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서(功西)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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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공서 |
한글표제 | 공서 |
한자표제 | 功西 |
상위어 | 서인(西人) |
동의어 | 훈서(勳西), 의서(義西) |
관련어 | 인조반정(仁祖反正) |
분야 | 정치/정치운영/정쟁·정론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기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공서(功西)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인조실록』 3년 2월 4일, 『인조실록』 7년 7월 23일, 『인조실록』 7년 7월 16일 |
1623년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 공신 세력 중심의 당파.
개설
인조반정에 적극 가담한 김류(金瑬), 이귀(李貴), 신경진(申景禛) 등은 공신 지위를 발판으로 정국을 주도했다. 그들은 남인과 소론이 정국 운영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할지 여부, 후금에 대한 현실적 외교 정책으로의 전환, 광해군과 인조의 숙부인 인성군(仁城君)에 대한 처벌 강행을 둘러싸고 비공신인 서인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공서파(功西派)로 지목 받았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인조반정 직후에 반정 참여자에 대한 포상을 둘러싸고 공신과 비공신은 견해차를 드러냈다. 우선 서인은 공신에게 반정에서의 공훈에 대한 포상은 줄 수 있지만 관작을 주는 것은 부당하다며 반대하였다. 또한 반정 참여자를 위한 특별 과거를 시행하는 계획에도 반대했다. 공신의 특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공서파와 반정의 명분을 지켜야 한다는 청서파(淸西派)로 나뉘어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갈등 양상이 표출되었다.
인조 집권 초기에 정국의 안정을 위해서 광해군과 인성군 등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둘러싼 대립도 심했다. 특히 역모 사건에 수시로 이름이 거론되는 인성군 처벌 여부는 난제 중의 하나였다. 공신 세력은 왕권 안정을 위해서 처벌해야 한다는 토역설(討逆說)을 주장했고, 비공신 세력은 왕족을 보호해야 한다는 전은설(全恩說)로 맞섰다. 또 인목대비 폐비 논의 참여자에 대한 포용책은 정변의 명분 중 하나인 폐모론(廢母論)의 반윤리성을 스스로 훼손하는 중대한 문제라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변천
인조와 김류의 포용책에 대한 반발은 서인 공신 내부의 균열로 비화했다. 반정 이전부터 학맥과 정치 노선에서 차이를 보였던 이귀(李貴)는 포용적 인사 정책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귀는 1625년(인조 3) 소북(小北)을 대표하는 김신국(金藎國)·남이공(南以恭)을 기용하려는 김류의 인사 정책에 정면으로 반발했다(『인조실록』 3년 2월 4일). 이어서 1629년에는 광해군 정권의 유력 인사였던 유희분의 조카사위인 김세렴(金世濂)과 이경직(李景稷)·남이공의 등용 문제를 둘러싸고 큰 논란이 빚어졌다(『인조실록』 7년 7월 23일). 이귀·김상헌은 물론 박정(朴炡)·유백증(兪伯曾)·나만갑(羅萬甲)·김육(金堉) 등이 인조와 김류의 인사 정책에 반발했다. 이를 계기로 공서파는 김류를 지지하는 노서(老西)와 소서(少西)로 분열했다(『인조실록』 7년 7월 16일).
집권 세력 내부의 분열은 집권 체제의 불안정성을 불러온다. 인조 집권 전반기에 서인의 반정 공신 세력은 공서와 청서로 분열되었고 공서는 다시 노서와 소서로 분열을 거듭했다. 이러한 집권 세력 간의 갈등으로 인조 집권 전반기인 1623년부터 1629년까지 10회의 역모 사건이 일어날 정도로 정국이 불안정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30: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국사편찬위원회, 1998.
- 김용흠, 「인조반정의 명분과 정권의 정통성 논쟁: 인성군 이공 처벌 논의를 중심으로」, 『역사학연구』27, 2006.
- 신병주, 「1623년 인조반정의 경과와 그 현재적 의미」, 『통일인문학논총』46, 2008.
- 오수창, 「인조대 정치 세력의 동향」, 『한국사론』13, 1985.
- 이기순, 「정온에 대한 추숭과 평가」, 『남명학』16, 201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