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축소(司畜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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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짐승[雜畜]을 기르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개설

고려시대 전구서(典廐署)를 계승하여 조선 개국 후에 그대로 설치하였다가 뒤에 예빈시(禮賓寺)에 합쳐서 분예빈시(分禮賓寺)라 하였다. 1406년(태종 6)에 분예빈시와 사련소(司臠所)를 합쳐서 사축소(司畜所)라 칭하였고, 1466년(세조 12)에 분예빈시를 사축서라 개칭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전구서는 고려시대에 가축의 사육과 제향(祭享)의 보좌, 어선(御膳), 연향(宴享) 등에 축산물을 제공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였다. 1392년(태조 1)에 답습하여 설치하였다가 뒤에 예빈시와 합쳐 분예빈시라 하였고, 1406년(태종 6)에 다시 분예빈시와 사련소를 합쳐 사축소라고 하였다(『세조실록』 12년 5월 22일).

조직 및 역할

1460년(세조 6)에 사축소에는 별좌(別坐) 3명을 두고, 별감(別監) 6명도 옛날 그대로 두었고(『세조실록』 6년 8월 16일), 1463년(세조 9)에 사축소 별감은 없앴다(『세조실록』 9년 윤7월 20일). 1466년(세조 12)에 분예빈시, 사련소를 합속하여 사축소라 칭하였다.

사축서에서 사육한 돼지, 양, 염소, 거위, 오리 등 잡축을 궁중의 잔치나 행사 등에 공급하였다. 궁중의 혼례와 제사, 궁중 잔치인 진연(進宴)·진찬(進饌), 왕이 신하에게 술과 음식을 내리는 선온(宣醞)·사연(賜宴), 전직 관원인 봉조하(奉朝賀)의 월치(月致)와 노인의 세찬(歲饌)에 쓰였다. 또 기우제(祈雨祭), 보사제(報謝祭), 선무사(宣武祠)의 절제(節制), 각군의 문기제(門旗祭), 칙사(勅使)와 표해인(漂海人)의 공궤(供饋) 등으로도 공급하였다.

변천

조선초기에는 가축 사육을 전구서에서 담당하다가, 이어 분예빈시에서 담당하였고, 1466년(세조 12) 1월에 관제개정 때 종래의 분예빈시를 사축서로 개칭하였다. 사축서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종6품아문으로 정비되어 제조(提調: 종2품) 1명, 사축(司畜: 종6품) 1명, 별제(別提: 종6품) 2명, 서리(書吏) 4명, 차비노(差備奴) 6명, 근수노(根隨奴) 3명을 두었다.

1509년(중종 4) 가축들의 사료 재료인 곡초(穀草)와 생초(生草)는 경기의 여러 읍에서 공물로 받아 충당했는데, 그 양이 너무 늘어나 이를 줄이도록 했다(『중종실록』 4년 5월 25일). 1609년(광해군 1) 대동법(大同法)이 실시된 이후에는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에서 사료를 지급하도록 했다.

1637년(인조 15) 사축서는 전생서(典牲署)에 합쳐졌다가 뒤에 복구됐으며(『인조실록』 15년 3월 8일), 1746년(영조 22)에 편찬된 『속대전(續大典)』에 의하면, 기구가 축소되어 제조는 호조 판서가 겸임하고, 사축 1명을 감원하였으며, 별제 2명은 그대로 두었고, 서리는 서원(書員)으로 격하하여 2명으로 감원하였다.

1767년(영조 43) 사축서가 유명무실하다고 또 다시 없애고 호조에 합병해서 호조 낭청(郎廳) 1명이 그 일을 맡아보았다. 그 뒤 구사축서(舊司畜署)로 불리다가, 1865년(고종 2)에 편찬된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 다시 종6품아문으로 정비하였으며,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폐지하였다. 위치는 처음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었으나 뒤에 미동(美洞)으로 옮겼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송수환, 『조선전기 왕실재정연구』, 집문당, 2002.
  • 한우근 외 역, 『譯註 經國大典-註釋篇』,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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