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일식의(救日食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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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일식을 구제하기 위해 행하는 의례.

개설

일식은 태양이 달에 의해 일시적으로 가려지는 자연현상이지만, 근대 이전에는 천재지변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왕은 일식 현상이 사라질 때까지, 공구수성(恐懼修省) 즉, 두려워하며 수양하고 반성하는 의미로 소복(素服)을 입고 신하들과 함께 기도하는 구일식의를 행하였다.

연원 및 변천

『고려사(高麗史)』「예지(禮志)」에 구일식의와 구월식의(救月食儀)의 의주(儀註)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이미 구일식의가 거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경우 『세종실록』 「오례」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두 의례의 의주가 정리되어 있는데, 양자의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영조대에 편찬된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서는 친림구일식의(親臨救日食儀)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지방관이 구일식하는 의례도 왕의 구일식의를 준용하였다. 밤에 발생하는 일식에는 구일식의를 시행하지 않았는데, 하늘이 흐려 보이지 않는 경우에는 시행 여부를 두고 논란이 있기도 하였다(『성종실록』 6년 9월 1일). 영조대에는 왕과 시신(侍臣) 모두 천담복(淺淡服)을 입고 구일식의를 거행하였다.

절차 및 내용

『세종실록』 「오례」를 기준으로 구일식의의 절차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행사 당일 액정서(掖庭署)에서 왕의 욕위(褥位)와 향안(香案)근정전(勤政殿) 섬돌 위에 설치한다. 전악서(典樂署)전악(典樂)이 청색·적색·백색의 북[鼓] 3개를 방위에 맞춰 섬돌 위에 두고, 병조(兵曹) 정랑(正郎)은 청색·적색·백색의 휘(麾) 3개를 고(鼓) 안에 진열하고, 모(矛)·극(戟)·월(鉞)의 병기(兵器) 3개를 고(鼓) 밖에 진열한다. 전의(典儀)는 시신(侍臣)의 자리를 전정(殿庭)의 동쪽·서쪽에 배치한다.

일식 시작 5각(刻) 전에 병조는 시위하는 군사를 배열하고, 시신(侍臣)은 소복(素服)을 입고 근정문(勤政門) 밖에 나아가 평상시와 같이 선다. 1각은 15분이다.

일식 시작 3각 전에 호위하는 관원과 사금(司禁)은 무기와 복장을 갖추고 사정전(思政殿)합문(閤門) 밖에 나아가 하늘을 살핀다. 판통례(判通禮)가 중엄(中嚴)을 왕에게 아뢰면, 왕이 소복을 입고 자리에 나온다.

일식 시작 1각 전에 봉례랑(奉禮郞)이 시신들을 인도하여 자리에 나아가다. 판통례가 바깥의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왕에게 아뢰면 왕이 여(輿)를 타고 나아간다. 욕위에 이르면 해를 향하여 꿇어앉는다.

서운관(書雲觀)에서 변고가 있음을 알리면, 사향(司香)은 향을 피우고 전악은 북을 치는데 일식이 종료되면 멈춘다.

판통례가 어좌 앞에 나아가 내전(內殿)으로 돌아갈 것을 왕에게 아뢰면 왕은 여를 타고 돌아간다. 봉례랑이 시신들을 인도하여 나간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