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文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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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제향과 회례연에서 문덕(文德)을 기리기 위해 추는 춤의 일종.

개설

문무(文舞)는 성인의 덕치(德治)를 찬송하는 내용의 춤이다. 성인의 무공(武功)을 찬양하는 무무(武舞)의 짝이 된다. 줄을 이루는 일무(佾舞) 형태로 춤춘다. 조선시대에는 사직(社稷)·풍운뇌우(風雲雷雨)·선농(先農)·선잠(先蠶)·우사(雩祀)·석전(釋奠) 등의 제사 때 추는 문무를 ‘열문지무(烈文之舞)’라고 이름하였다. 종묘 제례의 문무 역시 1463년(세조 9)까지는 열문지무를 공연하였으나, 이듬해 음력 1월부터 ‘보태평지무(保太平之舞)’로 바꾸어(『세조실록』 10년 1월 14일) 조선말까지 사용하였다. 회례연(會禮宴)의 경우 세종 때 처음 문명지곡(文明之曲)에 문무를 추도록 하였으나(『세종실록』 14년 9월 19일), 나중에는 보태평지악(保太平之樂)에 보태평지무를 공연하도록 고쳤다(『세종실록』 29년 6월 4일).

내용 및 특징

문무는 각종 제사와 회례연 등에서 예식의 일환으로 추는 춤의 한 종류이다. 문무와 무무는 음양 관계에 놓인 짝이다. 문무는 왕조 및 각종 신주(神主)의 문덕을 노랫말로써 표현하며, 약(籥)과 적(翟)이라는 양의(陽儀)의 도구를 손에 잡고 추는 예식의 춤이다. 1432년(세종 14)에 회례아악(會禮雅樂)을 정비할 때, 처음 문무는 태종을 위한 악곡으로, 무무는 태조를 위한 악곡으로 제작하도록 했다(『세종실록』 14년 6월 14일). 문무는 고대로부터 읍양(揖讓)으로 왕이 된 자의 덕을 기리는 것이므로 태종에게 그 덕이 있음을 노래와 춤으로 드러내려 한 것이다. 그러나 황희(黃喜)·맹사성(孟思誠)·권진(權軫) 등은 그해 9월에 태조와 태종 부자간의 위계로 볼 때 태조의 악장이 먼저 연주되어야 하는데, 문무에 앞서 무공을 표현하는 무무를 먼저 행할 수 없음을 논의했다. 또 당나라와 송나라 제도를 예로 들어 문무가 무무보다 먼저 실시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결국 회례악으로 사용되는 문무의 가사는 태조와 태종의 문덕에 대해 차례대로 노래하게 하여 문명지곡을 만들었고(『세종실록』 14년 9월 1일), (『세종실록』 14년 9월 7일), 문무를 무무보다 먼저 공연하도록 했다. 이후 종묘와 영녕전 제사에서는 보태평이라는 새로운 11곡의 악장과 춤을 제작해 사용했다. 조선 건국의 바탕에 육룡(六龍)인 목조·익조·도조·환조·태조·태종의 덕치가 있었음을 묘사하였다(『세종실록』 29년 6월 4일), (『세조실록』 9년 12월 11일). 향·당악기와 종경과 같은 아악기를 함께 연주하는데, 이런 음악을 속악(俗樂)이라고 구분했다. 한편, 사직·산천성황을 붙인 풍운뇌우·선농·선잠·우사·석전제에서도 문무가 예식의 춤으로 추어졌다. 이때의 반주는 주로 아악기로 구성된 아악(雅樂)을 사용했다. 아악에 연행하는 문무는 열문지무라는 단 하나의 이름을 사용했다.

여러 제사에서 문무는 신을 맞이하는 영신(迎神) 의식과 폐백을 올리는 전폐(奠幣) 의식, 첫 술잔을 올리는 초헌(初獻) 의식 때에 연행한다. 보통 아악 영신의 문무에는 가사가 없다. 그래서 가사의 의미를 따르지 않고, 오직 음악 반주에 맞추어서 문무의 도구인 약과 적을 사용하는 동작을 행할 뿐이다. 이것이 도구로써 문무의 양의(陽儀)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또 영신해야 할 신위의 종류에 따라 춤을 반복하는 것이 영신 문무의 특징인데, 만일 신위가 문묘의 공자를 비롯한 여러 유자 및 인신(人神)의 경우는 1개의 악곡을 9번 반복 연주하면서 그에 맞추어 춤도 반복한다. 천제(天祭) 때, 천신이 내려와 인간과 화합하게 하기 위해 음악을 여섯 번 연주하는 동안 영신 문무도 여섯 번 반복해서 춤추어 마친다. 이것을 육성(六成) 혹은 육변(六變)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의 천제는 산천성황제(山川城隍祭)를 덧붙여 하나로 드리는 풍운뇌우제를 말한다. 지기(地祇)에 제사하여 지신을 부르는 사직 제사 때는 8변을 하며, 선조(先祖)나 선성(先聖) 등 인신(人神)을 강림하게 할 때는 9변을 하였다(『세종실록』 12년 2월 19일). 아악 초헌의 문무는 각 신위의 문덕을 표현하는 4언 8구 악장의 노래와 반주로써 춤을 춘다.

속악을 사용하는 종묘와 영녕전에서는 첫 잔을 올리는 초헌 의식에 보태평지무라는 이름의 문무를 춘다. 보태평지무는 1464년(세조 10)부터 희문(熙文)·기명(基命)·귀인(歸仁)·형가(亨嘉)·집녕(輯寧)·융화(隆化)·현미(顯美)·용광(龍光)·정명(貞明)·대유(大猷)·역성(繹成) 등 11곡을 사용하였다. 그중 첫 곡과 마지막 곡인 희문과 역성은 초헌관을 인도해 들어오고, 다시 인도해서 나갈 때 연주하는 음악이다. 따라서 11곡 중 9곡이 보태평지무의 본 악곡이며, 9변을 하도록 계획된 문무임을 알 수 있다. 『시용무보(時用舞譜)』에 의하면 보태평지무는 11곡 모두 8·8·6·9의 수리를 동작으로 표현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조선시대의 문무는 약적을 사용하는 의미적 외형과 8·6·9라는 성수(成數)의 구성 양식 및 반복하는 춤의 양태를 상징적 표현 내용으로 삼은 것이다.

제향에서 아악 연주를 담당한 악인(樂人)과 문무를 춤추는 사람은 재랑(齋郞)이라고 했는데, 이들을 좌우방(左右房)으로 나누어 좌방에는 등가(登歌)의 음악인들을 두고, 우방에는 문무인을 두었다(『세종실록』 12년 2월 19일). 재랑은 이조(吏曹)에서 지원자 가운데 나이가 젊고 총명한 사람을 뽑고, 또 양민(良民)의 자제(子弟)를 교육시켜 제사에 전념하도록 했다. 그에 비해 무무를 담당한 무공(武工)은 병조에서 젊고 일을 감당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임명하였다(『세종실록』 12년 2월 19일). 이들 아악을 맡은 사람은 악생(樂生), 속악을 담당한 사람은 악공(樂工)이라고 불렀다. 악공은 관노로 임명하고, 악생은 재랑과 무공인 옛 악생의 자제들에서 임명하였다(『정조실록』 2년 11월 29일).

변천

조선시대 문무의 제도는 고려시대 아악 수용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고려시대의 아악은 1116년(고려 예종 11)에 예종이 송나라 휘종이 보내온 대성악(大晟樂)의 문무 및 무무를 친히 관람하고 수용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후 1370년(고려 공민왕 19)에 명나라 태조가 내린 아악의 문무를 조선에서 수용하게 되었다.

한편, 제사나 회례연 절차에 포함된 문무와 무무는 그 춤추는 순서를 정하는 일도 중요했다. 조선시대에는 태조와 태종의 문덕을 찬미하는 내용으로 문무의 가사를 만들고, 무공을 찬미하는 내용으로 무무의 가사를 만들어 회례(會禮)에 쓰도록 한 뒤(『세종실록』 14년 9월 7일), 이후 모든 제향과 회례연 등에서 문무를 먼저 연행하고 무무는 그 다음에 공연하도록 하였다. 종묘에서의 문무는 1464년(세조 10) 1월의 춘향대제(春享大祭)로부터 보태평 악곡을 사용하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세조실록』 10년 1월 14일).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악학궤범(樂學軌範)』
  • 『시용무보(時用舞譜)』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