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연(下馬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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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외국의 사신이 도착한 직후 여행길의 노고를 위로하며 열어 주던 연회.

개설

먼 길을 온 손님에 대한 위로의 차원에서 열리던 하마연은 고대로부터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도 개국 직후부터 중국·일본·야인의 사신을 대상으로 행해졌고, 조선의 사신이 중국이나 일본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로 대접을 받았다. 연회 장소는 사신의 숙소였고, 도착 당일 또는 다음 날 열었다. 최초의 공식 연회로 가장 중시되었다.

연원 및 변천

하마연은 조선 개국 직후부터 실시되었다. 대체로 왕이 직접 참석하였으나, 세자·왕자·의정부 등이 대신하기도 하였으며, 상왕(上王)과 함께 하는 경우도 있었다. 황제가 사망하거나 국기일(國忌日)인 경우는 날짜를 조정하였다. 영접에 불만이 있는 경우 사신이 하마연 자체를 거부하기도 하였고, 병이 났을 경우에는 사신이 참석을 못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좌석 배치나 여악(女樂) 등의 문제로 사신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의주로 피난하였을 때는 임시로 용만관(龍灣館)에서 하마연을 거행하였고(『선조실록』 25년 9월 1일), 구원군을 거느리고 오는 여러 장수들 각각에게 간단한 하마연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태평관이 파괴됨에 따라 이후 사신의 숙소와 하마연 장소가 남별궁(南別宮)으로 바뀌었다(『선조실록』 28년 4월 29일).

하마연은 여러 행사들을 거치고 나면 늦은 저녁에 시작되어 새벽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1610년(광해군 2)에는 사신이 다음 날로 연회를 미루어 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으나, 왕은 200년 동안 내려온 전통이라고 거부하여 결국 당일 실시하였다(『광해군일기』 2년 7월 7일). 그러나 이후 점차 다음 날 시행하는 것으로 바뀌어 갔다(『광해군일기』 4년 8월 5일)(『영조실록』 14년 2월 23일).

인조대 이후에는 청(淸)이북경으로 진입하여 자리를 잡은 후 사신에 대한 접대 절차를 간소화되었다. 조선에서도 반청(反淸) 분위기가 고조되었기 때문에 하마연은 주로 대신 등을 보내 거행하고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때만 왕이 주관하였다(『숙종실록』 8년 2월 23일).

절차 및 내용

중국 사신에 대해서는 왕이 직접 대접하는 것이 원칙이며, 부득이한 사정이 있을 경우에는 세자나 왕자·대신이 대신하였다. 일본과 야인의 사신에 대해서는 예조가 담당하였다. 중국 사신의 경우, 왕이 교외의 모화관(慕華館)에 나가서 사신을 맞아 궁궐로 와서 황제의 명령을 전달받는 등 의식을 거행한 후, 사신이 숙소로 나가면 그곳에서 실시하였다. 많은 공식 연회 중 하마연은 도착 직후에 열리는 최초의 연회인 만큼 이후의 절차에 주는 영향이 커서 중시되고 규모도 컸다. 연회는 절차는 시대에 따라 달랐다.

『세종실록』 오례(五禮)에 규정된 조선초기 연회의 절차는 다음과 같다. 도착 당일 영접도감 등의 관원이 태평관에 좌석을 배치한 후, 왕이 도착하여 편전(便殿)에서 대기하다가 중문 밖에서 마중 나온 사신과 함께 수행원들과 들어와 착석한다. 먼저 차(茶)와 과일 등을 대접하고, 이어서 음악이 시작되며, 술과 과일을 돌린 후, 음식상과 꽃이 뒤를 이어 차례로 올려진다. 이 과정에서 왕이 먼저 정사와 부사에게 차와 술을 대접한 후 사신이 답례한다. 다음으로 왕세자가 술을 올리고 나면 소선(小膳)을 올리고, 다음으로 종친이 술을 올리고 탕(湯)을 올린 후 술이 일곱 순배 돌고 과일을 올린 후 마지막으로 술을 형식상 한 번 돌린다. 왕이 나가면 사신이 중문 밖까지 전송하고, 왕은 궁궐로 돌아온다[『세종실록』 오례 빈례(賓禮)연조정사의(宴朝廷使儀)].

조선후기의 절차는 『통문관지』에 잘 정리되어 있다. 도착한 다음 날 예빈시(禮賓寺) 등에서 연회를 준비한 후, 왕이 도착하여 어실(御室)에서 대기하다가 연회 장소의 계단 아래에서 사신과 만나 올라가 마주 보고 두 번 절하고 착석한다. 먼저 음악이 연주되는 속에서 다례(茶禮)를 하고 나면, 음식상과 꽃·휘건(揮巾)· 염수(鹽水)·소선 등을 바치고 나서 춤을 시작한다. 다음으로 술을 올리기 시작하는데, 술은 제조(提調) 등이 사신과 왕에게 동시에 올리며, 서로 읍하고 마신다. 첫 잔을 마신 후 고기와 만두를 바치고, 두 잔을 마신 후 탕과 첫 번째 안주[初味]를 바친다. 술을 마시는 도중에 매 잔이 올려질 때마다 음악과 춤이 계속 바뀌고 안주가 올라간다. 술이 8순배(여덟 순배) 돈 후 탕과 7미(味)까지 올리고 나면 완배례(完盃禮)로 9번째(아홉 번째) 술을 돌리고 음악을 그친다. 왕과 사신이 서로 읍하고 잔치를 마친다.

관례적으로 잔치가 끝나고 나면 사신과 수행원들에게 많은 물품을 선사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통문관지(通文館志)』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영접도감연향색의궤(迎接都監宴享色儀軌)』
  • 金尙寶·李盛雨, 「朝鮮王朝의 迎接都監 宴享色儀軌에 관한 分析的 硏究」, 『韓國食文化學會誌』 7-1,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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