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만(趙正萬)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8년 1월 9일 (화) 22:52 판 (XML 가져오기)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656년(효종7)∼1739년(영조15) = 84세]. 조선 중기 숙종∼영조 때의 문신. 자는 정이(定而), 자호(自號)는 오재(寤齋)이다. 본관은 임천(林川)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합천군수(陜川郡守)조경망(趙景望)이고, 어머니 진주유씨(晉州柳氏)는 진흥군(晉興君)유식(柳寔)의 딸이다. 예조 참판조희일(趙希逸)의 증손이고, 대사헌(大司憲)조명익(趙明翼)의 아버지이다.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 · 동춘당(同春堂)송준길(宋浚吉)의 문인이고, 김창협(金昌協) · 김창흡(金昌翕) · 이희조(李喜朝) 등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숙종∼경종 시대 활동

1681년(숙종7) 나이 26세 때 진사시(進士試)에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서 수학하였다. 1684년(숙종10) 관학(館學)의 유생(儒生)을 이끌고 숙종에게 상소하여, 남인 윤휴(尹鑴)를 배척하고 송시열을 변호하였다. 당시 송시열은 제자 윤증(尹拯)에게 비방과 모욕을 당하는 상황이었는데도, 아무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으므로, 그가 소수(疏首)가 되어 숙종에게 상소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나중에 소론(少論)의 공박을 받아서 수난을 당하였다.

그러다가 1694년(숙종20) <갑술환국(甲戌換局)> 때 남인이 몰려나고 서인이 집권하자,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다시 왕비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서인 중에서 그가 가장 먼저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에 임명되었다. 이로부터 숙종 후반기에 중외(中外)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내직으로는 공조 낭관(郎官) · 호조 낭관, 제용감(濟用監) 판관(判官) · 군자감(軍資監) 판관, 상의원(尙衣院)첨정(僉正) · 사복시(司僕寺) 첨정, 예빈시(禮賓寺) 정(正) · 장악원(掌樂院) 정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강서현령(江西縣令) · 광산현령(光山縣令), 안악군수(安岳郡守), 청송부사(靑松府使) · 성천부사(成川府使), 나주목사(羅州牧使) · 능주목사(綾州牧使) · 청주목사(淸州牧使) · 양주목사(楊州牧使) · 상주목사(尙州牧使)로 나갔다.

1720년(숙종46) 숙종이 승하하고 경종이 즉위하면서, 노론(老論)소론(少論)의 당쟁도 더욱 치열하였다. 그리하여 1722년(경종2) 소론의 김일경(金一鏡) 등이 <임인옥사(壬寅獄事)>를 일으켜서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 4대신을 죽이고 노론 인사 170여 명을 처형하거나 유배시켰다. 그때 그는 상주목사(尙州牧使)로 있다가 평안도 벽동(碧潼)으로 유배되었는데, 1724년 영변(寧邊)으로 이배(移配)되었다. 그는 괴로운 유배생활을 하면서 날마다 『주역(周易)』의 장귀를 한 줄씩 외우고 산수의 경치를 돌아보고 즐겼는데, 마치 귀양살이가 즐거운 듯이 보였다고 전해진다.

영조 시대 활동

1724년(영조즉위)에 영조가 즉위하자, 그 다음해에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 소환된 후, 선공감(繕工監)부정(副正)을 거쳐 군자감(軍資監)정(正)에 임명되었다. 1726년(영조2) 수원부사(水原府使)로 나갔다가, 이듬해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어서 판결사(判決事)에 임명되었다가, 호조 참의(參議) · 공조 참의를 역임하고, 이어 인조의 장릉(長陵)의 표기(表記)를 써서 바치면서,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다.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1732년(영조8) 호조 참판(參判) 겸(兼) 부총관(副摠管) · 의금부 동지사(同知事)에 임명되었다. 1735년(영조11) 그의 나이가 80세에 이르자, 영조가 특별히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자(陞資)시키고, 돈녕부(敦寧府)지사(知事)에 임명하였다. 1737년(영조13)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공조 판서 ·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고, 이때 그때 형조 판서로서 국가의 중요한 기밀(機密)에 참여하였다. 도감(都監)에서 애쓴 공로로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자하여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에 임명되었다. 영조는 그의 나이가 연로하다며 특별히 우대하고, 여러 번 궁중 음식을 보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비난하는 자가 있으면 노인을 공경할 줄 모른다고 책망하였다. 1739년(영조15) 4월 13일에 노병으로 죽으니, 향년이 84세였다.

그는 특히 시(詩)에 뛰어났는데, 당(唐)나라의 시풍(詩風)을 터득하여, 물이 용솟음치고 바람이 휘몰아치는 듯하였다. 글씨도 해서(楷書)를 잘 썼는데, 필법이 꿋꿋하고 굳세어서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필력(筆力)이 오히려 시들지 않았다.

저서로는 『오재집(寤齋集)』이 있다.

성품과 일화

조정만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용모가 깨끗하고 아름다워 낯빛에 웃음을 띠우면 남들이 호감을 가질 정도였으나, 마음가짐이 소박하고 검소하며, 평소 『소학(小學)』의 가르침대로 자신을 다스렸다.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었는데, 자라면서 재사(才思)가 흘러넘쳐 말을 하면 번번이 남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나고 사실을 깨달아 이해하는 능력이 비범하여 책을 볼 때에는 열 줄을 한꺼번에 읽어 내려갔고, 한번 눈으로 보면 평생 이것을 잊지 않았다. 서책을 몹시 좋아하여 앉아서나 누워서나 책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경사(經史)와 백가(百家)로부터 조정의 전장(典章)이나 국가의 고실(故實)과 계첩(系牒) · 여도(輿圖)에 이르기까지 모두 외우고 있다가, 간혹 묻는 사람이 있으면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젊었을 때 부모의 상을 당하여 너무 슬퍼하다가 그대로 불면증[失睡症]에 걸렸다. 그러나 그는 잠이 오지 않는 시간에 열심히 공부를 하였고, 자연히 정신 또한 청명(淸明)해졌으므로, 자기 호를 ‘오재(寤齋)’라고 지어서 불렀다. 임종(臨終)할 때에도 정신이 흐려지지 않고, 오히려 고서(古書)를 염불 외우듯이 나지막하게 외웠는데 한 군데도 틀린 곳이 없었다.

벼슬이 재추(宰樞)에 오른 뒤에도 더욱 청렴결백한 절조를 지켜서, 의복이나 기물 등도 예전에 쓰던 것을 새 것으로 바꾸지 않고서 말하기를, “사람과 물건이 함께 늙어가는 것이니, 어찌 새 것으로 바꿀 필요가 있는가?”라고 하였다. 또 항상 말하기를, “세간(世間)의 일은 진실로 원만(圓滿)하기가 어려운 것이니, 마땅히 부족한 것을 만족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하였다. 산수(山水)를 좋아하였던 그는 아름다운 경치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번번이 지팡이 하나를 짚고 찾아가 구경하면서 시를 읊으며 집에 돌아가는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표연(飄然)히 진부한 세속에서 벗어나려는 기품이 있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묘소는 인천(仁川) 오봉산(五鳳山)의 언덕에 있는데, 첫째 부인 · 둘째 부인과 함께 합장되었다. 이의현(李宜顯)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 있다. 첫째 부인 풍산홍씨(豐山洪氏)는 참의(參議)홍주국(洪柱國)의 딸이고, 둘째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서령(署令)이진명(李晉命)의 딸이다. 자녀는 모두 4남 5녀를 두었는데, 2남 조명익이 장원 급제하여, 대사헌을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계갑일록(癸甲日錄)』
  • 『문곡집(文谷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제월당집(霽月堂集)』
  • 『농은유고(農隱遺稿)』
  • 『미수기언(眉叟記言)』
  • 『송자대전(宋子大典)』
  • 『수당집(修堂集)』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한수재집(寒水齎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