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묘(祔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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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삼년상을 마친 왕이나 왕비의 신주를 종묘로 옮겨 모시는 일.

개설

부태묘(祔太廟)라고도 하는 부묘(祔廟)의 부(祔)는 ‘합사(合祀)를 한다’는 뜻이다. 임금의 조종(祖宗)을 모신 사당은 태묘(太廟) 또는 대묘(大廟)라고도 하는데, 곧 종묘를 가리킨다. 고동가제(告動駕祭)는 삼년상이 끝난 뒤 왕의 신주를 태묘에 모시기 위해 신주의 수레를 인발(引發)할 때 올리는 고유제(告由祭)이다. 태묘에는 공신을 배향하는데, 이 경우는 부제(祔祭)한다고 한다. 사대부들은 졸곡을 지낸 다음날 가묘에 부제를 한다.

연원 및 변천

주희(朱熹)가 『가례』에서 부묘의 연원에 대해 언급한 바를 따르면, 예전의 묘제(廟制)는 태조(太祖)로부터 내려가면서 각각 방을 하나씩 두었는데, 동한(東漢) 명제(明帝) 때에 이르러 감히 스스로 묘를 세우지 못하고 광무묘(光武廟)에 부묘한 이후로 이것이 관례가 되었다고 하였다.

부묘에 관한 논의는 절차상의 간소화와 생략 등에 관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 범위와 자격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28년 7월 5일에 있었던 순종의 부묘의(祔廟儀)에 이르기까지 이 제도가 일관되게 시행되어 옴으로써 현재의 종묘를 이루게 된 것이다.

절차 및 내용

담제(禫祭) 후 길제(吉祭) 때에 부묘를 한다. 길제는 곧 종묘의 시향제(時享祭)이다. 『국조오례의』의 흉례 의식 중 부묘의에 부묘의 절차와 이에 따른 행례(行禮) 방식이 실려 있다. 이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서운관에서 미리 계절을 격(隔)하고 길일을 가려서 예조에 보고하면, 예조에서 계문(啓聞)하고 유사(攸司)에 산고(散告)하여 직책에 따라 준비[供辦]하게 한다. 종묘에는 하루 전에 고하는데, 찬품(饌品)과 행례는 고의(告儀), 즉 상시(常時)에 고하는 의식과 같다. 혼전(魂殿)에 고할 때는 찬품과 행례는 삭망제(朔望祭)의 의식과 같이 한다.

신주가 종묘에 나아가면, 어가(御駕)가 출발할 것을 고한다. 제사를 마치면 섭판사복이 요여(腰輿)를 문밖에 놓는다. 종친 및 문무백관들이 시립위(侍立位)로 나아간다. 차례로 시위하여 종묘의 외문(外門) 밖에 이르면, 여러 향관(享官)들이 각각 조복(朝服)을 갖추고 요여를 맞는다. 대축(大祝)이 신주궤(神主匱)를 받들어 신여(神輿)에 안치한 후 종묘의 남문 밖 악차(幄次) 앞에 이르면 신주궤를 받들어 악좌(幄座)에 안치한다.

신관(晨祼)을 위해 5각(刻) 전에 궁위령(宮闈令)이 그 소속을 거느리고 재실(齋室)을 열고 신악(神幄)을 깨끗이 턴 뒤에 자리[筵]를 펴고 궤(几)를 설치한다. 3각 전에 여러 향관들이 각각 제복을 갖추고 각각 자리로 나아간다. 왕이 나올 때 산선(繖扇)과 시위는 상시(常時)의 의식과 같이 한다. 왕이 규(圭)를 잡은 다음 정문(正門)으로 들어간다. 재랑(齋郞) 등이 신여를 모시고 정문으로 들어가서 부알위(祔謁位)에 이르면 대축이 궤(匱)를 받들어 욕위(褥位)에 안치하고, 궤를 열고 신주를 받들어 내어 부(趺) 위에 놓는다.

신주를 받들어 여(輿)에 안치한 다음 신실(新室)에 이르면 내시가 궤를 받들어 자리[座]에 놓고, 대축이 신주를 받들어 자리에 안치하고 백저건(白紵巾)으로 덮는다. 집사자가 책보(冊寶)를 받들고 들어가서 안(案)에 놓는다. 나머지 강신(降神)·궤식(匱食)·아헌(亞獻)·종헌(終獻)으로부터 칠사(七祀)의 제사, 공신(功臣)의 제향, 음복·망예(望瘞)까지는 모두 시향제의 상의(常儀)와 같다. 거가환궁(車駕還宮)으로 부묘의는 끝난다.

참고문헌

  • 『주자가례(朱子家禮)』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부묘도감도청의궤(祔廟都監都廳儀軌)』
  • 『인조대왕인렬왕후부묘도감의궤(仁祖大王仁烈王后祔廟都監儀軌)』
  • 신명호, 『부묘도감도청의궤 해제』, 한국학중앙연구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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