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남(淸南)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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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청남 |
한글표제 | 청남 |
한자표제 | 淸南 |
상위어 | 남인(南人) |
관련어 | 문외파(門外派), 탁남(濁南) |
분야 | 정치/정치운영/정쟁·정론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이근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청남(淸南)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숙종실록』 1년 6월 4일 |
조선후기 숙종 연간에 남인 계열에서 분화된 당파.
개설
청남은 탁남(濁南)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조선후기 숙종 초 남인(南人) 내에서 분파된 세력의 하나이다. 숙종 초에 진출한 허목(許穆)과 윤휴(尹鑴)를 영수로 하는 계열로, 서인 세력의 처벌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아울러 군사권 장악을 시도하는 탁남 계열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18세기 초 남인이 다시 문내파(門內派)·문외파(門外派)·과성파(跨城派) 등으로 나뉘었는데, 문외파가 청남을 계승한 세력이었다. 이들은 영조대 이후 정치에 참여하면서 남인의 정치적 입장을 고수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현종 말 갑인예송(甲寅禮訟)은 서인 한당계와 연결된 남인의 승리로 귀결되었으며, 이어 숙종이 즉위하면서 남인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소수 세력으로 정권에 참여하였던 남인 세력이 처음으로 정권을 장악한 것이었다. 정권을 잡게 된 남인은 서인 세력의 축출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현종 초 기해예송(己亥禮訟)의 책임을 물어 송시열(宋時烈)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였다. 아울러 그동안 정치 참여에 제한적이었던 남인 계열 인사들의 진출을 시도하여, 허목(許穆)이 대사헌에, 윤휴(尹鑴)가 장령에 제수되었으며, 그동안 폐고(廢固)되었던 홍여하(洪汝河)·이무(李袤)·오정창(吳挺昌) 등도 서용되었다.
본격적인 남인 주도의 정국이 조성되어 가면서 남인 내부에서 분열 양상이 나타났다. 청남과 탁남으로의 분열로, 서인의 처벌 문제에서 청남은 강경한 입장을 보였고 탁남은 온건한 입장이었다. 이 밖에도 당시 군사 정책 등에 대한 입장 차이가 남인 내부의 분화를 가져왔다.
조직 및 역할
청남이란 허목과 윤휴를 영수로 한 세력으로, 오정창·오정위(吳挺緯)·오시수(吳始壽) 등의 동복오씨와 이무·조사기(趙嗣基)·이수경(李壽慶)·장응일(張應一)·정지호(鄭之虎)·남천한(南天漢)·이서우(李瑞雨)·이태서(李台瑞)·남천택(南天澤)·이동규(李同揆) 등이 해당되었다. 이에 비해 탁남계는 허적(許積)과 권대운(權大運)을 영수로 한 세력으로, 민희(閔熙)·김휘(金徽)·민점(閔點)·목내선(睦來善)·심재(沈梓)·권대재(權大載)·이관징(李觀徵)·민종조(閔宗道)·이당규(李堂揆)·이우정(李宇鼎)·최문식(崔文湜) 등을 비롯해 유명천(柳命天)·유명현(柳命賢)·권유(權愈)·목창명(睦昌明)·민암(閔黯) 등이 속하였다. 이 같은 남인 내 분화 과정에서 몇몇 인물들은 양측과 모두 교감하였는데 이하진(李夏鎭)을 비롯해 이담명(李聃命)·이옥(李沃)·조위명(趙威明) 등이 그러하였다. 당시 『조선왕조실록』 기사에서는 이들에 대해 "두 쪽 사이에 양다리를 걸쳤다."고 기록하였다(『숙종실록』 1년 6월 4일).
변천
남인 내 청남과 탁남의 갈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져 당시 남인 내에서도 청남과 탁남 간 당쟁의 심각성을 경계하는 논의가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숙종실록』 5년 6월 13일]. 이런 과정에서 청남은 탁남 계열의 군사적 장악 움직임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숙종 초 정권을 잡은 남인들은 종래의 훈련도감이나 어영청 등의 군영을 김석주(金錫冑) 등 척신들이 장악하자, 이에 대신하여 정권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군사력 장악을 목표로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를 다시 설치하였는데 탁남의 허적이 체찰사가 되었다. 청남은 이런 탁남의 군사력 장악 시도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결국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남인 계열 전체가 상당한 인적 손실을 경험하였다.
이후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한때 남인들이 정권을 다시 장악하자 청남 계열 일부가 진출하였으나 정치의 주도권은 탁남 계열이 장악한 상태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에서 다시 서인으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남인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특히 앞 시기 정국을 주도한 탁남 계열의 희생이 상당히 심했다. 이에 비해 청남 계열은 이후에도 몇몇 인물이 정치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8세기 초 남인이 다시 문내파·문외파·과성파 등으로 나누어졌다. 이때 청남은 주로 문외파로 결집하였으며, 이후 청남을 계승한 문외파 인물들이 탕평책이 추진되던 영·정조대 정치에 참여하며 남인으로서 붕당을 유지하였다.
참고문헌
- 『동소만록(桐巢漫錄)』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30):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국사편찬위원회, 1998.
- 권오영 외, 『(조선 후기)당쟁과 광주이씨』, 지식산업사, 2011.
- 유봉학, 「18세기 남인 분열과 기호남인의 학통 성립: 동소만록을 중심으로」, 『(한신대학교)논문집』1,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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