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亭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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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치가 좋은 곳에 휴식과 모임의 공간으로 세워진, 벽이 없이 기둥과 지붕만 있는 건물.

개설

정자(亭子)는 경관이 수려하고 사방이 터진 곳에 지어져 자연 속에서 풍류를 즐기며 정신을 수양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던 건축물이다. 이규보가 「사륜정기(四輪亭記)」에서 지적하듯 정자는 손님을 접대하고 학문을 토론하며 풍류가 벌어지는 공간이었다.

내용 및 특징

정자는 살림집과 달리 자연을 배경으로 하는 유람이나 휴식 공간으로, 가옥 외에 특별히 지은 건물이다. 때문에 정자는 벽이 없고 기둥과 지붕만 있어 주변 경관을 감상할 수 있게 조성하고 낮은 마루로 형성된 것이 대부분이다. 정자와 비슷한 것으로 누(樓)·대(臺) 등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그 외형이나 기능은 다르다. 누·대는 대부분 장방형으로 규모가 크고 2층으로 되어있지만 정자는 개인을 위한 공간이기 때문에 누·대보다는 규모가 훨씬 작고 평면이 장방형·육각형·팔각형이며 단층이다. 정자는 정각(亭閣) 또는 정사(亭榭)라고도 하는데 사(榭)는 높은 언덕, 혹은 대 위에 건립한 집을 의미한다. 정자의 명칭은 당(堂), 헌(軒), 정(亭) 등으로 불린다.

조선시대 일반적인 정자는 대개 개인이 건축하였지만 그 공간은 여러 사람이 공유하였다. 정자는 해당 지역 선비, 문인들의 휴식처로 제공되었으며, 그들은 거기에서 뜻이 통하는 시우(詩友)들과 모여 풍류를 즐기며 시정(詩情)을 나누었다. 정자는 당면한 정론을 펴며 경세를 논하는 정치의 장이기도 하였고, 학문을 닦고 향리의 자제들을 가르치는 교육과 강학의 공간, 나아가 지역의 지성들이 모여 시우계(詩友契)나 향약계, 의병창의(義兵倡義) 같은 사회·정치적 활동을 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따라서 정자에 대한 조사·연구는 전통시대 지성사와 향촌 사회사의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정자의 건립 연유나 시기, 이곳을 거쳐 간 인물들의 면모, 건물 구조나 위치, 경관 등을 통하여 정자와 관련된 향촌 사회사의 여러 기록 자료와 현장 자료를 수집·정리할 수 있다.

변천

조선전기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정자에 대한 기록은 대개 왕실과 관청의 부속 건물, 종실이나 특정 사대부와 관련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최초의 정자는 태조가 왜구를 물리치기 위하여 서해도 해주(海州)에 가서 관아의 동쪽에 있는 정자에서 여러 장수들과 만났다는 기록에서 나타난다. 이는 관아의 부속 건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정자와 정자 이름이 거론되는 것은 1394년(태조 3)의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안종원(安宗源)의 졸기(卒記)로 그가 거처하는 정자를 쌍청정(雙淸亭)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태조실록』 3년 3월 24일).

태종대에는 창덕궁의 동쪽에 해온정(解慍亭)을 건립했다는 기사가 있으며(『태종실록』 6년 4월 9일), 1459년(세조 5)에는 세조가 마포에 있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이제(李禔)의 새로 지은 정자에 나아가서 어서(御書)로 그 정자의 이름을 ‘영복정(榮福亭)’이라 하였다는 기사가 있다(『세조실록』 5년 6월 1일).

조선후기의 정자 관련 『조선왕조실록』 기사로는 1675년(숙종 1) 비변사에서 오가작통(五家作統) 사목 21조를 만들면서 그 19조에 정자를 봄·가을에 강신(講信)하고, 문학과 무예를 시험하는 장소로 활용하자는 논의가 있다(『숙종실록』 1년 9월 26일).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문집류나 읍지류를 보면 매우 다양한 형태의 정자들이 계속해서 건립되었고, 조선후기에 일반화된 지방 사족들의 정자는 그 성격이 매우 다양하고 종합적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참고문헌

  • 허경진, 『충남 지역 누정 문학 연구』, 태학사, 2000.
  • 김무조·정경주 외 1명, 「조선조 누정 문학 연구(1·2)」, 『한국문학논총』 10, 1989.
  • 박준규, 「한국의 누정고」, 『호남문화연구』 17, 1987.
  • 이해준, 「금강 중류 지역 누정 문화의 성격」, 『향토연구』 31, 2007.
  • 전남대 호남문화연구소, 「전남 지방의 누정 조사 연구」, 『호남문화연구』 14~16, 1985~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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