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장고(沈藏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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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의 제사와 각 전(殿)에서 소요되는 채소의 재배와 공급을 관장하던 관아.

개설

조선초기에 궁중의 제사와 각 전에서 소요되는 채소의 재배와 공급을 관장하던 침장고(沈藏庫)는 1414년(태종 14)에 폐지되고 대전과 중궁전의 주방인 내주(內廚) 소채(蔬菜)의 공상은 다방(茶房)에 이속되었다. 침장고는 2년 후에 다시 설치되었다가 1466년(세조 12) 사포서(司圃署)에 병합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침장고는 조선초기에 설치되었는데, 신정 관제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1414년(태종 14) 침장고를 폐지하고, 대전과 중궁전의 내주 소채 공상은 다방으로 이속하였다. 침장고는 2년 후에 다시 설치되었고, 1466년(세조 12) 사포서에 병합되었다. 사포서는 궁궐에서 소요되는 과일·채소를 재배·공급·보관하고, 과수원과 채마밭의 관리 감독 업무를 관장하였다.

조직 및 역할

궁중의 제사와 각 전에서 소요되던 채소의 재배와 공급을 관장하던 관청으로 처음 설치한 연대는 알 수 없다. 1404년(태종 4)에 침장고의 제거(提擧), 별좌(別坐), 향상(向上), 별감(別監)은 직임이 1명이라 하였다(『태종실록』 4년 8월 20일).

변천

1404년(태종 4)에 침장고 관원들이 전지와 경우(耕牛)를 소유하면서 각색 채소를 재배하고 소를 키우는 일을 담당하였고(『태종실록』 4년 8월 20일), 1409년(태종 9)에 공조(工曹) 소속 아문에 속하였다. 1414년(태종 14)에는 침장고를 없애고 양전(兩殿)의 내주 소채는 다방으로 하여금 공급하게 하였다. 건원릉(健元陵)·문소전(文昭殿)·종묘(宗廟)·사직(社稷) 제사의 소채는 전사시(典祀寺)에서 공급하게 하고, 모든 연향(宴享)의 용도는 예빈시(禮賓寺)에서 공급하게 하였다(『태종실록』 14년 11월 23일). 그런데 2년 후에 다시 침장고를 설치하였다(『태종실록』 16년 9월 2일).

그러나 1417년(태종 17)에 다시 침장고를 폐지하면서 여러 곳의 제향(祭享)과 각 전에 공상하는 채소를 침장고 대신에 계성전(啓聖殿)·문소전·혼전(魂殿)의 공상은 전사시(典祀寺)에서, 인덕궁(仁德宮)공안부(恭安府)에서, 대전은 내자시(內資寺)에서, 정비전(靜妣殿)은 내섬시(內贍寺)에서, 성비전(誠妃殿)·세자전(世子殿)은 경승부(敬承府)에서 식례에 의하여 진공(進供)하도록 하고, 침장고에 속한 노비·거우(車牛)·채전(菜田)은 이들 아문으로 분속하여 공상용 채소를 직접 재배하게 하였다(『태종실록』 17년 10월 26일).

1466년(세조 12)에 사포서로 개칭되었고, 궁중의 원포(園圃)·소채에 관한 일을 관장했다. 원포는 과실나무와 채소 따위를 심어 가꾸는 뒤란이나 밭을 말한다. 관원은 정·종2품인 제조(提調) 1명, 정6품인 사포(司圃), 종6품인 별제(別提) 2명, 종7품인 직장(直長) 1명, 정·종8품인 별검(別檢)이 있다. 이속(吏屬)으로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서리(胥吏) 12명을 두었으나 『속대전(續大典)』에서 서원으로 낮추고 5명을 두었다가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는 6명으로 늘렸다. 사포서는 1882년(고종 19)에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속대전(續大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송수환, 『조선전기 왕실재정연구』, 집문당,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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