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인반차도(發引班次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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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 시 혼백과 재궁을 산릉으로 배진(倍進)해 가는 발인 행렬을 순서대로 나열한 그림.

개설

발인반차도(發引班次圖)는 빈전에 모셔져 있던 혼백과 재궁, 책보류, 함께 묻을 부장품 등을 가마에 봉안하여 산릉으로 배진해 가는 발인 행렬의 반차를 그린 것이다. 발인 행렬에 위의를 표하기 위해 미리 제작하여 예행연습[習儀]과 발인 당일 반차를 정돈하는 지침으로 활용하고 후대의 참고 및 보존을 위해 의궤에 수록하였다. 발인반차도는 『세종실록』「오례」나 『국조오례의』에 규정된 왕과 왕비의 ‘발인 행렬의 반차[發引班次]’ 의주를 토대로 제작되었다. 조선전기에는 예종의 발인이 있기 전에 발인반차도가 제작되었으나(『성종실록』 1년 1월 22일), 전하는 유물은 없다. 임진왜란 이후의 국장 및 예장 관련 의궤 35종에 왕과 왕비, 왕세자 등 왕실 성원의 회화식 발인반차도가 수록되어 있고, 일제강점기의 의궤 3종에 대한제국 황실 성원의 발인반차도가 문반차도(文班次圖) 형식으로 전한다. 그 외에 의식 전에 제작된 발인반차도와 관련 있는 유물 8건 정도가 확인된다.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발인반차는 예전(禮典)에 명문화되지 않았지만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懿敬世子)의 예장 시에 마련된 ‘발인반차의(發引班次儀)’나(『세조실록』 3년 11월 18일) 전대의 예를 참고하여 제작되었다.

내용 및 특징

현전하는 발인반차도는 도가 대열, 선상(先廂) 시위군, 길의장(吉儀仗)을 앞세운 혼백거(魂帛車) 행렬, 흉의장(凶儀仗)을 앞세운 대여 행렬, 후상(後廂) 시위군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임시 신주를 모신 혼백거는 사자가 평상시에 쓰던 최고 등급의 의장을 진열한 가운데 지위를 상징하는 책보를 앞세우고 나아갔고,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을 모신 대여는 방상씨거(方相氏車)·죽산마(竹散馬)·죽안마(竹鞍馬)·우보(羽葆)·만장(挽章)·삽(翣) 등 흉의장을 진열한 가운데, 부장할 명기(明器)·애책(哀冊)·복완(服玩)을 안치한 채여·요여, 견여(肩轝), 붉은 비단에 사자의 이름을 쓴 명정(銘旌)을 앞세우고 나아갔다. 대여 뒤에는 궁인(宮人)이 곡을 하며 따랐고 관원들이 호종하였다. 도가 및 시위군을 비롯한 각 대열은 사자의 지위에 따라 규모 및 배진 관원이 달리 편성되었다.

발인반차도는 다른 의례의 반차도와 마찬가지로 중앙 열에 행렬 주인공의 가마류가 배치되고 상하 열에 시위 및 의장 관련 기물을 배치하는 삼단 구성으로 묘사되었다. 17세기 후반부터 주로 사용한 인각채색법은 인물이나 말 등을 도장처럼 새겨 찍고 모자와 의장기 같은 지물(持物)을 추가로 그려 넣은 뒤 채색하여 완성하는 기법이다. 이 기법은 반차도의 수준과 제작 능력 향상 및 정연한 행렬 구성을 가능케 한 반차도 특유의 제작법이다.

변천

(1) 조선전기

조선시대 왕의 국상 의식 절차는 1422년 태종의 국상 시에 전반적으로 정비되었고 발인반차도 이때 정리되었다(『세종실록』 4년 8월 22일). 태종의 발인반차 의주는 대가 의장을 진열하여 군왕의 국장에 최고 등급의 위의를 표하고(『세종실록』 4년 6월 16일), 혼백과 재궁을 혼백거와 유거(柳車)에 각각 모셔서 왕과 왕세자가 따르는 행렬로 구성되었다. 이후 수레인 유거가 조선의 좁은 도로 현실에 맞지 않아 여사군(轝士軍)이 어깨에 메는 대여로 바뀌었고(『세종실록』 28년 4월 3일), 관원들의 도가 대열이 추가되어 『국조오례의』에 명문화됨으로써 왕의 발인반차 의주가 완비되었다. 조선전기에는 예종의 발인반차도 제작 사실만 확인된다.

(2) 17·18세기 선조~경종대

이 시기 왕의 발인반차도에는 『국조오례의』의 규정과는 달리 청으로부터 받은 고명(誥命)과 국왕의 호종 행렬이 등장하지 않는다. 왕비의 발인반차도에서는 도가 대열을 내상(內喪)에 맞게 정비하고 망초[望燭]나 흉의장의 숫자도 왕과 차등을 두는 방향으로 틀이 잡혔다. 또한 전체 행렬을 앞뒤에서 시위하던 선·후상 시위군은 한 줄로 간단하게 묘사되었다. 이 시기 발인반차도는 17세기 중엽까지는 간략한 필치로 자유롭게 묘사되다가 1659년의 효종 발인 때부터 상(像)을 유형화하였으며 1674년의 인선왕후 발인반차도에서부터 인각채색법을 써서 제작하였다. 그와 동시에 중앙 열의 가마가 직사각형의 단면으로 묘사되고 정자형으로 배치한 가마채에 여사군을 상하로 층층이 포개어 올림으로써 이차원적 평면도와 같은 특징을 보인다.

(3) 18세기 영조~정조대

영조대에 국상 의례를 정비하여 1758년에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이 편찬됨에 따라 18세기 중엽 이후의 발인반차도에서는 망초와 횃불[捧炬]이 사라졌고 목노비와 목악공(木樂工) 같은 순장의 잔재가 명기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가마마다 배진하는 차비관이 등장하고 반차를 분명히 하는 방향으로 행렬을 묘사함에 따라 전대에 비해 자연스럽게 길이가 늘어났다. 발인반차도는 다시점(多視點)으로 행렬을 부감해내는 삼단 구성과 인각채색법을 유지하면서 중앙 열의 가마가 입체형으로 묘사되었다. 가마의 입체형 묘사와 함께 가마채를 평행 사선 구도로 배치하고 여사군을 사선으로 포치함에 따라 중앙 열 가마 행렬을 중심으로 사실적인 공간감이 표현되었다.

(4) 19세기 순조~고종대

이 시기에는 순조대의 몇몇 흉례에서 의식 전에 관원용 분아(分兒) 반차도가 추가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또한 정조대의 군대 묘사 방식에 따라 선·후상 시위군이 구체적으로 묘사되면서 발인반차도의 길이도 늘어났다. 그에 따라 훈련도감의 3대(隊) 편제와 초관(哨官), 천총(千摠), 파총(把摠)으로 이루어진 지휘 체계가 발인반차도에 표현되기도 하였다. 인각채색법에서는 순조 국장부터 각종 깃발과 의장물 인각, 만장과 만장군의 일체형 인각 등이 제작되어 기법상의 진전도 이루어졌다.

(5) 대한제국기~일제강점기

대한제국기 발인반차도에는 황제국 국격에 맞춰 개편된 의장·군제·관제가 반영되었다. 그중 황제국 의장은 명성황후와 순명비의 발인반차도에서 황후와 왕후의 의장이 확인되나 명헌태후의 경우 기존 왕비 의장이 진열되어 태후의 의장이 따로 마련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 외 인물이나 말의 조형, 가마의 형태와 행렬 구성 등은 거의 전대의 제작 경향을 따르고 있다. 이 시기에는 의식 전에 제작된 발인반차도들이 두루마리 형태로 제작되어 전해진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거행된 순헌귀비엄씨 예장과 고종, 순종의 어장(御葬)에서는 자도(字圖)식인 문반차도 형식의 발인반차도가 제작되었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
  •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 제송희, 「18세기 행렬반차도 연구」, 『미술사학 연구』 273, 한국미술사학회, 2012.
  • 제송희, 「조선시대 의례 반차도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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