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례(儺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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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서 음력 섣달 그믐날에 궁중과 지방 관아에서 묵은해의 잡귀를 몰아내기 위하여 벌이던 구나의식(驅儺儀式)이나 벽사구복(僻邪求福)의 전반적인 의식, 또는 그러한 의식들에서 행해지는 창우희(倡優戱), 나례희(儺禮戱) 등으로 불리는 백희가무(百戱歌舞).

개설

궁중에서 음력 섣달그믐에 묵은해의 잡귀를 몰아내기 위하여 벌였던 나례(儺禮)는 어느 시기에 중국에서 들어왔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고려사』에 대나(大儺) 관련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부터는 궁중에서 나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시대로 이어져 행해졌다.

연원 및 변천

나례는 구나, 대나, 나희라고도 한다. 고려 예종대의 대나 관련 기록을 통해 고려시대에는 궁중 나례가 관인(官人)에 의하여 주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창우(倡優), 잡기인(雜技人), 환관(宦官), 유기(遊妓)까지 동원되었고, 역귀를 쫓는 나례 의식 외에 이들에 의한 백희가무로 나희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제석(除夕)의 벽사구복의 의식 외에 임금이 부묘의(祔廟儀)나 여타의 일로 출궁하고 환궁할 때, 그리고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칙사연(勅使宴)에서 나례가 행해졌다. 벽사 의식으로서의 나례는 12지신 모양의 탈을 쓴 진자(侲子)와 악공이 등장한 데 비해, 부묘의나 칙사연에서의 나례는 산대(山臺)를 세우고 채붕(彩棚)을 친 후 잡기가 공연되었기에 나례는 산대희와 통용되었다.

양란 이후 나례의 규모는 축소되었다. 정조대 이후에는 공식적인 나례희는 없어지게 되었고, 지방 관아에서만 남아서 행해질 뿐이었다.

절차 및 내용

조선시대에 궁중에서 행했던 나례는 크게 세 가지이다. 제석에 벽사구복의 의식으로 행해졌던 나례, 임금이 부묘의를 마치고 환궁할 때의 나례, 그리고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칙사연으로 행해졌던 나례가 그것이다.

먼저, 궁중에서 제석에 행했던 나례는 『악학궤범』 권5의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에서 살펴볼 수 있으며,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12월 그믐 하루 전날 5경 초에 악사가 여기(女妓)와 악공을 거느리고 대궐에서 음악을 연주한다. 황금빛 네 눈이 달린 커다란 가면을 쓴 방상시[方相氏] 4인이 잡귀를 몰아내는 구나 의식을 행한 후에, 처용무를 두 번 춘다. 첫 번째는 학과 연화대, 회무가 없이 처용무만 추며, 여기가 처용가를 부른다. 그리고 두 번째에는 학과 연화대의 의물 등 제구(諸具)를 갖추어 진설한 후 학연화대처용무를 함께 춘다. 이후 모든 여기가 미타찬(彌陀讚)과 본사찬(本師讚), 관음찬(觀音讚)을 부른다.

다음으로 부묘 의식에서 행해졌던 나례를 살펴보면, 우선 부묘는 선왕·비가 승하하고 삼년상을 치른 후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의식을 말한다. 『국조오례의』에 “부묘하고 환궁할 때에는 의금부와 군기시에서 나례를 올리고 기로(耆老)와 유생과 교방이 각각 가요를 올리며, 가항(街巷)에서는 결채(結彩)하고 대궐문 밖 좌우에는 채붕을 설치한다.”고 하여, 부묘의 때 나례를 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절차는 『단종실록』의 단종 2년 7월 16일 기사에 나온다.

이날의 기록은 단종이 종묘에서 부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을 묘사한 것으로, 관복을 갖춘 단종의 가마 앞뒤로 고취악대를 세워 고취(鼓吹)를 연주하게 하고, 행렬에 앞서 산대와 채붕에서 잡희(雜戲)를 설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가마가 혜정교에 이르면, 교방 여기들이 침향산과 교방가요를 아뢰고, 광화문에 이르러서는 좌우의 채붕에서 잡희를 열었다. 그리고 근정전으로 들어와서도 백희가무를 설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중국 사신을 맞이할 때에도 나례희가 행해졌다. 중국 사신의 행차가 의주에서 서울로 오는 길목인 평양과 개성에서 산대희를 행했는데, 이때 행사를 주관한 기관은 나례도감(儺禮都監)이다. 그리고 『세조실록』에 “지금 명(明)나라 사신을 맞이할 때에 산대나례(山臺儺禮)는 옛날 그대로 하게 하되, 만약 날짜가 임박하여 갑자기 준비하기가 어려운 형편이거든 다만 채붕·나례만을 베풀도록 하라.”는 기록으로 보아((『세조실록』 5년 3월 22일)),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행사에 나례희, 혹은 산대희가 설행된 것은 조선전기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례도감은 나례에 관한 제반 업무를 맡아보는 관청으로 나례가 있을 때 임시로 유지하는 기관이다. 1626년(인조 4)에 편찬된 『나례등록』을 통해 보면, 칙사 도착 3개월 전부터 업무를 시작하였으며, “이번 중국 사신이 올 때 지난해의 예에 따라 다만 나례의 윤거, 잡상만을 배설할 것을 좌우 나례청에 분부하여 시행하오되 영조문 등 여러 곳에 결채하고 가로에 향분을 놓는 일은 전례에 따라 마련하여 거행함이 어떠한지 계하였는데, 계한대로 시행하라 하신 첩정이라 하였기에 나례청의 윤거, 잡상 등 물품을 한결같이 지난해 책봉 사신 때의 예에 따라 충분히 참작해서 대략 마련하되 후록대로 시행함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한 것으로 보아 대체로 지난해의 예에 따라 일을 처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국 사신 행렬의 좌우에 산대를 설치하였으며, 각 도에서 재인이나 희자(戱子) 등을 상송시키고, 재원을 확보하여 올려 보내도록 각 도에 이문(移文)하였다.

『문종실록』에는 칙사 나례에서 벌였던 나희의 예가 보인다. 즉, 광대(廣大)·서인(西人)·주질(注叱)·농령(弄鈴)·근두(斤頭) 등과 같은 규식(規式)이 있는 유희와 수척(水尺) ·승광대(僧廣大) 등과 같은 웃고 희학하는 놀이로 나뉘는데, 커다란 가면을 쓰고 하는 광대놀이와 주질, 또는 주지라고도 하는 사자탈놀이는 악귀를 물리치는 의미로 가면을 쓰고 공연을 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6월 10일). 그리고 신라 최치원의 시 「향악잡영」에 나오는 농환(弄丸)과 같이 공이나 구슬을 가지고 부리는 재주, 물구나무를 서거나 공중제비를 도는 등의 근두와 같은 놀이와 재주, 그리고 말로 사람들을 웃기는 소학지희(笑謔之戱)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광해군일기』의 기록에 “나례를 할 때 음악 연주와 희극은 전적으로 광대들이 맡아 하는 일이기 때문에, 종묘에 고하는 중대한 예식 날짜를 이달 9월 16일로 잡은 뒤에, 각도의 재인들을 기일 전에 올려 보내도록 하는 일을 파발마를 보내면서까지 독촉하였습니다. 그런데 세 차례 의례 연습 날이 이제 하루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상색재인(上色才人)이 올라오지 않고 있으니, 이번 중대한 예의 일의 체모가 형편이 없습니다. 전라도, 공홍도, 경상도, 황연도 등의 관찰사들을 모두 감찰하소서. 그리고 올라온 재인들 가운데 상색재인은 없지만 의식을 거행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광해군일기』 11년 9월 12일) 나례를 거행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칙사연에서의 나례는 점차 그 폐해가 커졌으며, 정조대부터는 칙사를 위한 나례를 행하지 않았다.

한편 제석의 구나 의식은 민간으로 확대되어 지방의 관아에서도 시행되었는데, 이때 각 지방의 창우나 광대의 자식들이 진자가 되어 구나희를 행하였다.

또한 임금의 어가나 칙사의 행렬에 설치되었던 나례를 위해 지방의 재인과 창우들이 상경하여 연희를 하였는데, 18~19세기의 문서인 「경기도창재도청안(京畿道唱才都廳案)」·「갑신완문(甲申完文)」·「팔도재인등장(八道才人等狀)」을 보면, 지방의 창우들이 칙사 행렬에 좌우 산대를 설치하여 연희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악학궤범(樂學軌範)』
  • 『나례등록(儺禮謄錄)』
  • 노동은, 『한국근대음악사 1』, 한길사, 1995.
  • 이두현, 『한국의 가면극』, 일지사, 1979.
  • 이혜구 역주, 『신역 악학궤범』, 국립국악원, 2000.
  • 赤松智城 · 秋葉隆 공저, 심우성 옮김, 『『朝鮮巫俗의 硏究』 下』, 동문선, 1991.
  • 조원경, 「인조시대의 나례등록」, 『향토서울』 4,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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