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별창(軍資別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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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창의 별창(別倉)으로 가난한 백성에게 곡식을 꿔 주는 진대를 담당함.

개설

『경국대전』「호전(戶典)군자창(軍資倉)조에는 “군자창에는 별창(別倉)을 따로 두어 잡곡을 헤아려 쌓아 두고 백성들에게 빌려 주며, 가을에 빌려 준 본래의 수량을 받아들인다.”는 내용이 보인다. 여기서 군자별창은 군자창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 창고로서 백성들에게 곡식을 꾸어 주는 환곡(還穀)과 진휼 기능을 담당하던 창고였다. 원래 중앙과 지방에 설치된 군자창의 곡식은 전쟁 등 국가의 비상사태를 위해 비축해 놓은 것으로 환곡이나 진휼 등의 용도로 사용되던 곡식이 아니었다. 진휼이나 환곡과 같은 진대(賑貸)의 기능은 본래 의창(義倉)에서 담당하였다. 그런데 1461년(세조 7) 사창제(社倉制)를 실시하면서 의창제도에 변화가 생겼다『세조실록』 7년 6월 25일. 사창(社倉)의 설립을 계기로 의창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의창곡으로 사창의 원본(元本)을 마련하였기 때문에 그 규모는 전보다 훨씬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또 이전에는 의창이 군자창과는 전혀 별개로 운영되던 진대 기구였으나 사창을 설립한 이후에는 의창이 군자창에 속하는 진대 기구로 바뀌게 되었다. 이에 의창의 법제적 명칭은 군자별창으로 바뀌게 되었다. 즉 군자별창은 사창제 실시 이후에 붙여진 의창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전기까지 국가와 지배층의 경제 기반은 자영농에게 수확량의 일부를 세금으로 거둔 조세 수입이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집권 세력은 흉년이 들었을 때 자영 소농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진휼정책에 관심을 두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의창의 운영이었다.

조선초기에 의창을 통해 관곡(官穀)을 분급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이자를 받지 않고 원곡(元穀)만 돌려받는 환곡[還上]이 있으며, 또 다른 하나는 무상으로 기민(飢民)에게 곡식을 분급하는 진제(賑濟)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초기에 의창은 비축 곡식을 한 번 확보한 이후에는 더 이상 보충할 수 있는 수입원이 없었다. 따라서 진제를 시행하거나, 갚지 않은 환곡이 늘어나면서 그 규모는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15세기 중반 무렵에는 의창곡의 감소와 운영 과정상에 나타나는 폐해가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한 형편이었다. 이에 1461년(세조 7)에는 새로운 진대정책으로서 사창제를 실시하였다. 사창제에서는 한 군현 내의 몇 군데 마을에 사창을 설치하고, 부민 가운데 선발한 사장(社長)이 사창곡의 운영을 주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사창곡을 돌려받을 때에는 2할의 이자를 받도록 하였다.

이 사창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의창과 전혀 다른 성격을 띠었다. 하나는 2할의 이자를 받는다는 점이었고, 또 하나는 민간인인 사장(社長)이 그 운영을 주관한다는 점이었다. 전자는 미납 환곡으로 의창곡이 줄어드는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었고, 후자는 관(官)에서 진대 기구를 운영하는 데 따른 폐단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었다.

이와 같은 세조대의 사창 설립을 계기로 관에서 운영하는 의창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의창곡으로 사창의 원본(元本)을 마련하였기 때문에 그 규모는 훨씬 적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축소된 의창을 군자창에 소속시키고 명칭을 군자별창이라 하였다.

내용

1470년(성종 1)에는 1461년에 실시한 사창제를 폐지하고, 이후에는 더 이상 사창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사창제를 폐지한 이후에도 의창은 여전히 별창으로 불렸고, 그 규모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성종대에는 사창은 없어지고 별창만 남은 상태였는데, 그 규모는 이전의 의창에 비해 훨씬 적었고 또 제도적으로는 독립성이 약화된 상태였다.

성종대의 별창은 운영상에서도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수령이 중앙정부에 계문(啓聞)하는 절차를 밟지 않고 별창곡을 임의로 분급할 수 있도록 한 것이고, 또 하나는 환곡을 거둘 때 다양한 방법으로 이자를 받았던 것이다. 특히 지방 재정을 마련하는 둔전(屯田)이 권세가의 수중으로 넘어가면서 군현의 경비가 부족하게 되자 환곡을 돌려받을 때 이자를 받아 경비에 충당하는 것이 관행처럼 되었다. 또 별창곡을 빌려 주고 회수한 햇곡식을 군자창의 묵은 곡식과 바꾸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조치는 별창으로 바뀌기 이전인 1451년(문종 1)부터 취해졌다.

변천

조선시대에는 흉년이나 기타 여러 경우에 나라에서 세금의 일부를 면제해 주었는데, 환곡으로 꿔 간 곡식을 면제해 주기도 하였다. 성종대에도 몇 차례 환곡의 납부를 면제해 주었고 이로 인해 별창의 규모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미납된 환곡도 늘어 별창 곡식이 감소하는 사정은 계속되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 시기에는 더 이상 별창의 곡식을 보충하는 조치가 없었으며, 중앙에서는 그러한 조치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당대 국가적인 진휼사업의 전체 규모 역시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별창의 규모는 계속 줄어들었으나 국가는 더 이상 별창제도를 유지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따라서 중종대 무렵에는 아예 별창이 없어져 버린 군현도 있었으며, 환곡이나 진제로 분급하는 곡식도 군자곡 중심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환곡을 돌려받을 때 모곡(耗穀)의 명목으로 꿔 간 것 이외의 이자를 받는 것이 제도화되면서 환곡의 성격이 바뀌었다. 상설 진대 기구인 별창(의창)의 소멸과 환곡의 변질은 지주제의 발달과 수조권(收租權)적 토지 지배의 축소라는 현상과 함께 진행되었다.

참고문헌

  • 김훈식, 「조선 초기 의창 제도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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