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대로(嶺南大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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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에서 부산까지 이어진 조선시대의 간선 교통로.

개설

영남대로(嶺南大路)는 한양에서 부산 동래까지 연결된 간선 도로로, 경상충청대로·경상대로·동남저부산제4로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통상적으로는 ‘동래로’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왕조는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뒤 한양을 중심으로 X자 모양으로 간선 도로망을 구축했다. 영남대로는 한양에서 동래까지 한강과 낙동강의 수계를 따로 좌로, 중로 및 우로 등 세 갈래 길로 구축되었으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간선 도로 중 하나였다. 영남대로는 주변 인구가 조밀하고 물산이 풍부하여 정치적·경제적으로 매우 중시되었다.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고 일본을 왕래하는 사신 및 통신사(通信使)를 접대하기 위해 역참을 설치하고, 통행인에게 숙식을 제공할 목적으로 원(院)과 주막을 설립함에 따라 물화의 이동과 사람의 왕래가 빈번해져 교통로로서 크게 발달하였다. 개항 이후에는 신작로가 개설되고 새로운 교통수단인 철도가 도입되면서 쇠퇴하였으나, 정치적·군사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사회적·경제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여 오늘날의 서울~부산 간 도로와 도시 및 취락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의 도로는 1393년(태조 2)에 도성 축조 공사를 시작하고, 이듬해에 종묘·사직과 궁궐 및 시장 터를 정하는 한편 도성의 도로 건설 계획을 수립하면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1405년(태종 5) 10월에 한양으로 재천도한 뒤 창덕궁이 건립되고, 1412년 혜정교~창덕궁 방면, 종루~남대문과 숭례문 방면의 시전(市廛) 행랑이 완공됨에 따라 시가지가 형성되고 도로 제도가 정비되었다.

따라서 도성 안의 주요 도로망은 경복궁·창덕궁 및 종묘·사직단, 사대문과 사소문을 연결하는 간선 도로와, 방리(坊里) 및 각 사(司), 그리고 하천(河川)을 따라 형성된 지선 도로로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도성의 도로는 4대문·4소문과 연결되어, 성 밖 도로 노선[城門分路]의 기점인 숭례문과 흥인문, 창의문, 돈의문, 소의문, 혜화문, 광희문을 통해 지방 도로로 연결되었다. 그중에서 한양에서 부산까지 연결되는 영남대로는 흥인문을 출발해, 동묘(東廟)-영도교(永渡橋)-왕심리(旺深里)-차현(車峴)-전곶(箭串) 제반교(濟礬橋)를 지나 광희문에서 동남쪽으로 연결되는 제반교(濟礬橋)에서 합류하여 한강진(漢江津)을 건너 제4로인 영남대로와 연결되었다.

영조 때의 학자인 신경준의 『도로고(道路攷)』에 따르면, 동래로는 한강진을 건너 신원(新院)-월천현(月川峴)-판교점(板橋店)-험천(險川)-용인(龍仁)-어정개(於汀介)-직곡(直谷)-김령역(金嶺驛)-양지(陽智)-좌찬역(佐贊驛)-백암리(白巖里)-진촌(陣村)-비립거리(碑立巨里)-광암(廣巖)-용산등(龍山磴)-석원(石院)-곤지애(昆池厓)-천곡(泉谷)-모로원(毛老院)-숭선참(崇善站)-용안역(用安驛)-검단점(黔丹店)-달천진(達川津)-단월역(丹月驛)-수회리(水回里)-안부역(安富驛)-고사리(古沙里)-조령산성(鳥嶺山城) 동화원(桐華院)-초곡(草谷)-문경(聞慶)-마포원(馬浦院)-신원(新院)-굴우(窟隅)-유곡역(幽谷驛)-덕통역(德通驛)-낙원역(洛源驛)-성곡(成谷)-불현(佛峴)-낙동역(洛東驛)-홍덕(紅德)-석현(石峴)-여차리(餘次里)-영향역(迎香驛)-해평(海平)-괴곡(槐谷)-장천(丈川)-동명원현(東明院峴)-우암창(牛巖倉)-칠곡(漆谷)-금호강(琴湖江)-대구(大邱)-오동원(梧桐院)-팔조령(八助嶺)-청도(淸道)-유천역(楡川驛)-밀양(密陽)-이창(耳倉)-무흘역(無訖驛)-작천(鵲川)-내포역(內浦驛)-황산역(黃山驛)-양산(梁山)-사배야현(沙背也峴)-소산역(蘇山驛)을 거쳐 동래로 이어지는, 무려 940여 리나 되는 길이었다.

이러한 영남대로에는 양재도·연원도·유곡도·김천도·성현도·황산도 등에 소속된 역참과, 파발 및 봉수 노선이 연계되었다. 따라서 영남대로는 군사적으로는 병참로, 외교적으로는 사신 왕래로, 사회적으로는 문화 교류 및 물자 수송로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변천

영남대로는 사신들의 상경로를 좌로(左路)와 중로(中路) 및 우로(右路)로 분산시킴으로써 3개 도로망으로 형성되었다. 좌로는 울산 염포에서 출발하여 경주-영천-의흥-안동-풍기-죽령-단양-청풍-충주-여주-양근으로, 중로는 동래 부산포에서 양산-밀양-청도-대구-선산-상주-유곡-조령-음성-이천-광주로 연결되었으며, 우로는 웅천 내이포를 출발해 김해-현풍-성주-김천-추풍령-영동-청주-죽산-양재로 이어졌는데, 그 중 중로가 중심 역할을 하였다.

조선전기에는 영남대로에 양재도·연원도·유곡도·김천도·성현도·황산도 등의 역로 노선을 편성해 운영하였으나, 1796년(정조 20)에 양재역을 수원의 영화역으로 옮겨 영화도로 개편함으로써 영화도-연원도-유곡도로 노선이 변경되었다. 또 충주에 있던 충청도 감영을 공주로 이설하고 상주에 있던 경상도 감영을 대구로 이설함에 따라 상주와 충주로 집중되던 교통로가 일부 대구-추풍령-천안-수원으로 변경되어, 영남대로의 중심에 있던 문경-유곡-조령로의 쇠퇴를 초래하였다. 대구-추풍령-천안-수원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는 영남대로에 비해 평탄하여 우마와 수레를 이용하기에 편리할 뿐 아니라 삼남대로와도 교차한 까닭에 교통량이 증가하였으며, 그에 따라 도로변에 수원·천안·청주·김천 등의 상업 도시가 발달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한편, 임진왜란 때는 명나라의 파발 제도를 도입하여 영남대로에 남발(南撥) 노선을 설치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발참 조에 따르면, 도성을 출발하여 신천(광주)-율목(광주)-검북(광주)-경안(광주)-쌍교(광주)-고척(이천)-대포(이천)-소사(이천)-유춘(음죽)-임오(충주)-단월(충주)-안부(연풍)-요성(문경)-견탄(문경)-덕통(함창)-낙원(상주)-낙동(상주)-영향(선산)-양원(인동)-고평(칠곡)-범어(대구)-오동원(대구)-오서(청도)-유천(청도)-용가(밀양)-무흘(밀양)-내포(양산)-소산(동래)-휴산(동래)을 지나 부산까지 이어지는 직로(直路)에 보발(步撥) 31개 참을 설치하여 군사 전용 통신 체제를 구축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외적으로부터 영남대로를 방어하기 위해 대로 주변에 죽산의 죽산성(竹山城), 문경의 조령관문(鳥嶺關門), 대구의 금오산성(金烏山城), 동래의 금정산성(金井山城) 등과 같은 방어 시설을 신축하기도 하였다.

이후 개항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영남대로에는 신작로와 철도가 개설되었고, 이 교통로들은 일본의 침투로로 활용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 『도로고(道路攷)』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 최영준, 『영남대로-한국고도로의 역사지리적 연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0.
  • 최영준, 「嶺南路의 景觀變化」, 『地理學』28, 1983.
  • 최영준, 「朝鮮時代의 嶺南路 硏究-서울~尙州의 경우-」, 『地理學』12,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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