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모전(孝慕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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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의 세자였던 익종(翼宗)의 왕비인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趙氏)의 혼전(魂殿).

개설

신정왕후 조씨는 1890년(고종 27) 4월 17일 오후 3시 전후에 경복궁흥복전(興福殿) 서온돌에서 승하했다. 신정왕후는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조만영(趙萬永)의 딸로 헌종의 어머니이다. 12세 때 세자빈으로 책봉되고, 1827년(순조 27) 헌종을 낳았다. 1834년 헌종이 왕위에 오르고 죽은 남편인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추봉되자 왕대비가 되었다. 1857년(철종 8) 순조 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金氏)가 죽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철종이 재위 13년 만에 후사 없이 승하하자 대왕대비로서 흥선군(興宣君)의 둘째아들로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또한 고종을 아들로 삼아 철종이 아니라 익종의 뒤를 잇게 하였다. 능은 수릉(綏陵)으로 경기도 양주에 있다. 효모전은 1890년 4월 17일부터 1892년(고종 29) 6월 초10일 시행된 부태묘(祔太廟)까지 상례(喪禮)를 거행한 곳이다.

위치 및 용도

효모전은 신정왕후의 혼전을 이르는 것이다. 신정왕후의 상례 절차를 보면, 경복궁 흥복전에서 승하한 후 복(復), 목욕(沐浴), 습(襲), 습전(襲奠), 거림(擧臨), 반함(飯含), 명정(銘旌), 소렴(小殮), 소렴전(小殮奠), 조석전(朝夕奠), 4월 20일 인시(寅時)에 영상(靈床)을 태원전(泰元殿)에 옮기고 오시(午時)에 대렴(大斂)을 했으며 신시(申時)에 관에 넣고 빈소를 만드는 성빈(成殯)을 했다. 아울러 제사를 지냈다. 이어서 성복(成服), 삭망전(朔望奠), 재궁가칠(梓宮加柒), 재실결과(梓室結裹), 진향(進香), 발인(發靷), 노제(路祭), 하현궁(下玄宮), 천전(遷奠), 입주전(立主奠), 초우(初虞), 반우(返虞), 졸곡제(卒哭祭), 소상제(小祥祭), 재기제(再朞祭), 속절(俗節)에 따른 제의 등을 지냈다. 1892년(고종 29) 6월 초10일에 담제(禫祭)와 부태묘(祔太廟)를 거행하며 3년상을 마쳤다.

변천 및 현황

1890년(고종 27) 8월 30일, 고종이 효모전에서 첫 번째 우제(虞祭)를 지냈다. 이때 왕세자가 따라 나아가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아헌례(亞獻禮)를 거행했다. 9월 2일 재우제(再虞祭)를 지냈고 왕세자가 아헌례를 행하였다. 9월 4일 삼우제(三虞祭)를 지냈고 왕세자가 아헌례를 행하였다. 9월 6일 사우제(四虞祭)를 지냈고, 9월 8일 오우제(五虞祭)를 지냈다. 9월 9일 주다례(晝茶禮)구일제(九日製)를 행하였고, 9월 10일 육우제(六虞祭)를 지냈다. 9월 11일 칠우제(七虞祭), 9월 13일 졸곡제(卒哭祭)주다례(晝茶禮)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고 왕세자가 아헌례를 행하였다. 10월 1일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10월 8일 동향대제(冬享大祭)를 지낸 다음 주다례를 행하였고 왕세자가 아헌례를 행하였다. 11월 1일 삭제와 주다례를 행하였다. 11월 11일 동지제(冬至祭)를 지낸 다음 주다례를 행하였고 왕세자가 아헌례(亞獻禮)를 행하였다. 11월 15일 망제(望祭)를 지낸 다음 주다례를 행하였다. 12월 6일 효모전에서 존호(尊號)를 추상(追上)하는 데 따른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올린 뒤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고 왕세자가 따라서 예(禮)를 행하였다. 조상식(朝上食)과 주다례 및 석상식(夕上食)을 올리는 것을 모두 친히 행하였다. 12월 12일 납향대제(臘享大祭)를 지내고 주다례를 행하였다. 1891년 1월 1일 삭제(朔祭) 겸 정조제(正朝祭)와 조상식과 주다례 및 석상식을 행하였고 왕세자가 따라서 예를 행하였다. 이후 3년상을 채우는 1892년까지 1890년과 동일하게 상례를 거행했다. 1892년 4월 16일 효모전 상제(祥祭)수릉(綏陵)에 친히 제사지내면서 고안제(告安祭)를 치르고 재숙(齋宿)하였다. 왕세자도 따라서 재숙하였다. 6월 9일 효모전에 나아가 고동가제(告動駕祭)를 행하고, 이어 신연(神輦)을 모시고 태묘(太廟)에 나아가 희생(犧牲)과 제기(祭器)를 살핀 다음 재숙하였다. 왕세자도 따라 나아가 재숙하였다.

이러한 고종과 왕세자의 행위는 당시 1890년대를 기준으로 볼 때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거친 뒤 청국에서 파견한 원세개(袁世凱)의 압박과 일본 세력의 대두는 고종의 통치 행위와 권위를 훼손시켰다. 그런 와중에 신정왕후의 3년상을 상례에 따라 치르고 제사를 지속한 점은 왕실의례를 통해 국왕의 권위와 지위를 공인하려는 의도였다고 보인다.

관련사건 및 일화

효모전에서 제사를 거행할 때 고종과 고위 관료들이 대부분의 의례에 참석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수릉상력도감의궤(綏陵裳礫圖監儀軌)』
  • 『신정왕후국장도감의궤(神貞王后國葬都監儀軌)』
  • 『신정왕후국휼등록(神貞王后國恤謄錄)』
  • 『신정왕후국휼의주등록(神貞王后國恤儀註謄錄)』
  • 『신정왕후부묘도감의궤(神貞王后祔廟都監儀軌)』
  • 『신정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神貞王后殯殿魂殿都監儀軌)』
  • 『효모전일기(孝慕殿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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