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방전(宮房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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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왕실과 왕족의 생계와 제사 등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국가에서 소유권이나 수조권을 지급한 토지.

개설

궁방전(宮房田)은 직전법 폐지로 왕족에 대한 생계 대책이 어려워짐에 따라 17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대두하였다. 궁방은 왕족의 생활 기반과 품위 유지를 위해 토지를 비롯한 어전(漁箭)·염분(鹽盆)·산림천택(山林川澤) 등을 절수(折受)의 형태로 지급한 것이다. 그중 재정 기반의 큰 부분을 차지한 것이 궁방전이라는 이름의 토지였다. 궁방전의 급격한 팽창은 민전의 소유권 침탈과 국가수조지의 감축이라는 문제점을 낳았다. 이에 정부는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내용은 대부분 궁방전에 과세하고 이에 대한 별도의 재정을 지원하거나 면세결의 규모를 제한하는 것이었다.

궁방의 전체 면세결총은 대체로 ‘18세기 후반∼19세기 초의 완만한 증가, 1820년대의 감소, 1830년대∼1860년 중반의 안정, 1860년대 후반의 증가, 1870년대의 감소’의 추이를 보이며 대략 전국 총실결의 약 2~3% 정도, 국가에서 세를 받아들이는 출세실결(出稅實結) 대비 4∼5%에 달하는 규모였다.

내용 및 변천

궁실은 왕과 선왕의 가족 집안을 뜻하며 궁가는 역대 여러 왕에서 분가한 왕자·공주들의 종가를 의미한다. 궁방과 궁방 관련 기구로는 내수사(內需司)수진궁(壽進宮)·어의궁(於義宮)·명례궁(明禮宮)·용동궁(龍洞宮)·육상궁(毓祥宮)·선희궁(宣禧宮)·경우궁(景祐宮)의 1사7궁을 필두로 다양한 궁방이 있었다. 조선전기 후궁·대군·공주·옹주 등의 존칭에 지나지 않던 궁방은 직전법 폐지로 왕족에 대한 생계 대책이 어려워짐에 따라 17세기 이후 재정 운영의 주체로서 대두하였다. 궁방은 우선 그 존속 기간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1사7궁으로 대표되는 영구존속궁(永久存續宮)으로 이들 궁방은 17세기부터 1907년까지 존속하였다. 둘째, 1사7궁에 포함되지 않고 20세기까지 존속하지도 않았지만 18·19세기부터 갑오개혁기까지 존속한 궁방으로 대개 왕패(王牌)나 별사문적(別賜文蹟)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셋째, 영구존속하지 않은 기타 모든 궁방이다.

궁방전은 궁장토(宮庄土)·사궁장토(司宮庄土), 궁둔(宮屯) 등으로도 불리며 임진왜란 이후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주인 없는 땅과 버려진 땅이 많아지자 정부는 이를 궁방에 불하하여 재정원으로 삼도록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각 궁방은 왕의 권위를 배경으로 이미 개간되어 소유주가 있는 토지를 양안(量案)상에 소유주가 기재되어 있지 않다는 명목으로 절수하여 토지를 집적해 나갔다(『인조실록』 23년 10월 29일). 궁방전과 여기에 소속된 작인(作人)들은 일반 민전에 비해 낮은 지대를 부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조세와 군역을 부담하지 않아도 되는 면세면역(免稅免役)의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궁방의 민전 침탈은 점점 심해졌으나 한편으로는 각종 혜택 때문에 민전의 자발적 투탁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정부는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내용은 대부분 궁방전에 과세하고 이에 대한 별도의 재정을 지원하거나 면세결의 규모를 제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의는 1695년(숙종21) ‘을해정식(乙亥定式)’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골자는 궁방에 대한 재정 지원을 통해 토지를 매입하도록 하는 급가매득제(給價買得制)와 민전에 대한 미(米) 23두의 수조권만을 궁방에 부여하는 민결면세제(民結免稅制)의 시행이었다(『숙종실록』 21년 7월 23일). 이러한 조치는 당시 진행되던 토지의 상품화와 민인들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크게 신장된 데 말미암은 것이었다.

18세기 무렵 궁방전은 매득지(買得地)·절수지(折受地)·민결면세지(民結免稅地)로 구성되어 있었다. 매득지의 경우, 궁방이 지주로서 소유권을 가진 가운데 작인을 거느리는 형태로 소유 구조가 이루어졌다. 지대량도 일반 민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절수지의 경우, 민인들이 주도적으로 개간하였을 때 절수지에는 권력을 매개로 한 궁방의 명목적 소유권과 개간자의 실제 소유권이 중첩되어 있었다. 이러한 토지는 소유권을 둘러싸고 궁방과 민인들이 대립했기 때문에 일반 민전과는 다른 수준의 지대가 책정될 수밖에 없었다.

절수지의 지대 수취량은 결당 조 200두와 조 100두의 두 가지 유형이 대표적이다. 결당 조 200두형은 일종의 궁방과 개간자 사이의 타협책으로, 조 200두 가운데 100두는 지대에 해당하고 100두는 면세액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조 100두형의 경우 궁방은 토지에서 거두어들이는 세액의 총량인 조 100두의 수취권을 국가로부터 위임받은 것으로서 사실상 민결 면세지와 유사한 형태였다. 이같이 결당 조 100~200두를 수취하는 궁방전에서 궁방은 권력의 매개 없이는 토지 지배를 관철할 수 없거나 결당 조 100두 정도의 수취에 만족해야 했다. 다양한 수취액과 권리의 분할은 궁방전 조성 과정에서 궁방과 개간자 사이의 물력 투입 정도에 따라 그 형태가 다양하였다. 수취액의 조정, 토지의 분할, 도장권(導掌權)의 부여, 면세·면역의 특권 제공, 경작권의 보장 등이 그것이다. 장토 가운데에는 명목상은 궁방의 소유였으나 실상은 중답주(中畓主)라는 또 하나의 지주가 존재하는 경우도 많았다.

18세기 중엽을 전후로 궁방전은 두 가지로 분화된다. 궁방의 소유지로서 복잡한 소유 구조와 지대량을 보이는 유토(有土), 그리고 민유지로서 결당 미(米) 23두를 수취하고 정기적으로 이정(移定)되는 무토(無土)가 그것이다.

우선 무토의 발생부터 살펴보자. 민결면세지와 조 100두를 수취하는 궁방전에서도 궁방의 자의적인 수탈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이에 따라 민인과 해당 지역의 지방관, 궁방의 입장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민결면세지가 윤정(輪定)·윤회(輪回)되기 시작하였다. 땅이 없는 면세지라는 의미로 무토면세(無土免稅)·무토(無土)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영조실록』 51년 1월 4일). 이에 따라 무토에 대비되는 유토라는 개념이 쓰이기 시작하고 유토와 무토는 점차 궁방전의 소유권 여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기 시작하였다(『순조실록』 26년 1월 25일). 유토에는 궁방의 확실한 소유지로서 궁방(지주)-작인(전호) 관계를 이루는 궁방전과 함께 궁방전 내에서 민인들이 일정한 소유권을 확보하여 궁방(수조자·지주)-기주(起主)·중답주·도장(지주)-작인(전호)의 구조를 이루는 장토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유토궁방전에서의 이중 소유 구조는 민인들의 소유권 성장에 따른 결과이며, 궁방의 사적 지주로서의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유토 내에서 기주·중답주는 실질적인 토지 소유권자로서 별다른 제약 없이 매매하였지만, 이들의 소유권은 원칙적으로는 궁방에 의해 제약되는 불안정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중층적인 소유 구조는 계속해서 재생산되어 갔다.

궁방전에는 궁감(宮監)이나 궁차(宮差), 도장(導掌) 등이 파견되어 수취를 담당하였으며, 감관(監官), 마름[舍音] 등이 장토의 여러 가지 실무를 담당하였다. 일부 궁방전은 해당 지역의 지방관이 관리와 수취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을해정식’ 이후에도 궁방전으로 인한 문제는 쉽게 불식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규제책은 꾸준히 이어졌다. 1729년(영조 5)에는 궁방에 대한 출세(出稅) 조치가 단행되고 면세결의 액수가 정해졌으며, 1754년(영조 30) 무렵에는 신설궁방에 대한 대동면세(大同免稅)의 특권도 폐지되었다. 1776년(정조 즉위)에는 규정 외로 보유한 궁방전을 조사하여 대대적인 출세 조치를 단행하고, 여러 궁방의 전결을 호조로 이속시키는 등 다양한 조치가 취해졌다. 이를 통해 60,000여 결에 달하는 궁방전의 1/3~1/2 정도가 세금이 징수됨으로써 내수사와 주요 궁방의 면세결은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아울러 ‘병신정식(丙申定式)’을 통해 무토면세지의 호조 귀속과 도장 파견이 금지되었다. 도장(導掌)·궁차(宮差)의 파견을 통한 궁세(宮稅) 징수가 금지되고, 대신 각 읍의 수령이 수취를 담당하여 호조에 상납토록 하였다. 이로 인해 내수사와 궁방은 토지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력을 크게 상실하였으며 호조로부터 재원을 지원받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가 되었다. 이외에도 신설 궁방에 대한 재정 긴축도 꾸준히 추진되었다.

궁방전의 대부분은 내수사 및 수진궁·명례궁·어의궁·육상궁·용동궁·선희궁·경우궁 등 1사7궁(一司七宮)에 소속되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승총(甲午陞摠)은 탁지부의 지세수입확보를 위해 궁방전을 비롯한 각종 면세지에 출세를 단행한 조치였다. 당시 승총결(陞摠結)은 총 9,848결로 전체적으로 8% 정도의 출세실결이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궁방전의 무토가 폐지되었으나 유토 중에도 궁방이 수조권만을 가지는 토지, 즉 제2종 유토가 그대로 유지되면서 이후 국유지 분쟁의 불씨를 제공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김용섭, 『朝鮮後期農業史硏究』, 一潮閣, 1970.
  • 송양섭, 『朝鮮後期屯田硏究』, 경인문화사, 2006.
  • 이영훈, 『朝鮮後期社會經濟史硏究』, 한길사, 1988.
  • 박준성, 「17, 18세기 宮房田의 擴大와 所有形態」, 『韓國史論』 11, 1984
  • 송양섭, 「正祖의 왕실재정 개혁과 ‘宮府一體’論」, 『大東文化硏究』 76, 2011
  • 조영준, 『19世紀 王室財政의 運營失態와 變化樣相』,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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