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원(安宗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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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24년(축숭왕 11)∼1394년(태조 3) = 71세]. 고려 말 공민왕(恭愍王)~조선 초 태조(太祖) 때의 문신. 문하부(門下府) 찬성사(贊成事)와 집현전(集賢殿)대학사(大學士) 등을 지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고, 자는 사청(嗣淸)이며, 호는 쌍청당(雙淸堂)이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아버지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문정공(文貞公)안축(安軸)이고, 어머니 감천 문씨(甘泉文氏)는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문구(文龜)의 딸이다.

고려 시대 활동

1341년(충혜왕 2) 진사시(進士試) 2등에 합격하고, 같은 해에 문과(文科) 을과(乙科)에 합격하였다.[『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 급제 후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서 검열(檢閱)과 공봉(供奉)이 되었다. 관직의 임기가 차서 천직(遷職)하게 되었는데, 동료 심동로(沈東老)의 나이가 많아 그에게 양보하였다.[『태조실록(太祖實錄)』태조 3년 3월 24일] 1년 뒤에 삼사(三司)도사(都事)에 임명되었고, 공민왕(恭愍王) 초에 전법정랑(典法正郞)이 되었다. 1361년(공민왕 10) 조산대부(朝散大夫) 시어사(侍御史)를 거쳐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로 있을 때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해 내려온 공민왕을 충주(忠州)에서 맞았다. 왕이 다시 음죽(陰竹)으로 옮겼는데 관리와 백성들은 이미 도망을 갔다. 이때 안종원과 안무사허강(許綱)이 음식과 장막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하여 공민왕이 그들을 문책하였는데 유숙(柳淑)의 구원으로 죽음은 면하고, 안종원은 청풍군지사(淸風郡知事)로 좌천되었다.[『태조실록』태조 3년 3월 24일,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공민왕 10년 11월] 1364년(공민왕 13) 전법총랑(典法摠郞)으로 다시 승진하였다. 그 무렵 신돈(辛旽)에게 아부하는 사대부가 많았으나 안종원은 이를 거부하였고, 이로 인해 강릉부사(江陵府使)로 좌천되었다.[『태조실록』태조 3년 3월 24일] 그 후 관직에서 물러나 7∼8년을 한가로이 지냈다.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주살된 후 사헌시사(司憲侍史)에 임명되었고, 좌사의(左司議)와 우상시(右常侍)를 거쳐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태조실록』태조 3년 3월 24일] 1374년(공민왕 23) 우왕(禑王)이 10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글을 올려 환관의 폐단을 논하였으나 재상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려사절요』 공민왕 23년 11월] 이후 밀직사(密直司) 제학(提學)을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으며 대사헌을 겸직하였다.[『태조실록』태조 3년 3월 24일] 1376년(우왕 2) 명(明)나라에 가는 사신들이 사행(使行)을 기회로 금·은·말 또는 포목(布木)을 밀반출해 장사하는 것을 엄금하도록 건의하였다.[『동사강목(東史綱目)』 제16상(上) 우6년 12월] 1382년(우왕 8) 순흥군(順興君)으로 책봉되었고 다시 공신호(功臣號)를 받았으며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이 해에 동당시(東堂試)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유양(柳亮) 등 33인을 뽑았다.[『태조실록』태조 3년 3월 24일] 1389년 6월 문하부(門下府) 찬성사(贊成事)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달 명나라 남경에 사신으로 가서 성절(聖節)을 하례하였다.[『고려사절요』 공양왕 원년 6월] 1391년(공양왕 3)에 삼중대광(三重大匡)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에 봉해졌다.

조선 시대 활동

1392년(태조 1) 특진보국숭록대부(特進輔國崇祿大夫) 영삼사사(領三司事) 집현전(集賢殿)대학사(大學士)가 되었다. 이 해에 태조가 계룡산(鷄龍山)의 지세(地勢)를 친히 살펴 도읍을 정하고자 하였는데, 김사형(金士衡), 이지란(李之蘭), 남은(南誾) 등과 함께 어가를 따라갔다.[『태조실록』태조 2년 1월 10일] 1393년(태조 2) 7월에는 개국 당시 공을 인정받아 포상을 받았고, 다음 달인 8월에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경성수축도감(京城修築都監) 판사(判事)인 안종원, 홍영통(洪永通) 등에게 왕륜사(王輪寺)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으며, 그 해 9월 문하부 판사가 되었다.[『태조실록』태조 2년 7월 22일, 태조 2년 8월 18일, 태조 2년 9월 13일] 1394년(태조 3) 2월 안종원은 봉명사신(奉命使臣 : 특별히 임금의 명령을 받고 외국으로 가는 사신)으로 중국에 가게 되었는데, 연산참(連山站)에서 요동도사(遼東都司)가 황제의 분부라며 막는 바람에 돌아왔다.[『태조실록』태조 3년 1월 6일, 태조 3년 3월 7일, 태조 3년 6월 7일, 태조 3년 8월 8일]

그러다가 병이 들어 그 해 3월 24일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1세였다. 부음을 듣고 태조가 매우 슬퍼하여 조회를 파하였다.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평양백(平壤伯)조준(趙浚)을 보내어 교서(敎書)를 가지고 가서 빈소에 치전(致奠)하고 부의를 많이 하였다. 봉상시(奉常寺)에서 시호를 문간(文簡)이라고 하였다.[『태조실록』태조 3년 3월 24일] 담당관이 의식(儀式)과 호위(護衛)를 갖추어 5월에 경기도 임진현(臨津縣) 서국동(瑞國洞)에 장사하였다.[『동문선(東文選)』 권120 「유명조선국시호문간공안공묘비명병서(有明朝鮮國諡號文簡公安公墓碑銘幷序)」이하 「안종원 묘비명」이라 약칭]

성품과 일화

안종원의 집안은 아버지 안축과 그 형제들인 안보(安輔)와 안집(安輯) 삼형제가 등과(登科)하였고,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안경온(安景溫)과 안경량(安景良), 안경공(安景恭)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기 때문에 당시 많은 사람들의 존숭을 받았다. 이색(李穡)은 순흥 안씨 집안의 화려한 명성을 ‘죽성의 풍도와 운치 우리 동방에 가득한데(竹城風韻滿東方), 옥순이 또 벌여 서서 화려한 집을 비추누나(玉笋森森映畫堂).’ 라고 읊기도 하였다.[『목은고(牧隱藁)』 권29 「목은시고(牧隱詩藁)」] 안종원과 이색은 1341년(충혜왕 2) 진사시에 함께 합격한 인연으로 깊은 교류를 나누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색은 안종원을 “조정에 서면 상서로운 기린이요 위의(威儀)있는 봉황과도 같았으며,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면 장성(長城)이요 적국(敵國)과도 같았는데, 부친의 풍도를 이어받았으면서도 온화하게 포용하는 면에서는 오히려 나은 점이 있었다.”라고 기록하였다.[『동문선』 권87 「송양광도안렴사안시어시서(送楊廣道按廉使安侍御詩序)」]

그의 인품에 대한 일화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고려 공민왕대 신돈이 정권을 잡아 휘두르자 사대부들이 다투어 그에게 아부하였다. 어떤 집정자(執政者)가 말하기를, “우리가 영상(領相)에게 추천하면 간관(諫官) 자리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속히 신돈을 찾아가 만나 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에 안종원이 거절하며, “나는 본래 게으르고 거칠어서 권세에 아부할 줄 모른다.”고 하였다. 집정자가 부끄러워하고는 도리어 안종원을 참소하여 강릉부사로 나가게 하였으나, 그는 그곳에서 백성에게 공덕을 베풀어 그곳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고 제사지냈다고 한다.[『죽계지(竹溪志)』 권1 「문정공전(文貞公傳)」]

또한 그의 성품에 대해서는 “자상하고 말이 적었으며, 거처하는 정자(亭子)를 칭호하여 쌍청정(雙淸亭)이라 하였다. 사람을 접대하기를 공손하게 하고, 세상의 형편대로 따라 하여 그 몸을 보전하였다. 그러나 일을 감당하는 데 서툴러 이르는 곳마다 한 일이 없었다.”라고 평가하였다.[『태조실록』태조 3년 3월 24일] 아울러 “손님이 오면 술자리를 베풀었으나 성찬과 사치를 숭상하지 않고 오직 예로써 흐뭇한 자리가 되게 할 뿐이었다.”라고 한 평가도 있다.[『죽계지』 권1 「문정공전」] 권근(權近)은 안종원에 대해서 “타고난 자질이 대범하고 중후하며, 풍채와 신수가 맑고 밝았다. 몸가짐을 신중하게 하고 관직에 있어서는 부지런하게 하였다. 집에 있어서는 이익을 말하지 아니하며, 일에 당면하여서는 침착하고 조용하였다. 일찍이 빠르게 하는 말과 갑자기 당황해 하는 얼굴빛을 짓는 일이 없었으며, 남을 대접하는 말과 갑자기 당황해 하는 얼굴빛을 짓는 일이 없었으며, 남을 대접하는 데는 지위가 높아 갈수록 더욱 겸손하였다. 또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선행이 있는 것은 칭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라고 기술하였다.[「안종원 묘비명」] 또한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태종이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들으니, 사람들이 대부(大夫)라고 일컫는 자는 오직 우현보(禹玄寶)와 안종원 두 사람뿐이었다.” 라고도 하였다.[『태종실록(太宗實錄)』태종 9년 4월 2일]

묘소와 후손

안종원의 묘소는 경기도 임진현(臨津縣) 서국동(瑞國洞)에 조성하였으나, 1401년(태종 1)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문단1리 산183으로 이장하였다가, 2008년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병산리 서창 산21로 옮겼다.

부인 광주 김씨(光州金氏)는 봉익대부(奉翊大夫) 우상시(右常侍)김휘남(金輝南)의 딸이며, 아들 셋이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경혜택주(慶惠宅主)의 봉작을 받았다. 안종원은 부인 광주 김씨와의 사이에서 4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안중온(安中溫)은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제학(密直提學)집현관(集賢館) 제학상호군(上護軍)을 지냈고, 2남 안경량(安景良)은 자헌대부(資憲大夫)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중추원(中樞院)동지사(同知事)를 지냈다. 3남 안경공(安景恭)은 추충익대개국공신(推忠翊戴開國功臣) 자헌대부(資憲大夫)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졌으며, 4남 안경검(安景儉)은 가선대부(嘉善大夫)공조 전서(典書)를 지냈다. 딸은 유후(柳厚)에게 시집갔다.[「안종원 묘비명」]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태조실록(太祖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목은고(牧隱藁)』
  • 『삼봉집(三峯集)』
  • 『양촌집(陽村集)』
  • 『기우집(騎牛集)』
  • 『근재집(謹齋集)』
  • 『동문선(東文選)』
  • 『등과록 전편(登科錄前編)』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순흥안씨족보(順興安氏族譜)』
  • 『여지도서(輿地圖書)』
  • 『동사강목(東史綱目)』
  • 『쌍매당협장집(雙梅堂篋藏集)』
  • 『기년편고(紀年便攷)』
  •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 『동사략(東史約)』
  • 순흥안씨문숙공파 홈페이지 http;//cafe.naver.com/iahn/2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