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옥사(壬寅獄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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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2년(경종 2) 노론 측에서 세 가지 방법을 이용해 경종을 시해하려고 했다는 목호룡의 고변을 계기로 일어난 사건.

개설

임인옥사(壬寅獄事)는 삼수옥(三手獄)이라고도 한다. 1722년 노론 측에서 삼수(三手)를 이용해 경종을 시해하려고 했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告變)을 계기로 일어난 옥사이다. 이 옥사를 계기로 노론 측 사대신인 김창집·이건명·이이명·조태채 등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화를 당하였다. 1740년(영조 16) 경신처분을 계기로 임인옥사는 소론 측에 의한 무고(誣告)로 판정되었다.

역사적 배경

숙종이 승하하고 경종이 즉위한 뒤 노론 측에서는 경종의 나이가 30세가 넘었지만 후사가 없다는 점을 문제 삼아 저사(儲嗣), 즉 후계자를 세울 것을 건의하였고, 왕대비 인원왕후의 승인을 근거로 후일 영조가 되는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였다. 노론 측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왕세제에게 대리청정을 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이는 경종에게 정무를 놓게 하려는 의도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노론 측의 요구에 대해 경종은 승인과 이에 대한 환수를 반복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노론 측에서도 정청(庭請)을 열어 형식적으로 환수를 요청하였으나, 시행에 대한 경종의 의지가 강력하자 소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청을 폐지하고 연명(聯名)으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위한 절목을 올렸다.

그러나 소론 측 조태구의 건의를 받아들인 경종이 다시 대리청정 명령을 거두게 되면서 소론 측의 노론에 대한 공세가 심해졌다. 소론 측 조태구·이광좌 등 신료들은 단독으로 혹은 연명으로 대리를 추진한 노론 세력을 공격하였다. 김일경 등은 군신의 기강을 강조하는 상소로 노론 측을 또한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노론 측 김창집 등이 파직되고 소론 주도의 정국으로 변하였다.

발단

1721년 소론 측의 노론에 대한 공격이 거세지는 가운데 1722년 목호룡의 고변이 제출되었다(『경종실록』 2년 3월 27일). 목호룡은 고변에서 노론 측이 숙종 승하 직후부터 세 가지 방법, 즉 삼수를 통해서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고 하였다.

목호룡은 남인으로서 왕세제의 응사(鷹師)인 백망(白望)과 친하고 그의 소개로 김용택·이천기 등과 사귀었는데 여기서 역모를 알고 고변했다는 것이다. 역모의 내용은 대급수·소급수·평지수라는 삼수로써, 숙종 말년부터 음모를 꾸며 왕세자였던 경종을 제거하고 이이명을 옹립하려 했다는 것이다.

대급수는 김용택이 보검을 백망에게 주어 숙종의 국상 때 담장을 넘어서 궁궐로 들어가 당시의 세자인 경종을 시해하려고 한 것을 말한다. 소급수는 이기지·정인중·이희지·김용택·이천기·홍의인·홍철인이 은(銀)을 지씨(池氏) 상궁에게 주고, 그로 하여금 독약을 타게 하여 세자를 시해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소급수는 실제로 1720년에 시행되었다고 하였다. 평지수는 이희지가 언문(諺文)으로 세자를 무고하고 헐뜯는 말로 가사(歌詞)를 지어 궁중에 유입시키고, 또 숙종의 명령을 자신들이 꾸며서 세자를 폐위시키려 했다는 것이었다.

경과

목호룡의 고변으로 노론 측 정인중·김용택·이천기 등 60여 명이 잡혀와 국문을 받았다. 특히 김성절의 국문 과정에서는 김창집의 손자 김성행과 이이명의 조카 이희지 등이 부형의 뜻을 받아 경종 즉위 후에도 환국과 모역을 꾀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대사간이사상, 지평박필몽 등은 경종을 청대(請對)하여 백망 등은 지엽(枝葉)이고, 노론 사대신이 근본이라 하여 엄하게 다스릴 것을 요구하였다. 이때 소론은 신축년에 노론이 「대리청정절목」을 연명해서 올린 것을 삼수의 한 형태인 평지수로 파악하여 노론 사대신을 역괴로 몰아간 것이다.

7~8개월간에 걸친 국옥으로 노론 사대신을 위시한 60여 명의 문초자가 거의 대부분 장폐(杖斃)되거나 사형에 처하여졌고 노론의 소론에 대한 원한은 골수에 맺히게 되었다. 이 임인옥사에 대해 소론은 역정(逆情)이 분명한 역옥이라 하였다. 반면 노론은 소론에 의해 조작된 무옥(誣獄)이라 하며 국문 중 자복한 자에 대해서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말한 것이니 믿을 바가 못 되고 애초에 무옥이니 자복 여부가 문제될 리가 없다고 하였다.

임인옥사를 다스리던 중 일부 공초에서는 왕세제는 물론 대비에까지 저촉되는 불온한 말이 적지 않게 나왔다. 물론 이 부분을 모두 말소하기는 하였지만 한때 왕세제는 이로 인해 왕세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다시 상소하기까지 이르렀다.

임인옥사는 영조 즉위 이후에도 논란이 계속되다가 1740년 그동안 신원이 미루어졌던 노론 사대신 중 이이명과 김창집에 대한 복관(復官)이 이루어지면서 임인옥사를 무옥(誣獄)이라고 판정을 뒤집었다(『영조실록』 16년 1월 10일).

참고문헌

  • 정만조, 「영조대 초반의 탕평책과 탕평파의 활동: 탕평 기반의 성립에 이르기까지」, 『진단학보』56, 1983.
  • 정만조, 「영조대 중반의 정국과 탕평책의 재정립: 소론 탕평에서 노론 탕평으로의 전환」, 『역사학보』111,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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