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徐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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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61(세조 7) = ?]. 조선 전기 세종(世宗)~세조(世祖) 때의 문신. 집현전(集賢殿)박사(博士), 사간원(司諫院)헌납(獻納),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 등을 지냈다. 자는 후산(后山)이며, 이명은 서강(徐崗)이다. 본관은 이천(利川)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고려 후기 우승지(右承旨)를 역임한 서혼(徐混)이며, 어머니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이조 참의(參議)김순생(金筍生)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사재감(司宰監)정(正)을 지낸 서진(徐晉)이고, 증조할아버지는 판사재사(判司宰事)를 지낸 서효손(徐孝孫)이다. 각종 조선왕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주로 간관(諫官)이나 경연관(經筵官)으로 활동하였다. 세조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하여 죽었다.

세종~세조 시대 활동

1442년(세종 24)에 성균관유학(幼學)으로 있었으며,(『세종실록』 24년 8월 12일) 1447년(세종 29) 식년시에 급제하고,[『방목(榜目)』] 이후 『세종실록(世宗實錄)』의 편수관으로 참여하였다.[『세종실록』 부록] 1450년(문종 즉위년)에 정자(正字)와, 집현전 박사, 좌정자(左正字) 등을 역임하였고,(『문종실록』 즉위년 7월 6일),(『문종실록』 즉위년 9월 7일),(『문종실록』 즉위년 9월 17일) 『문종실록』에도 편수관으로 참여하였다.[『문종실록』 부록]

이후 단종(端宗) 때에는 집현전 부수찬(副修撰)과 집현전 수찬(修撰), 사간원 우헌납(右獻納), 사간원 좌헌납(左獻納) 등을 역임하였다.(『단종실록』 즉위년 11월 5일),(『단종실록』 1년 4월 23일),(『단종실록』 1년 5월 4일),(『단종실록』 2년 8월 5일),(『단종실록』 2년 8월 26일),(『단종실록』 2년 10월 19일) 단종이 사냥을 나가는 것과 임금과 함께 나서는 환관에게 말을 내린 것에 대해 간언하기도 하였다.(『단종실록』 3년 2월 11일) 이후에도 그는 환관과 무인(武人)들이 사사로이 모이는 것을 비판하고 경계하였다.(『단종실록』 3년 3월 6일),(『단종실록』 3년 3월 22일)

세조 때에는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봉해졌다.(『세조실록』 1년 12월 27일) 시독관(侍讀官)시강관(侍講官)으로 경연에 참여하였고,(『세조실록』 1년 10월 29일),(『세조실록』 2년 2월 29일) 집현전 응교(應敎), 사간원(司諫院)지사(知事), 예문관(藝文館)직제학(直提學)을 역임했다.(『세조실록』 1년 11월 1일),(『세조실록』 3년 4월 28일),(『세조실록』 4년 윤2월 8일) 예문관 직제학으로 있을 때에 왕명을 받아 사헌부 감찰(監察)이근(李覲)과 함께 『잠서주해(蠶書註解)』를 편찬하였다.(『세조실록』 5년 1월 30일) 1460년(세조 6)에는 김구(金鉤)·최항(崔恒)·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손자주해(孫子註解)』를 교정하였으며, 다른 병서 또한 교정하였다.(『세조실록』 6년 3월 29일),(『세조실록』 6년 4월 26일)

이후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에 올랐으나,(『세조실록』 6년 6월 27일) 1461년(세조 7) 진강(進講)할 때에 불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억지로 꾸며 말하고 임금의 질문에 불손하게 대답했다 하여 장(丈) 30여 도(度)를 맞게 되었다. 불경한 태도를 보였던 이유를 묻자, 집에서도 항상 불경(佛經)을 읽는다는 대답을 하여 또 장 10여 도를 맞고 후원(後苑)에 묶였다.(『세조실록』 7년 1월 21일) 이때 그는 하위지(河緯地), 성삼문(成三問)과 비견될 정도로 세조의 분노를 샀다.(『세조실록』 7년 1월 22일) 이연손(李延孫)의 딸인 부인 경주 이씨(慶州李氏)가 남편이 독자라는 이유를 들어 죽음만은 면하게 해 달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결국 교형(絞刑)에 처해졌다.(『세조실록』 7년 1월 28일) 성종(成宗) 때에 장모이자 이연손(李延孫)의 아내인 윤씨(尹氏)의 청으로 직첩(職牒)을 돌려받았고,(『성종실록』 1년 5월 9일) 순종(純宗) 때에 유자광(柳子光) 등과 함께 죄명을 벗게 되었다.(『순종실록』 2년 7월 9일)

성품과 일화

1461년(세조 7)의 화를 당할 때, 『세조실록』에서는 서강의 성품을 두고 너그럽지 못하고 경박하며 시비(是非)의 변론을 좋아했다고 평하였다. 하지만 그가 화를 입게 된 구체적인 이유를 보면 “『노자(老子)』를 읽지도 않고 헐뜯고, 묻지도 않았는데 불교를 배척”했으며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비방”한 것이 꼽히는 것으로 보아, 불심(佛心)을 드러낸 세조에게 직언을 했다가 화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세조실록』 7년 1월 28일) 이후에 세조가 서강의 자손까지 죄를 미치게 하자는 청을 물리치고 이조에 명하여 서강의 후손을 서용(敍用)하도록 한 것을 보면, 세조가 즉흥적인 감정으로 서강을 처벌했고 이후에 그것을 간접적으로나마 후회했던 것으로 보인다.(『세조실록』 11년 11월 28일),(『세조실록』 13년 10월 13일)

후손

부인 경주 이씨는 이연손의 딸로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다. 1남 서산보(徐山甫)는 세조 때 서용되어 연산군(燕山君) 때 사헌부 장령(掌令)을 지냈다. 1녀는 참지(參知)조무영(趙茂英)의 아들 조기(趙紀)와 결혼했고, 2녀는 병사(兵使)를 지낸 심안인(沈安仁)의 아들 군수(郡守)심빈(沈濱)과 혼인하였다. 3녀는 사직(司直)을 지낸 강석경(康碩卿)과 혼인하였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순종실록(純宗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