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혜공주(懿惠公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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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21년(종종 16)~1564년(명종 19) = 44세]. 조선 제11대 왕인 중종(中宗)의 딸. 봉호는 의혜공주(懿惠公主)이다. 어머니는 돈녕부(敦寧府) 영사(領事)윤지임(尹之任)의 딸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尹氏)로 중종의 제2 계비(繼妃)이다. 친동생은 제13대 왕인 명종(明宗)이다. 본관은 청주 한씨(淸州韓氏)로, 춘천부사(春川府使)한승권(韓承權)의 아들인 청원위(淸原尉)한경록(韓景祿)과 혼인하였다. 혼인 후에도 문정왕후와 명종의 비호 덕분에 매우 부유하게 살았지만, 부마(駙馬) 한경록은 사생활 등에서 여러 문제를 일으켜 여론이 좋지 않았다. ‘숯장수와 혼인한 공주’ 설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한경록과의 혼인

중종과 문정왕후 사이의 첫째로 태어나 많은 사랑을 받은 의혜공주(懿惠公主)는 11세가 되던 1531년(중종 26) 청원위한경록과 혼인하였다. 의혜공주는 혼인 이전부터 사저(私邸)와 관련하여 여러 잡음이 있었다. 1529년(중종 24) 조정 대신들은 비가 새는 데와 무너질 위험이 있는 곳들을 수리한다는 의혜공주의 사저 공사에 들어가는 재목이 새로 짓는 집과 비슷하다며 항의하였고, 이듬해에는 흉년으로 힘든 상황인데 군인 5백 명으로 하여금 의혜공주의 집을 수리하게 하였다며 불만을 표시하였다. 또한 1531년(중종 26)에는 의혜공주의 집을 채색(彩色)하기 위하여 많은 물건을 사들이고 있는데, 이로 인하여 많은 폐단이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비록 왕의 딸인 공주라고 할지라도 이렇듯 의혜공주는 어려서부터 조정에서 문제를 제기할 만큼 많은 혜택을 받고 자랐던 것이다.

청원위한경록과 혼인한 후 의혜공주는 3남 2녀의 자식을 두었다. 큰아들은 한의(韓漪), 둘째아들은 한완(韓浣), 셋째아들은 한순(韓淳)이다. 『선원록(璿源錄)』에는 3남만을 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청주한씨양절공파족보(淸州韓氏襄節公派族譜)』는 3남 2녀로 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의 내용 또한 족보의 내용과 일치한다. 1544년(중종 39) 9월에는 의혜공주의 딸이 죽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1545년(인종 1) 1월에는 대행대왕의 지문에 ‘의혜공주는 한 딸을 낳았는데 어리다’는 내용을 포함하자는 논의를 한다. 이러한 내용들로 볼 때, 의혜공주가 딸 둘을 낳았으나, 그 가운데 한 명은 일찍 죽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의혜공주의 부마 한경록은 여러 비행을 일으켜서 종종 문제가 되고는 하였다. 『중종실록(中宗實錄)』에 따르면 1541년(중종 36) 한경록은 정순옹주(貞順翁主)의 부마인 여성위(礪城尉)송인(宋寅)과 함께 시정(市井)의 장사치들과 어울리며 불의한 일을 많이 하여 여론이 좋지 않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권력을 이용하여 전답·가옥·노비·물화와 같은 것들을 처리하면서 이득을 챙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가 계속하여 올라왔으나, 중종은 어린 부마들이라 사리를 알지 못해서 벌인 일들이고, 종들의 말만 듣고는 죄를 다스리기 어렵다면서 아무런 처벌도 하지 않았다. 또한 1543년(중종 38) 9월에는 사헌부(司憲府)에서 한경록이 계절도 아닌데 목욕을 핑계로 고성(高城)에 내려가는 바람에 지나가는 고을들이 맞이하고 배웅하느라 고생이 많으니 돌아오게 하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서도 중종은 처음에는 이를 묵살하였으나, 계속하여 상소가 올라오자 곧 돌아오게 하였다. 그러나 처벌을 요구하는 사헌부의 요청은 듣지 않았다. 이렇듯 중종 대에 의혜공주와 한경록은 화려한 가옥이라든가 사적인 이득 획득과 같은 사생활 문제를 종종 일으키고는 하였다.

을사사화 이후의 권세

1544년(인종 즉위) 12월 인종(仁宗)이 제12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1545년(명종 즉위) 7월 명종이 왕위에 올랐다. 당시 명종은 12세라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명종을 대신하여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되었다. 결국 이것은 인종에서 명종으로의 단순히 왕권 교체뿐만 아니라, 인종을 지지하던 대윤(大尹)에서 명종을 지지하던 소윤(小尹)으로의 정권 교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중종 대에 세자는 인종이었는데, 인종은 중종의 제1 계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은 직후 세상을 떠났고, 그 뒤를 이어 문정왕후가 제2 계비로 책봉되었다. 문정왕후 또한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바로 명종으로, 당시에는 경원대군(慶源大君)이었다. 그러면서 장경왕후의 동생인 윤임(尹任)과 문정왕후의 형제인 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은 자신들의 조카를 세자로 책봉시키려는 대립을 하게 되었다. 이때 윤임 일파를 대윤이라 하였고, 윤원로·윤원형 일파를 소윤이라 하였다. 그런 가운데 중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인종이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이것은 대윤이 정권을 획득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인종과 대윤은 정권을 획득한 이후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정에서 숙청된 사림들을 다시 등용하였다.

그러나 채 1년도 되지 않아서 인종이 세상을 떠나고, 명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이번에는 소윤이 정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게다가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소윤의 권세는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명종이 왕위에 오르고 채 2달도 되지 않아 문정왕후의 밀지(密旨)를 받은 윤원형은 명종의 보위를 굳히기 위하여 이기(李芑)와 의혜공주의 부마인 한경록 등과 함께 대윤 일파를 역모죄로 몰아 윤임 등을 비롯한 대윤 일파의 대부분을 숙청하였다. 이것이 바로 <을사사화(乙巳士禍)>이고 이후 반대파를 제거한 문정왕후는 소윤 일파와 함께 정권 실세로 등장하게 되었다.

한편 1545년 8월 을사사화 직후 조정에서는 성종(成宗) 대의 좌리공신(佐理功臣)의 예를 들며 공신 책록을 서둘렀다. 그리고 그해 9월 위사공신(衛社功臣)의 명단이 확정되었는데, 한경록은 위사공신 2등인 추성협익정난위사공신(推誠協翼靖難衛社功臣) 광덕대부(光德大夫)청원군(淸原君)에 봉해졌다. 이어 1547년(명종 2)에는 추성협익정난위사공신 성록대부(成祿大夫)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이 되었다.

이렇게 공신에까지 오르면서 의혜공주와 한경록은 문정왕후로부터 더욱 큰 총애를 입게 되었는데, 문정왕후는 자신의 다른 부마들보다도 한경록을 더 총애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문정왕후는 자주 의혜공주의 집을 방문하였으며, 명종 또한 의혜공주가 병이 들거나 하는 경우에는 자주 문병을 하였다. 이렇듯 최고 권력자들로부터 많은 배려를 받으면서 의혜공주와 한경록의 권세 또한 높아져 갔는데, 구수담(具壽聃)은 한경록을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사위로서 총애를 받다가 화를 입은 양송(梁松)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한편 한경록은 자신의 권세를 이용하여 사생활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문제를 일으켰다. 훈척(勳戚)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뇌물을 수수한다든가, 인사 문제에도 관여하였던 것이다. 또한 조정 대신들에게도 무례함을 일삼아서 문제가 될 정도였으니, 일반 서민들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했을지는 불을 보듯 뻔하였다. 이외에도 임의로 백성을 수금(囚禁)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생들에게 빠져서 여러 번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의혜공주 또한 명(明)의 사신으로 가는 이들에게 개인적 물건을 사오도록 한다든가, 백성들의 땅을 빼앗기도 하였다. 게다가 의혜공주와 한경록의 아들들의 행실 역시 여론에 오르내렸다. 그리하여 1556년(명종 11)에 한경록의 집에 벼락이 치자, 사람들은 ‘경록의 집이 벼락 맞았다’고 하지 않고, ‘벼락이 경록의 집을 쳤다’고 표현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듯 한경록의 여러 행실이 문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경록은 문정왕후와 명종의 비호로 큰 처벌을 받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비호를 바탕으로 엄청난 부(富)를 축적하였는데, 명종은 경혜공주의 집을 방문한 후에 궁궐보다 더 훌륭한 정원을 가졌다고 감탄을 하였으며, 사람들은 당대 동방의 제일가는 부자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이다.

1564년(명종 19) 의혜공주는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어 1577년(선조 10)에는 을사사화로 책훈된 위사공신에 대한 삭탈관작(削奪官爵)과 문외출송(門外黜送)이 결정되었는데, 위사공신 2등에 책훈되었던 한경록은 선조의 비호를 받아 공으로 받은 관가(官加)를 삭제하고 파직만을 당하는데 그쳤다. 그리고 한경록은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壬辰倭亂)> 중에 왜군에게 살해당하였다. 의혜공주와 한경록의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산 119-39번지에 있는데, 2007년 7월 25일 의정부시 향토유적 제14호로 지정되었다.

설화 속 의혜공주

의혜공주와 한경록은 ‘숯장수와 혼인한 공주’라는 설화의 주인공들이다.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산군(燕山君)의 폭정을 바로 잡고자 왕위에 오른 중종이 모처럼 11명의 딸들과 한가롭게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중종은 누구 덕에 이렇게 호의호식하며 지내는지 물었고, 다른 공주들은 모두 아버지의 덕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의혜공주만이 사람은 자기가 쌓은 업보대로 살아가는 것인데, 어찌 아버지의 덕이라고 할 수 있냐고 반박하였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중종은 이튿날 새벽 동대문을 열 때 제일 먼저 들어오는 자에게 의혜공주를 시집보내라고 명하였다.

한편 다락원에 살면서 숯을 구워 한양에 내다 팔던 한경록은 타고난 성품이 부지런하고 성실하여 늘 동대문이 열리면 첫 번째로 장안에 들어왔다. 중종이 지정한 그 날에도 한경록은 첫 번째로 동대문을 통과하였고, 결국 의혜공주는 한경록에게 시집을 갔다. 가난한 숯장수에게 시집을 갔지만, 그래도 의혜공주는 아버지와 남편을 원망하지 않고 알뜰히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의혜공주가 남편이 일하는 숯 터에 올라갔는데, 거기에 있던 숯가마의 이맛돌이 심상치 않았다. 자세히 보니 황금덩어리였다. 의혜공주가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한경록은 대수롭지 않게 몇 해 전에 숯가마를 수리할 때 가져온 돌이라고만 하였다. 그제서야 의혜공주가 이것은 황금덩어리라고 알려주었고, 공주와 한경록은 황금덩어리를 팔아 논밭을 마련하고 열심히 농사지어 큰 부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실제 의혜공주와 한경록과의 삶과 상당히 거리가 있는 이 설화가 언제, 어떻게, 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이 설화만으로도 의혜공주와 한경록이 당대에 손꼽히던 부자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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