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朋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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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이 추구하는 성리학적 이상 정치를 현실에 적용하기 위한 이념을 가진 정파.

개설

조선시대 붕당은 선조대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정파(政派)로, 사림이 성리학적 이념을 현실 정치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이는 세습성과 함께 학연과 지연을 중요한 특징으로 한다. 18세기 탕평이 대두하고, 노론 주도하의 정국이 진행되면서 점차 붕당이 퇴조하여 19세기 전반 무렵에는 붕당 간의 대립이 거의 없었다.

내용 및 특징

붕당은 역사상 중국의 한나라·당나라 이후 등장하였다. 당시 붕당은 금기의 대상으로, 신하들의 정치 결사체인 붕당의 결성은 죄악시되었다. 이후 중국 송나라 때에 들어서서 이러한 붕당관이 변하였다. 구양수는 「붕당론(朋黨論)」에서, 붕당을 공도(公道)의 실현을 추구하는 자들의 모임인 ‘군자의 당’과 사리사욕을 도모하는 ‘소인의 당’으로 나누었다. 전자를 진붕(眞朋), 후자를 위붕(僞朋)으로 규정하고, 군주가 진붕의 승세(勝勢)를 유지시킨다면 정치는 저절로 바르게 이끌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주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붕당이 군자의 당이라면 승상을 비롯해 심지어 군주도 그 당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

조선에서는 16세기 이전까지 붕당이 금기시되었다. 조선에서 참고한 『대명률』에서는 "조정의 관원으로서 붕당을 교결(交結)하여 조정의 정치를 어지럽히는 자는 모두 참(斬)하며 그 처자는 종으로 삼고, 재산은 관에 몰수한다."고 하여 붕당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16세기 사림 세력이 부상하면서 서서히 붕당에 대한 인식이 변하였다. 당시 훈구 세력은 이전과 같은 부정적 붕당관에 입각하여 붕당을 사화(士禍)의 구실로 삼았다(『중종실록』 14년 11월 15일).

이에 비해 사림 세력은 구양수의 붕당론에 근거하여 권세를 이용해 비리를 자행하는 훈척계를 소인의 당이라고 규탄하였다. 동시에 사림은 도학을 신봉하고 실천하는 존재로서 군자 집단의 형성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주장하거나(『중종실록』13년 1월 16일), ‘붕(朋)’을 군자의 결합으로, ‘당(黨)’을 소인이 서로 모인 것이라고 하여 군자유붕론(君子有朋論)의 논리를 제시하였다(" title="석강에서 사습을 바로잡을 것을 아뢰다 『중종실록』13년 4월 28일). 이러한 엇갈림은 사화를 이용한 거듭된 탄압에도 불구하고 사림 세력이 궁극적으로 정치적 우세를 획득함에 따라 저절로 해소되었다. 그 결과 선조 즉위 무렵부터는 붕당의 활동에 대한 정당성이 확보되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사림의 성리학적 이상 정치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이념을 가진 정파로써의 붕당이 형성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조선의 붕당은 시간적으로 다소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몇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는 학연(學緣)이 강하다는 점이다. 동인에 이황과 조식, 그리고 서경덕 문인들이 다수 포함되었고, 서인에 이이와 성혼의 문인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뉠 때는 남인은 이황의 문인이, 북인은 조식과 서경덕 문인이 다수 포함되었다. 또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면서는 노론에 송시열의 문인이, 소론에 윤증과 박세채 문인이 다수 포진한 점 등이 이를 말해 준다.

둘째는 지연(地緣)과 관련된다는 점이다. 동인의 주축은 경상도와 전라도 등 지방 출신자이거나 그 곳과 연고가 있는 인물로 되어 있으며, 서인은 특히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 기반을 두고 대대로 벼슬하여 온 세족 집안 출신들이 많았다.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면서 남인은 주로 경상좌도 일대의 인물이, 북인은 경상우도의 인물들이 다수 포진하였다. 서인의 경우도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면서 노론은 주로 충청도와 서울 지역 인사들이, 소론은 주로 서울 지역 인사들이 포진한 점 등이 이를 대변한다. 물론 이런 지연은 시간이 지나면서 경상도 지역에서 노론 계열의 인사가 나오는 등 변하기도 하였다.

셋째는 ‘세전(世傳)’ 혹은 ‘세수(世守)’ 등으로 표현되는 세습성이다. 예를 들어 1650년(효종 1) 왕이 신료들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왕은 붕당의 해독(害毒)에 대해서 말하였다. 그러자 이경여(李敬輿)가 조선의 붕당은 군자와 소인의 분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세수지업(世守之業)’이라고 하였다[『효종실록』 1년 4월 3일]. 또한 영조 연간 탕평을 주도했던 조현명(趙顯命)은, 당파가 나뉜 지 이미 5~6대에 이르렀으니 군자의 자손에 소인이 없겠으며, 소인의 자손에 군자가 없겠는가 라고 하였다[『영조실록』 4년 2월 19일]. 이러한 발언들은 붕당의 세습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

변천

15세기 후반 이후 중앙에 진출한 사림 세력은 선조 즉위 이후 훈척 세력의 독주를 비판하면서 척신을 축출하는 한편, 을사사화 때 화를 입은 인물의 신원을 요구하였다. 이러는 사이에 사림 세력 내부에서는 신·구 사림 사이에 척신 체제의 청산을 둘러싸고 갈등과 대립이 표면화 되었다. 예를 들어 대신의 청탁을 막고 이조 전랑의 통청권(通淸權) 장악을 꾀하는 낭천제(郎薦制) 논의에서 의견을 달리했다. 또한 명종 초반 훈척 세력에 의해 정통 계승자로 인정받지 못한 인종(仁宗)의 신주를 문소전(文昭殿)에 안치하면서, 부족한 공간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선조수정실록』 2년 1월 1일]. 이런 논란은 결국 구체제의 청산과 새로운 정국 운영 방식에 대한 갈등이며, 이것이 결국 1575년(선조 8) 동인과 서인의 붕당 형성으로 이어졌다.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진 정국에서 당파와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한다는 사림의 조제보합(調劑保合)을 꾀하던 이이(李珥)가 서인으로 자정(自定)하는 것을 계기로 붕당은 학연성을 띠게 되었다. 초기에는 동인이 우세를 보였으나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옥사 등으로 동인은 수세에 몰렸다. 급기야 서인 정철(鄭澈)의 건저의(建儲議) 문제에 대한 처벌을 둘러싸고 동인 내 세력 간 갈등이 표면화되어 남인과 북인으로 나누어졌다.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未曾有)의 전란을 거치는 와중에서는 서인과 남인의 연립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에는 의병 활동 등으로 정치 명분상 우위를 차지한 북인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북인 주도의 정국에서 북인은 그 내부에서 다시 여러 갈래의 분열이 일어나며 대립하였다. 선조 말년에는 왕실과의 혼인 관계로 선조의 신임을 얻은 유영경 일파의 소북(小北)에게로 정국 주도권이 넘어갔다.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대북(大北) 중심의 정국으로 다시 넘어갔으나, 초기에는 왕권의 안정을 추진한 광해군의 의도 때문에 대북과 서인, 남인 사이의 연립 체제가 갖추어졌다. 이런 와중에 대북 측에서 자신들의 학문적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조식을 높이고 이언적과 이황을 폄하한 소위 ‘회퇴변척(晦退辨斥)’을 제기하였다[『광해군일기』 3년 3월 26일]. 광해군은 왕위의 안정을 위해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는 등 이른바 ‘폐모살제(廢母殺弟)’를 단행하였다.

이것은 결국 사림 정치의 명분에 위배되어 결과적으로 인조반정에 명분을 제공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성공한 이후의 정국은 반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서인이 절대적 우세를 차지하였다. 반정 세력은 사림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소북과 남인들 일부를 중용하였지만,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소북과 남인의 진출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정국의 운영 방안을 둘러싸고 서인은 공서(功西)·청서(淸西), 노서(老西)·소서(少西), 낙당(洛黨)·원당(原黨)·한당(漢黨)·산당(山黨) 등으로 분화되기도 하였지만 서인 주도 정국은 계속되었다[『인조실록』 7년 10월 16일] [『효종실록』 즉위년 6월 24일].

현종대에는 서인 우위의 정국에서 꾸준히 성장한 남인과 1659년(현종 즉위)과 1674년 두 차례의 예송(禮訟)이 벌어졌다. 예송은 사림의 이상인 도학(道學)의 현실적 구현 방식인 예법의 적용을 둘러싼 논쟁으로, 각각의 붕당은 자신들의 학문에 바탕을 둔 입장을 피력하였다. 2차 예송의 결과 숙종 초반에 집권한 남인은 상대당인 서인에 대한 처벌을 둘러싸고 강온의 대립이 있어 청남(淸南)·탁남(濁南)으로 분열하였다. 그러나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을 계기로 남인에서 서인으로 집권 세력이 교체되었는데, 이후 환국 과정과 남인의 축출 과정을 둘러싸고 서인 내부에서 탈법 행위를 둘러싼 책임자 처벌 문제를 놓고 논란이 일어 결국 송시열 등이 중심이 된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되었다(『숙종실록』 9년 1월 19일) [『숙종실록보궐정오』 9년 2월 2일].

이후 기사환국과 갑술환국이 진행되고 숙종 말년에 이르면 소론과 노론의 대립이 격심해졌다. 회니시비와 같이 종전에는 주로 학문적 시비 논쟁에 그쳤던 것이 왕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충역 논쟁으로 변질되면서 살육이 자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붕당 혁파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고, 그 대안으로 탕평(蕩平)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영조 연간에 왕의 주도로 탕평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노론과 소론·남인 내부에서 이에 동조하는 탕평파(蕩平派)가 규합되었다. 더하여 붕당의 존재에 대한 견제가 추진되었고, 심지어는 동일 붕당 내의 혼인이 금지되기도 하였다[『영조실록』 48년 8월 20일].

그러면서 정국은 노론 주도로 전환되었다. 다만 이런 와중에서 종래 남인이 중심이던 경상도 지역에서 노론 계통의 세력이 등장하거나, 소론 당색을 띠면서도 노론 계열과 관련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였다. 정조 연간에 시파(時派)와 벽파(辟派)가 분열된 양상 속에서 노론과 소론, 혹은 남인들까지 붕당의 이해보다는 시·벽의 논리에 따라 행동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19세기 전반 세도정치기에 들어서면 붕당은 거의 퇴조하면서 붕당 간의 대립은 거의 무너졌고 붕당에 기반을 둔 정치적 대립이 해소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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