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필부(朴弼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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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87년(숙종 13)~1752년(영조 28) = 66세]. 조선 중기부터 후기 때인 경종(景宗)~영조(英祖) 때의 문신.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와 병조 참지(參知) 등을 지냈다. 자는 경뢰(景賚)이고, 호는 성암(省菴)이다. 아버지는 수운판관(水運判官)박태흥(朴泰興)이며, 할아버지는 좌의정(左議政)박세채(朴世采)이고, 증조할아버지는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를 지낸 박의(朴猗)이다.

경종~영조 시대 활동

박필부(朴弼傅)는 9세부터 할머니의 가르침 밑에서 학문에 힘썼다. 1723년(경종 3)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었고, 1725년(영조 1) 생원(生員)이 되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영조 1년 2월 8일] 일찍이 학행으로 이름이 알려져 천거를 받아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마(洗馬)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자의(諮議)를 지냈다.[『영조실록(英祖實錄)』영조 4년 1월 5일] 그리고 외직으로 개령현감(開寧縣監)을 지내다가, 1730년(영조 6) 고향으로 돌아갔다. 1735년(영조 11) 12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에 발탁되어 경연관(經筵官)을 겸하였으며, 1737년(영조 13) 9월 다시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영조실록』영조 11년 12월 13일, 영조 13년 9월 11일] 그 뒤 다시 외직으로 나가 단양군수(丹陽郡守)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고, 1740년(영조 16) 12월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다.[『영조실록』영조 16년 12월 11일] 1742년(영조 18) 3월 세자시강원 진선(進善)이 되었으며, 그 해 7월 다시 사헌부 집의를 거쳐 얼마 후 세자시강원 진선에 임명되었다.[『영조실록』영조 18년 3월 18일, 영조 18년 7월 1일, 영조 18년 8월 5일] 1743년(영조 19) 2월 사헌부 집의를 거쳐, 5월 사복시(司僕寺)정(正)이 되었다.[『영조실록』영조 19년 2월 18일, 영조 19년 5월 17일]

1744년(영조 20) 4월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었으나 고향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사직하고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 해 6월 또 다시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영조실록』영조 20년 4월 11일, 영조 20년 6월 5일] 그는 학문과 덕행이 뛰어났으므로, 여러 번 관리에 선임되었으나 나오지 않다가, 1744년(영조 20) 12월 인천부사(仁川府使)에 제수되면서 비로소 관직에 나왔다.[『영조실록』영조 20년 12월 20일] 1748년(영조 24) 5월 다시 사헌부 집의가 되었고, 이듬해인 1749년(영조 25) 2월 세자(世子)가 국정을 대리하자 상소하여 치국(治國)의 도리로써 첫째 효도를 두터이 할 것, 둘째 큰 뜻[大志]을 분발할 것, 셋째 기강을 세울 것, 넷째 대의(大義)를 밝힐 것, 다섯째 어질고 사악함[賢邪]을 분별할 것 등의 5조목을 바쳤으므로 크게 칭송을 받았다.[『영조실록』영조 24년 5월 6일, 영조 25년 2월 22일] 1750년(영조 26) 병조 참지가 되었다가 그 뒤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가 되었다. 1752년(영조 28) 2월 장례원 판결사가 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다.[『영조실록』영조 28년 2월 13일]

특히 그는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여 예학(禮學)에 밝았던 당대의 대학자 윤증(尹拯)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1752년(영조 28)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66세였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명재유고(明齋遺稿)』
  • 『국조보감(國朝寶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