화되었다. 원나라가 일본 정벌을 추진하면서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을 설치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다루가치의 내정 간섭은 약화되었다.

담당 직무

중국 원나라 성립 이전의 몽골에서는 유목민의 오랜 습속에 따라 점령 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를 실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13세기 초엽 칭기즈 칸의 대원정으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복속지를 관리하는 관원으로서 다루가치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몽골대칸[大汗]의 대리자 신분으로 피정복 지역 백성들을 다스리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어원을 살펴보면, 몽고어의 ‘진압하다’ 또는 ‘속박하다’라는 뜻을 지닌 ‘daru’에 명사 어미 ‘gha’와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chi’를 붙여 ‘진압에 종사하는 사람’, ‘속박하는 사람’에서 유래되었다. 총독·지사의 뜻으로 바뀌면서 원나라에 들어와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그런데 점령 지역이 확장되면서 그 지역의 환경과 전래되었던 통치 체제, 여기에 몽골식 질서가 결합되어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다루가치 제도는 복속 지역의 환경에 맞게 변용되었다. 특히 중원 왕조의 전통적인 중앙 집권적인 관료 제도와 결합하여 독특한 방식으로 운용되었다. 직능에 따라 군직(軍職), 민직(民職), 잡직(雜職)으로 분류되는데, 그중 민직은 대개 지방 군현에 설치되어 현지민을 직접 다스렸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처음 다루가치가 등장했던 것은 1231년(고려 고종 18)에 살리타[撒禮塔]가 1차로 고려에 침입하였던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 살리타가 철군하면서 서경 등지에 다루가치 72명을 배치하였다. 『고려사』에 따르면 1232년 5월 북계(北界)의 용강(龍岡)·선주(宣州: 현 평안북도 선천)에 몽골로부터 다루가치 4명이 왔던 것으로 되어있다. 당시 그들은 몽골군에게 함락당한 북계의 14개 성과 개경·서경 등지에 분산 배치되었을 것이다. 곧이어 북계의 나머지 요해처(要害處)들로 순차적으로 확대되어 총 72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다루가치는 먼저 몽골대칸의 요구 사항인 공물 상납 준비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를 검열하였다. 더불어 점령지를 대상으로 호구 조사를 실시해서 고려 군민(軍民)의 수효를 헤아려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아마도 최고의 책임자는 1232년 개경으로 파견된 거란인 출신의 도단(都旦)일 것으로 추정된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고려 정부와 백성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다. 어떤 곳에서는 고려 측에 의해 다루가치가 살해되었다. 한편 고려 정부의 밀명을 받고 북계로 파견되었던 내시(內侍)윤복창(尹復昌)이 선주에 이르러 다루가치에 의해 피살되었다. 결국 분쟁이 격화되면서 살리타가 다시 고려에 침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살리타가 처인성(處仁城: 현 경기도 용인)에서 전사하면서 몽골군은 후퇴했다. 이는 다루가치의 배치에도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변천

고려 정부는 1259년(고려 고종 46)에 이르러 몽골군에게 최종적으로 굴복하였다. 이를 계기로 고려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도 몽골군의 주둔을 기반으로 한 다루가치의 파견을 통해 내정 간섭이 본격화되었다. 1260년(고려 원종 1) 이후 1278년(고려 충렬왕 4)에 이르기까지 다루가치의 파견이 중단된 때도 있었으나 일반적으로는 다루가치가 계속 파견되었다. 원에서는 호·예·병·형·공부의 각급 속사에 정3~정8품의 다루가치와 정4품의 부다루가치[副達魯花赤], 외관인 안무사(安撫司)·초토사(招討司)·로(路)·부(府)·주(州)·현(縣)의 장관으로 정3품~종7품의 다루가치를 두어 중앙과 지방행정에 종사하게 했다. 이 중 고려에 파견된 다루가치·부다루가치는 외관인 경우이고, 그 관품은 개개 다루가치 파견지의 지역과 민호에 미루어 원의 주·현에 파견된 종4품관이나 종6품관과 연관된 것으로 추측된다. 다루가치의 임기는 3년이었고, 그 속관에는 경력(經歷) 등이 있었다.

그들의 임무는 먼저 고려의 정치 기구 명칭·관부 칭호·작호(爵號) 등을 제후국(諸侯國)의 수준에 맞춘다는 구실로 격하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려 사람들의 반몽골적 행위를 감시하고, 체포해 처벌하는 것이었다. 고려 측에서는 왕을 비롯하여 누구도 다루가치의 업무를 간섭할 수 없었으며 다루가치는 원나라 황제와 원나라 정부의 명령만을 따랐다. 이들은 고려 사람들이 무장하거나 무기를 소지하는 것도 철저하게 차단하고 금지하였다. 자연히 고려군에 대한 감시에도 철저했다.

다루가치는 민정(民政)에도 깊숙이 간여했다. 고려 관료들의 녹봉 지급이나 왕의 관료 인사권에도 개입하였다. 아울러 사회 풍속에 대한 교정에도 적극 나섰다. 그 과정에서 고려 측과 크게 충돌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노비 세습제를 다루가치가 혁파하려고 하면서 고려 측과 갈등이 생겼다. 그러나 옛 제도를 인정해주라고 했던 원 세조(世祖)의 지시를 내세우는 고려 측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하지만 그 나머지 것들은 대부분 고려 측에서 받아들였으며 이를 계기로 다루가치의 간섭이 한층 깊어졌다.

한편 1274년(고려 원종 15) 원나라는 제1차 일본 정벌(征伐)에 실패한 뒤 다시 원정을 준비하고자 정동행중서성을 고려에 설치했다. 이를 계기로 간섭의 체계가 달라졌다. 1281년(고려 충렬왕 7)에 단행된 제2차 일본 정벌도 실패했지만 정동행중서성은 그대로 남으면서 간섭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로 인해 다루가치는 그 역할이 약화되었으며 고려에 반원(反元) 정치가 시작되자 다루가치의 간섭이 사라졌다. 그러나 이후에도 여진족에 대한 간섭은 그대로 남아있었으며 원이 멸망하고 명 왕조가 세워진 때에도 다루가치는 일시적으로 존속했다(『세종실록』 24년 5월 9일).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장동익, 『고려 후기 외교사 연구』, 일조각, 1994.
  • 강문규, 『중국역대정제고』, 중화서국, 1987.
  • 강재광, 「몽고의 제1차 침공과 피함(被陷) 북계(北界) 14대성(大城)의 항전」, 『한국사연구』 146, 2009.
  • 조원, 「원(元) 전기(前期) 달로화적(達魯花赤)의 제도화와 그 위상의 변화」, 『동아시아 문화연구』 51, 2012.
  • 주채혁, 「고려내지의 다루가치(達魯花赤) 치폐에 관한 소고」, 『청대사림』 1, 197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