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행(金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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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32년(중종 27)∼1588년(선조 21) = 57세]. 조선 중기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의 문신이자 서예가. 성균관(成均館)사성(司成)과 광주목사(光州牧使) 등을 지냈다. 자는 주도(周道)이고, 호는 장포(長浦)이다.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김국평(金國枰)이고, 어머니 거창 신씨(居昌愼氏)는 신극효(愼克孝)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군수(郡守)를 지낸 김사희(金士熙)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을 지낸 김상(金湘)이다. 어려서부터 백인걸(白仁傑)과 성수침(成守琛)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성혼(成渾)과는 동문수학하고 친형제처럼 지냈으며, 이제신(李濟臣)과는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명종~선조 시대 활동

19세 때 감시(監試)의 초시(初試)에 장원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시에 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글씨를 잘 썼기 때문이었다. 그 뒤에 알성(謁聖) 문과에 합격하였으나 천재(天災)로 인하여 취소되었다.[『포저집(浦渚集)』 권32 「목사김공묘갈명(牧使金公墓碣銘)」 이하 「김행묘갈명」으로 약칭] 1558년(명종 13) 사마(司馬) 양시(兩試)에 합격하고, 1566년(명종 21) 별시(別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5세였다.[『방목(榜目)』] 관례대로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었다가, 함경도북평사(咸鏡道北評事)로 나갔다. 이후 내직으로는 성균관 전적과 형조 좌랑(佐郞)·호조 좌랑·예조 정랑·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성균관 사성(司成)·내섬시(內贍寺)정(正)·사섬시(司贍寺) 정·사도시 정 등을 역임하고, 외직(外職)은 무장현감(茂長縣監)·고양군수(高陽郡守)·서천군수(舒川郡守)·양주목사(楊州牧使)·광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김행묘갈명」]

1574년(선조 7) 김행이 무장현감으로 있을 때 가뭄이 발생하였으므로, 별창(別倉)의 콩 1천 5백여 석을 민간에 나누어주어 흉년을 구제하였다.(『선조실록』 7년 7월 21일) 그런데 1580년(선조 13) 김행이 고양군수로 있을 때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서계(書啓)하기를, “고양군수김행이 전날 무장현감으로 있을 때 별창의 콩을 민간에 분급한 것처럼 반작(反作)하였습니다”라고 하는 바람에 선조가 화를 내면서, “김행을 먼저 파직하고, 그 뒤에 죄를 추고하라” 하였다. 이에 김행은 파직당하고 체포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은 후 귀양을 갔다.(『선조실록』 13년 7월 26일) 반작은 허위 문서를 꾸며서 관가의 곡식을 착복하는 것을 말하는데, 동인(東人)이 서인(西人)의 영수 성혼과 절친한 김행을 일부러 모함한 것이었다.

1588년(선조 21) 광주목사로 있을 때 순변사(巡邊使)신립(申砬)이 김행을 전라도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로 추천하였다. 그때 일본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받은 선조는 문무를 겸전한 인물을 천거하라고 명하였으므로, 순변사신립이 김행을 추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해 2월 7일 김행은 광주(光州)의 관사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57세였다.[「김행묘갈명」] 조정에서 그를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의주(擬注)하고 선조가 낙점하였을 때 김행은 광주에서 이미 사망한 뒤였던 것이다.

김행은 문장이 매우 고상하고, 필치가 호방하며 생동감이 넘쳐서 사람들이 그의 글을 얻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지 않아 언제나 막료(幕僚)에게 글을 베껴 쓰도록 하고, 자기가 쓴 글은 대뜸 진한 먹물로 칠한 후 버렸다. 그의 글씨는 스승 성수침의 필체를 이어받았는데, 남아 있는 것이 없다. 1575년(선조 8) 무장현감으로 있을 때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쓴 『증도가(證道歌)』를 간행할 당시 원본이 반이나 훼손되었으므로 김행이 써서 보충한 후 판각하여 출간하였으나, 당시 사람들은 그 서체가 다른 줄을 알지 못하였다.[「김행묘갈명」]

성품과 일화

성품이 호방하고 얽매이지 않아서 시속(時俗)에 맞추려고 하지 않았다. 또 성질이 강직하고 강개(慷慨)하여 악한 자를 원수처럼 미워하고 남의 과실을 포용하지 못하였다. 김행은 스스로 세상의 화를 모면하지 못할 줄로 알고, 일생 동안 한결같이 해학과 방종을 일삼아 스스로 세상 사람들과 뒤섞이는 척하였다. 그 담소와 해학을 들어보면 누가 옆에서 제동을 걸 수가 없을 것 같았으나, 그 행실을 살펴보면 실로 부끄러운 바가 없었고, 그가 역임한 고을마다 털끝만큼도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 효성을 다해서 어머니를 섬겼고 가정에 필요한 재물이나 녹봉을 모두 어머니에게 가져다가 바쳤으며, 비록 하찮은 물건이라고 하더라도 자기가 사사로이 소유한 적이 없었다.[「김행묘갈명」]

김행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하게 살았으나, 약관의 나이가 되기 전에 백인걸을 찾아가서 그 문하에 수학하다가 성수침을 사사(師事)하였다. 그 문하에서 이이(李珥)·성혼 등 서인의 영수들이 배출되었다. 김행이 젊어서 성수침에게 가르침을 받을 때 성수침은 아들 성혼에게 “우리 가문의 후사는 반드시 김행과 같이 의논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김행과 성혼은 종신토록 친형제처럼 지냈다. 성수침은 유명한 서예가였으므로, 김행은 수업을 받고 난 다음에 별도로 글씨를 배워, 성수침의 글씨를 이어받아 유명한 명필이 되었다.[「김행묘갈명」]

김행의 누이 한 명이 일찍 남편을 잃었는데, 누이의 자녀들을 자기의 자식처럼 가르치고 길렀으며, 재산을 나눌 때 누이가 원하는 대로 모두 주었다. 친구가 궁핍할 때에는 힘이 닿는 데까지 도와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평생 동안 청렴하게 살면서 겉으로는 자기 자신이 청렴하다는 것을 숨겼으므로,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였고, 이를 아는 사람들도 그리 깊이 알지 못하였다. 김행의 집에 불이 났을 때 이웃 사람들이 와서 불을 끄고 보니 방마다 텅텅 비어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또 그가 세상을 떠나서 염습(殮襲)할 때 집안에 빈렴(殯殮)할 옷가지가 하나도 없어서 손님들이 각자 입었던 속옷을 하나씩 벗어 주었다고 한다.[「김행묘갈명」]

김행은 이제신(李濟臣)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는데, 두 사람 모두 청렴하고 강직하다고 소문이 났다. 김행의 집에 불이 나서 집이 불타버리자, 이제신이 자기 집 별당의 기와를 모두 거두어서 김행의 집에 실어다 주었으나, 김행이 지붕을 덮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주위 사람들이 기와를 덮으라고 권하자, 김행이 태연히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비바람을 가리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이 집은 이미 이엉을 덮었으니, 기와를 덮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이제신이 죽었을 때 가난하여 장례를 치르지 못하자, 김행은 자신이 타고 다니던 애마를 부조하여, 그 말을 팔아서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이것은 두 사람의 청렴하고 고귀한 우애를 나타내는 일화인데, 두 사람이 평소 기개가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친구로서 서로 좋아하였던 것이다.[「김행묘갈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파주(坡州) 장포(長浦) 의 선영에 있는데, 조익(趙翼)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김행묘갈명」]

첫째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종실(宗室) 순평령(順平令)이수진(李壽進)의 딸인데, 1남 2녀를 낳았고, 둘째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병조 판서(判書)에 추증된 윤원룡(尹元龍)의 딸인데,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 김효엄(金孝淹)는 목릉(穆陵)참봉(參奉)을 지냈고, 차남 김충엄(金忠淹)은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3남 김우엄(金友淹)은 황신(黃愼)의 문인으로 군수를 지냈다. 3녀는 학생(學生) 이호영(李昊英)에게 시집갔다.[「김행묘갈명」] 손자 김우(金楀)는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와 정랑(正郞) 등을 지냈다.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포저집(浦渚集)』
  • 『계갑일록(癸甲日錄)』
  • 『명재유고(明齋遺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