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실(齋室)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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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재실 |
한글표제 | 재실 |
한자표제 | 齋室 |
상위어 | 제사궁(祭祀宮) |
하위어 | 안향청(安香廳), 어재실(御齋室), 전사청(典祠廳), 정재실(正齋室) |
관련어 | 공묵합(恭黙閤), 도수연(陶遂椽), 사직단(社稷壇), 원묘(園墓), 재궁(齋宮), 제기고(祭器庫), 종묘(宗廟), 집사청(執事廳), 참봉청(參奉廳) |
분야 | 왕실/왕실건축/능·원·묘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신지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재실(齋室)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중종실록』 25년 8월 24일, 『영조실록』 33년 3월 30일, 『정조실록』 즉위년 5월 15일 |
제사를 준비하고,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경건히 하는 공간.
개설
좁은 의미에서 재실은 제사를 주관하는 헌관이 머물고 재계(齋戒)하는 공간이며, 넓게는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고 제물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안향청, 집사청, 전사청, 제기고 등이 이에 포함된다. 종묘와 원단(圓壇)·사직단(社稷壇)·선농단(先農壇) 등의 국가 제례 시설과 왕실의 능(陵)·원(園)·묘(墓)에도 재실을 갖추고 있으며, 궁궐 내에도 빈전과 혼전으로 사용되는 전각의 주변에 재실이 마련되었다.
내용 및 특징
궁궐에서 상장례 의례가 행해지면서 재실은 필요에 따라 형성되었다. 조선후기가 되면서 창경궁 문정전과 환경전 등의 특정 전각에서 상장례를 설행하게 되는 관행이 생겼고, 그 주변으로 상설적인 재실이 등장했다. 궁궐에서 재실로 사용된 공간은 창경궁 명정전의 남행각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곳은 원래 춘추관(春秋館)이 있던 곳이었으나 1530년(중종 25) 이후 문정전이 혼전으로 사용되면서 어재실로 사용되었다(『중종실록』 25년 8월 24일).
환경전의 남행각에 위치한 공묵합(恭默閤)도 재실의 하나이다. 1757년(영조 33)에 인원왕후(仁元王后)의 혼전을 통명전에 설치하고(『영조실록』 33년 3월 30일) 영조가 환경전 남행각을 재실로 사용하면서 공묵합이라 이름 지었다. 1776년(정조 즉위)에는 경희궁의 태녕전(泰寧殿) 곁에 재실을 세우고 편액을 ‘도수연(陶遂椽)’이라 하였다(『정조실록』 즉위년 5월 15일). 이는 영조가 공묵합이라 편액을 붙인 것을 전례로 하였다. 당시 태녕전에 영조의 혼전이 마련되었기 때문에 혼전에 제사를 지낼 때 재실로 사용하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왕과 왕후, 세자와 세자빈 등의 시신을 안치하고 제례를 지내는 능원에는 장례를 치르고 이후에 제례를 올리며, 산릉을 관리하기 위한 성격의 재실이 조성되었다. 능원의 재실은 성격에 따라 가재실(假齋室)과 정재실(正齋室)로 나뉜다.
가재실은 산릉에서 장례 의례가 행해지는 시점부터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제례의 준비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삼년상 기간 동안 산릉에서 제례를 주관하는 수릉관과 시릉관이 머물고 제물을 만드는 여러 장인들의 작업 공간이 마련되어야 했기 때문에 그 규모는 90여 칸이 넘었다. 규모는 매우 크지만 사용하는 기간은 17개월가량 되므로 가가(假家)의 형태로 조성하여 크게 공역과 물자를 들여 건축하지 않았으며, 쉽게 철거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지반을 다지거나 초석을 놓거나 지붕에 기와를 올리는 등의 일을 하지 않고, 초석 없이 굴립주로 기둥을 세우고 지붕은 초가를 올렸으며 구조도 단순하게 건축하였다.
가재실의 내부 공간에는 수릉관과 시릉관의 입접처·참봉방·진지내관방·충의방 등 관원의 숙소가 되는 공간이 있었다. 제물숙설 공간과 수라간·감선청·공상봉상청 등의 제물을 만들고 관리하는 공간도 있었으며, 반감(飯監)·적색(炙色)·증색(蒸色)·반공(飯工)·병공(餠工)·면색(面色)·포모(泡母) 등의 음식을 만드는 장인의 공간이 갖추어져 있었다.
반면 재실은 상례를 마치고 신주가 종묘에 부묘된 이후 산릉에서 길제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길제는 설, 대보름, 한식, 단오, 추석, 중양, 동지 등의 절기와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제례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재실은 산릉에서 상례가 끝난 후 산릉을 관리하는 참봉(參奉)이 머물면서 제례를 담당하고 능역을 관리하는 곳이다. 과거에는 재실을 참봉청이라 부르기도 했다. 재실의 공간은 향과 축문을 준비하고 봉안하는 안향청이 있으며, 제례를 준비하는 주관자가 머무는 집사청이 있다. 산릉을 지키는 참봉의 숙소가 되는 참봉청, 제물을 숙설하는 전사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그 외에 방앗간과 마구가 부속 공간으로 마련되었다.
현재 산릉의 재실 가운데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사례는 여주에 있는 효종영릉(寧陵)의 재실이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
변천
산릉의 재실은 조선전기부터 꾸준히 건축되어 왔으며, 서서히 그 형식이 정립되어 19세기에는 일정한 형식과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조선초기에는 산릉에 재궁(齋宮)이라 하여 능소 가까운 곳에 산릉을 관리하기 위한 건물을 짓고 제례를 준비하였다. 재궁은 능원에 묻힌 사람의 명복을 빌고 불교적 제례를 주관하기도 하여 산릉에 소속된 사찰의 형태를 띠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차 불교적인 제례를 배제하면서, 산릉을 관리하고 제례를 준비하는 참봉과 집사자를 위한 공간으로 변화하였다.
상장례 기간에 사용되는 가재실은 규모가 90여 칸에 이르지만 사용하는 기간이 22개월 이내로 짧기 때문에 그 규모를 축소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1674년(숙종 즉위) 현종의 숭릉(崇陵)을 조성하면서 가재실의 규모를 축소하기 위해 재실의 일부 공간을 사용하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가재실을 사용하는 3년 동안 재실은 비어 있다가 가재실의 기능이 끝난 후에 재실이 사용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때 가재실에서 가장 많은 공간을 차지하며 공간의 위계가 높은 수릉관과 시릉관의 처소로 재실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가재실을 90여 칸 규모에서 50여 칸으로 줄여 조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산릉을 처음 조성할 경우에만 적용할 수 있었다. 이미 조성된 능에 합장될 경우에는, 재실이 미리 부묘된 신주의 길례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재실의 공간을 상장례 기간에 사용할 수 없었다. 따라서 나중에 합장될 경우는 가재실을 기존과 같이 90여 칸으로 건축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1800년(순조 즉위)에 조성된 정조의 건릉(健陵)과 1805년(순조 5)에 조성된 정순왕후(貞純王后) 원릉(元陵)의 가재실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정순왕후]원릉산릉도감의궤([貞純王后]元陵山陵都監儀軌)』
- 『[정조]건릉산릉도감의궤([正祖]健陵山陵都監儀軌)』
- 『현종숭릉산릉도감의궤(顯宗崇陵山陵都監儀軌)』
- 신지혜, 「조선 숙종대 왕실 상장례 설행공간의 건축특성: 빈전·산릉·혼전을 대상으로」,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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