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색역(五色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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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강원도의 도로망인 상운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강원도 양양 지역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조선전기 세조 연간에 역제(驛制)를 41역도(驛道)-543속역(屬驛) 체제로 정비하는 과정에서 오색역(五色驛)은 상운도(祥雲道)를 구성하는 역의 하나가 되었다. 그 뒤 성종대에 소동라령(所冬羅嶺) 대신 미시파령(彌時坡嶺) 길이 새로 열림에 따라 간성 원암역(元岩驛)으로 이설되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오색역의 설치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선전기 세종대에 전국적으로 역도-역로 조직을 갖추는 과정에서 강원도에는 보안도(保安道)·대창도(大昌道)·평릉도(平陵道) 등 3개의 역도와 역도에 속하지 않은 19개의 역을 두었는데, 여기에 오색역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세조대에 역제를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할 때 상운도 관할하에 오색역이 있었다.

조직 및 역할

오색역은 성종대에 이미 이설되었기 때문에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강원도 양양 편에는 오색역에 관한 기록이 없고, 그 대신 오색역을 철거하고 옮겨 개칭한 원암역(元岩驛)이 등장한다. 『여지도서』 강원도 간성군 편에 따르면, 원암역에는 대마(大馬) 2필, 복마(卜馬) 5필 등 총 7필의 역마와, 역리(驛吏) 11명, 역노(驛奴) 48명이 배속되어 있었으며, 역비(驛婢)는 없었다.

변천

세종대에 전국적으로 역로 조직을 갖추었으나, 세조대에는 찰방(察訪)이 관할하는 역이 많고 역 사이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두루 순시하기가 어려워 역로가 쇠퇴하는 등의 폐단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1462년(세조 8)에는 병조의 건의에 따라 각 도의 역참을 파하고 역로를 정비해 찰방과 역승(驛丞)을 두게 하였다. 그 과정에서 오색역은 상운역(祥雲驛)·연창역(連蒼驛)·강선역(降仙驛) 등과 함께 상운도 관할이 되었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 1477년(성종 8)에는 강릉의 진부역(珍富驛)·횡계역(橫溪驛)·대화역(大和驛)·임계역(臨溪驛)과 양양의 오색역, 인제의 부림역(富林驛) 등이 피폐해져서 역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대로(大路)의 예에 따라 공수위전(公須位田) 20결을 지급해 회복하게 하였다(『성종실록』 8년 1월 24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양양도호부 편에는, 양양도호부 서쪽 45리 지점에 있었으나 없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 간성군 편과 『관동지(關東誌)』 간성군 편에는, 원암역은 옛 터가 있는데 미시파령의 길이 열리면서 오색역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되어 있다. 오늘날의 미시령인 미시파령은 고려시대에는 길이 있었지만 너무 험준한 까닭에 폐쇄하여 통행을 금지했다가, 1493년(성종 24)에 다시 도로를 개척하고 길을 열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도 오색역이 원암역으로 이설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오색역은 간성으로 이설된 뒤 원암역으로 불렸으며, 조선후기까지 상운도에 속한 역으로 존속하였다. 1896년(건양 1)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오색역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양양도호부 서쪽 45리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오색역이 이설된 원암역은 『여지도서』에는 간성군 관아 남쪽 60리,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에는 간성군 서남쪽 63리, 『관동지』에는 간성군 서남쪽 60리 지점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여지도서(輿地圖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대동지지(大東地志)』
  • 『관동지(關東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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