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朴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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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16년(광해군 8)~ 몰년 미상]. 조선 후기 현종~숙종 때 활동한 문신. 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를 지냈다. 자는 원례(元禮)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박민행(朴敏行)이며, 어머니 남원 윤씨(南原尹氏)는 윤형언(尹衡彦)의 딸이다. 증조부는 박효제(朴孝悌)이고 증조모 안씨(安氏)는 안존도(安尊道)의 딸이다. 조부는 박선(朴選)이고 조모 이씨(李氏)는 이원(李瑗)의 딸이다. 부인 이씨(李氏)는 이희맹(李希孟)의 딸이다.

현종∼숙종 시대 활동

1662년(현종 3) 전생서(典牲暑) 봉사(奉事)로서 문과(文科)정시(庭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그 뒤 공산현령(公山縣令)으로 있을 때인 1666년(현종 7) 1월에 공산(公山) 사람인 안국(安國)의 처가 사노(私奴) 승세(承世)와 간통한 후 은밀히 남편인 안국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조정에서 이 사건을 삼성 추국(三省推鞫)하여 정형(正刑)을 내리고 고을 수령의 책임을 묻게 되자 현령인 박지는 파직되었다. 그 해 9월 상순에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다. 그 해 9월 30일 그는 중시(重試)에서 제술을 하지 않은 추고를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중시에서 제술을 하지 않은 다른 지평 · 정언과 함께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1668년(현종 9) 나주목사(羅州牧使)를 거쳐 1670년(현종 11) 5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고, 8월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으며, 12월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1671년(현종 12) 1월에 사헌부 장령이 되고, 3월에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고, 4월 사헌부 장령이 되었으며, 7월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다. 그는 이때 사간으로서 정언정유악(鄭維嶽)과 함께 추수철이 가까워짐에 따라 양식이 떨어진 연해제읍(沿海諸邑)의 기근을 해결하는 대책을 마련할 것을 청하여 이를 시행하게 하였다. 그 해 8월 사간으로부터 대간(臺諫)으로서의 직분을 다하지 못했다고 잘못을 논하여 파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받아들여 파직되었다. 그 해 10월에 복직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가 그 해 11월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1672년(현종 13) 1월 초에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가 같은 달 말경에 사헌부 집의가 되었다. 그 해 사복시(司僕寺)정(正)이 되었는데, 그 해 3월에 사간이합(李柙)과 헌납윤심(尹深)으로부터 그가 조정에서 하는 행동이 사대부의 풍습을 많이 잃었다는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임금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그 뒤 안동부사(安東府使)가 되었는데, 1673년(현종 14) 2월 사간송창(宋昌)으로부터 여자 관계의 일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681년(숙종 7) 8월 사간원 사간이 되었는데, 사간으로 있으면서 대사간윤계(尹堦), 헌납오도일(吳道一), 정언이세백(李世白) 등과 함께 관서지방의 진보(鎭堡)에 소속된 내노비(內奴婢)들의 신역(身役)을 감하여 오로지 진(鎭)의 일에만 전념하게 함으로써 각 진의 내수용(內需用)을 충실하게 하자는 계언을 올려 이를 시행하게 하였다. 1687년(숙종 13) 8월 승정원 승지가 되었고, 12월에 다시 승정원 승지가 되었다. 그 뒤 판결사(判決事)가 되었는데, 1689년(숙종 15) 2월 집의박진규(朴鎭圭), 장령이윤수로부터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