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빈(成殯)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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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성빈 |
한글표제 | 성빈 |
한자표제 | 成殯 |
관련어 | 빈전(殯殿) |
분야 | 왕실/왕실의례/흉례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한형주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성빈(成殯) |
왕과 왕비의 빈소인 빈전(殯殿)을 갖추는 일.
개설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국상이 발생하면 유교적인 흉례(凶禮)에 따라 정해진 순서대로 의식이 거행된다. 이 과정에서 3일째에 소렴(小殮)이 행해지고 5일째에 대렴(大斂)이 행해진다. 대렴을 마친 당일에 빈전도감(殯殿都監)이 정전(正殿)에 해당 왕이나 왕비의 빈소를 마련하는데, 일반인들의 빈소와 달리 왕과 왕비는 이를 전(殿) 혹은 궁(宮)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빈전이라 부른다. 이 빈전을 마련하는 것을 성빈이라 한다.
내용 및 특징
성빈은 그 날짜 전에 선공감(繕工監)에서 벽돌로 찬궁(攢宮)의 터를 정전 가운데 조금 서쪽에 만들면서 시작된다. 이때 찬궁을 중심으로 네 기둥을 세워 지붕을 만들고, 나무로 벽을 만들며, 방위별로 그림을 그려 붙이는 등의 작업을 한다. 작업을 마치면 돗자리와 평상, 대자리, 욕석(褥席) 등을 펼쳐 놓는다. 성빈 당일에는 찬궁을 소관의(小棺衣)로 덮은 뒤 기름먹인 종이로 여러 겹 덮고 생초로 묶어 매듭을 지어 평상 위에 놓는다. 그 다음에 대관의(大棺衣)를 덮고 동쪽 벽을 들어 막고 못을 박는다. 끝나면 휘장을 설치하고 영좌(靈座)를 찬궁의 남쪽에 설치하며, 다시 휘장을 두고 그 안에 영침(靈寢)을 설치한다. 아울러 평상(平牀), 욕석, 병풍, 베개, 옷, 이불 및 고명안(顧命案) 등을 둔다.
변천
조선시대 왕의 사망은 1408년(태종 8) 5월 24일에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사망이 처음이었다. 이때 태종은 25일에 소렴을 하고, 다음 날 대렴을 행한 후 빈소를 후별실청(後別室廳)에 두었다. 1419년(세종 1) 9월 26일 정종이 사망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사망 다음 날에 소렴을, 그 다음 날에 대렴을 시행하였다. 이때 빈소가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왕의 사망 3일째에 대렴을 하고 빈소를 마련하는 방식은 1420년(세종 2) 7월 20일에 태종비 원경왕후(元敬王后)가 사망했을 때부터 바뀌었다. 원경왕후의 소렴은 2일 후인 12일에, 대렴은 13일에 행해졌고, 대렴이 시행된 당일 빈전이 명빈전(明嬪殿)에 마련된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은 1422년(세종 4) 5월 10일 태종이 사망하자 3일째인 12일 소렴이 행해지고, 2일 후에 빈소가 수강궁(壽康宮)에 마련됨으로써 5일째에 성빈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세종실록』 「오례」에는 사망 후 3일째에 소렴을, 5일째에 대렴을 행하고 대렴과 같을 날 성빈을 하는 것으로 규정되었고, 이것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그대로 수록됨으로써 조선시대 전체의 규범으로 작용하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규정이 반드시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1450년(세종 32) 2월 17일 세종이 사망했을 때 6일째인 22일 빈전이 마련되어 하루가 더 늘어났고, 문종은 사망 3일째에 빈전이 마련되는 등 상황에 따라 일정한 변화가 있었다. 그렇지만 예종대 다시 세조의 빈전이 사망 5일째에 마련됨으로써 일반적으로 5일째에 빈소를 마련하는 규범은 대체적으로 준수되었다.
의의
선왕 혹은 선왕비의 사망 후 시행되는 흉례의 초기 과정에서 성빈은 중요한 의례의 단계이다. 즉 초상이 난 지 5일이 지난 뒤에 시행되는 성빈의 과정을 거친 이후에야 사왕(嗣王)은 비로소 상복을 입고 상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아울러 다음 날 즉위식을 거행하여 자신이 선왕의 뒤를 이은 정통의 군주임을 내외에 알릴 수 있었다. 따라서 성빈은 의례상으로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단계로 파악될 수 있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춘관통고(春官通考)』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이범직, 『한국중세 예사상연구』, 일조각, 1991.
- 지두환, 『조선전기 의례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4.
- 이범직, 「조선시대 왕릉의 조성 및 그 문헌」, 『한국사상과 문화』3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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