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역(大和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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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강원도 지역의 역도 중 하나인 보안도에 속한 역.

개설

대화역(大和驛)은 고려시대에는 성종에서 인종 연간에 전국의 525개 역을 22개 역도(驛道)로 편성하는 과정에서 명주도(溟州道)에 소속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전국적인 역도-역로 조직을 갖추는 과정에서 대창도(大昌道)에 속하였으며, 세조 연간에 역제(驛制)를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할 때 보안도(保安道)의 속역으로 편입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高麗史)』 참역(站驛) 조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명주도에 속한 28개 속역 가운데 하나였다. 고려시대 초기에 전국의 역을 규모에 따라 6등급으로 분류한 6과(六科) 체제에서는 5과에 해당하였으며, 12명의 정인(丁人)이 배속되어 있었다.

조직 및 역할

조선시대에는 역역(驛役)을 원활하게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역참에 역리(驛吏)와 역노비(驛奴婢) 등을 포함한 다양한 역민(驛民)을 편성하였으며, 역의 재정에 충당하도록 역위전(驛位田) 또는 마전(馬田)을 지급하였다. 따라서 대화역에도 역민과 역속이 배정되어 있었는데,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역리 20명, 역노 20명, 역비 15명과 대마(大馬) 1필, 복마(卜馬) 3필 등 총 4필의 역마가 배속되어 있었다.

한편 조선 세종대에는 왕이 사냥에 나섰다가 이곳에 머무르기도 하였다(『세종실록』 3년 3월 2일). 역이 교통·통신 기관으로서의 역할 외에 왕이 머무르는 거처로서 기능하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조선 건국 후 전국적인 역도 편성 체제 개편 과정을 거치면서 세종대에 대화역은 강원도의 역도인 대창도에 소속되었다[『세종실록』 지리지 강원도]. 1457년(세조 3) 역승 폐지 조치로 1462년(세조 8)에는 기존의 역로가 멀어 찰방(察訪)이 순시하거나 사객이 왕래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지적에 따라 역로를 개편하였다. 이때 대화역은 보안도에 속하게 되었으며,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별다른 변화 없이 보안도의 속역으로 존속하였다. 1896년(고종 33) 1월,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한편 『여지도서』에 따르면, 대화역은 관아 서쪽 140리 지점에 위치하였으며 관사(官舍)가 있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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