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납(獻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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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기관인 사간원(司諫院)의 정5품 관직.

개설

헌납(獻納)은 고려후기 도첨의사사 소속으로 설치되었다가 조선으로 계승되었다. 조선시대 헌납은 사간원의 정5품 관직으로, 정원은 1명이다. 모두 문관(文官)을 썼고 재능과 명망, 문벌이 모두 우수한 자를 엄히 가려서 임명하였다. 성종대에 헌납으로 재직한 인물은 총 30명으로 이 가운데 문과 합격자가 29명이고 1명은 분명하지 않다. 헌납의 아버지가 역임한 관직이나 헌납의 최종 관직에 관한 통계를 보면, 헌납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청요직으로서 판서나 정승으로 가는 관문임을 알 수 있다. 헌납 위로는 정3품 대사간(大司諫)과 종3품 사간(司諫)이 각각 1명씩 있었고, 아래로는 정6품 정언(正言) 2명이 있었다. 1401년(태종 1) 설치되어 『경국대전』에 명문화되면서 조선말까지 계승되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사간원이 혁파되면서 소멸되었다.

담당 직무

헌납은 사간원의 간관(諫官)으로서 왕에게 간쟁·봉박(封駁)하는 일을 주로 맡았다. 그러나 실제 임무는 이에 제한되지 않았다. 사간원의 다른 관료, 사헌부(司憲府)·홍문관(弘文館)의 관료와 함께 간쟁·탄핵·시정(時政)·인사 등에 대한 언론과 경연(經筵)·서연(書筵)에도 참여하였다. 이 외에 인사 문제와 법률 제정에 대한 서경권(署經權)을 가졌고, 국문(鞫問)·결송(決訟) 등에도 참여하였다. 왕과 자주 접촉하는 직무 성격 때문에 직급에 비해 정치적 영향력이 컸다.

변천

고려후기 도첨의사사 소속의 좌·우헌납으로 설치되었으며, 이후 헌납은 사간 등으로 개칭되다가 조선으로 계승되었다. 1392년(태조 1) 문하부 소속으로 정5품의 좌·우보궐 각 1인씩이 설치되었다. 1401년 관제 개혁 때, 조선초부터 있었던 문하부(門下府)의 낭사 벼슬인 정5품 보궐(補闕)의 이름을 고쳐 헌납이라 하였다. 문하부가 의정부로 흡수되고 낭사가 사간원으로 분리 독립할 때 개칭된 것이다. 문하부의 좌·우보궐 직제를 계승하여 처음에는 좌·우헌납 각 1명씩을 두었으나, 후에 1명으로 줄였다. 이후 『경국대전』과 『대전회통』에는 정원이 1인으로 명시되어 있다. 1506년(연산군 12) 연산군이 사간원을 혁파하며 잠시 혁파(→폐지)되었으나, 곧이어 중종반정으로 중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설치되어 조선말까지 유지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간원이 혁파되면서 헌납도 소멸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역대요람(歷代要覽)』
  • 한충희, 『(조선초기)관직과 정치』, 계명대학교 출판부, 2008.
  • 최승희, 「조선초기의 언관에 관한 연구: 대간제도의 성립과 그 기능의 분석」, 『한국학논집』 제1집,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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