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응태(姜應台)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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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강응태 |
한글표제 | 강응태 |
한자표제 | 姜應台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중종~명종 |
집필자 | 이기순 |
자 | 대림(大臨) |
호 | 성재(誠齋)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95년(연산군1) |
사망 | 1552년(명종7) |
본관 | 진주(晉州) |
주거지 | 경상도 진주(晉州) |
묘소소재지 | 경상도 진주의 선영(先塋) |
증조부 | 강욱(姜勖) |
조부 | 강안중(姜安重) |
부 | 강관(姜琯) |
모_외조 | 곡부공씨(曲阜孔氏): 공계문(孔繼文)의 딸 |
처_장인 | 김씨(金氏): 김진필(金震弼)의 딸→(자녀)3남 5녀 |
자녀 | (1자)강치(姜治) (2자)강열(姜洌) (3자)강만성(姜晩成) (1녀)정희증(鄭希曾)의 처 (2녀)성연(成演)의 처 (3녀)정순평(鄭順平)의 처 (4녀)이경춘(李慶春)의 처 |
유명자손 | 강천계(姜天啓), 강경윤(姜慶胤)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강응태(姜應台) |
총론
[1495(연산군1)~1552년(명종7) = 58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명종(明宗) 때 활동한 문신. 자는 대림(大臨), 호는 성재(誠齋)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인데, 시조는 강민첨(姜民瞻)이고, 현감(縣監)강관(姜琯)의 아들이다.
중종~인종 시대의 활동
1532년(중종27) 38세에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갔다가, 1541년(중종36)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이 되었고, 공조좌랑으로 옮겼다가 함경도병마평사(咸鏡道兵馬評事)로 나갔다. 1544년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다가, 예조정랑을 거쳐, 시강원(侍講院) 우문학(右文學)으로 옮겼다. 1545년(인조1)에 호조(戶曹)낭관(郎官)으로 전임되었다.
명종 시대 활동
1546년(명종1) 승문원(承文院)교리(校理)와 사섬시(司贍寺)첨정(僉正)을 거쳐서,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으로 옮겼다가 봉상시(奉常寺)첨정에 전임되었다. 1547년 사간원(司諫院)헌납(獻納)에 특별히 임명되었고, 소격서(昭格署)영(令)과 예빈시(禮賓寺)첨정으로 옮겼으며, 이어서 군기시(軍器寺)부정(副正)으로 되었다가, 순천도호부사(順天都護府使)로 나갔다.
1549년(명종4) 홍문관(弘文館)에 천거되었고, 또 성균관에 들어가서 사예(司藝)를 거쳐 사성(司成)으로 승진하였으나, 병이 들어 사임하고 고향 진주로 돌아갔다. 또 홍문관부수찬(副修撰)에 특별히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인하여 부임하지 못하였다. 1551년(명종6) 밀양도호부사(密陽都護府使)로서 대구진병마첨절제사(大丘鎭兵馬僉節制使)를 겸임하였는데, 1552년(명종7) 재임 중에 관아에서 죽으니, 나이가 58세였다.
묘소와 제향
묘소는 경상도 진주의 선영에 있으며, 정황(丁熿)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여러 대에 걸쳐 충효(忠孝)로 이름이 났는데, 효행으로 1516년(중종11) 집안이 정려(旌閭)되었고, 그가 사는 마을을 세효리(世孝里)라고 하였다. 그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순후한 장자[醇厚長者]’라고 칭송을 받았고, 진주임천서원(臨川書院)에 제향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소재집(蘇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