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산역(蘇山驛)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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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소산역 |
한글표제 | 소산역 |
한자표제 | 蘇山驛 |
상위어 | 황산도(黃山道) |
관련어 | 속역(屬驛), 역승(驛丞), 이졸액(吏卒額), 복호액(復戶額), 역리(驛吏), 역노(驛奴), 영남대로(嶺南大路), 동래부(東萊府), 금주도(金州道) |
분야 | 경제/교통/육운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朝鮮) |
집필자 | 이승민 |
폐지 시기 | 1896년(건양 1) 1월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소산역(蘇山驛)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조실록』 8년 8월 5일, 『선조수정실록』 25년 4월 14일 |
조선시대 경상도의 도로망인 황산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부산광역시 금정구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고려시대 성종에서 문종 연간에 역로(驛路)를 22역도(驛道)-525속역(屬驛) 체제로 정비할 때 소산역(蘇山驛)은 금주도(金州道) 동래(東萊)에 위치해 있던 역이다. 조선시대에는 세종 때 전국의 역로를 44역도-537속역 체제로 재편하면서 황산도(黃山道)를 설치하고 역승(驛丞)을 파견했는데, 그 과정에서 황산도를 구성하는 역의 하나가 되었다. 그 뒤 세조 연간에 다시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할 때 황산도의 속역으로 확립되었다. 이후 조선후기를 거쳐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高麗史)』 참역(站驛) 조에 따르면 소산역은 고려시대부터 경상도 동래 지역에 설치되었는데, 금주도에 속한 31개소의 역 가운데 하나였다. 정확한 설치 시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고려의 역제(驛制)가 초기의 6과-147역 체제에서 22역도-525속역 체제로 정비된 995년(고려 성종 14)에서 1067년(고려 문종 21) 사이에 금주도에 소속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세종 때 전국의 역도-역로 조직을 정비하면서 금주도를 황산도로 개칭하였고, 그에 따라 소산역은 황산도에 속하게 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성산역(省山驛)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조선전기에는 성산역으로 불리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세종실록』 지리지 경상도 경주부 동래현].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동래현 편에 따르면 대마(大馬) 1필, 중마(中馬) 2필, 복마(卜馬) 7필과, 역리(驛吏) 126명, 역노(驛奴) 39명이 편성되어 있었다. 1832년(순조 32)에 편찬된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에는 역마의 수는 같지만 역리가 51명, 역노가 24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1893년(고종 30)에 편찬된 『경상도내각관계사조(慶尙道內各官癸巳條)』「각항복호병녹성책(各項復戶幷錄成冊)」에 따르면, 소산역에는 이졸액(吏卒額) 33명, 복호액(復戶額) 23결(結) 77부(負)가 배정되어 역의 운영 및 유지에 사용되었다.
변천
1462년(세조 8)에 병조에서는 찰방(察訪)이 관할하는 역이 많을 뿐 아니라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역로가 쇠퇴해 여러 폐단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각 도의 역참을 파하고 역로를 정비해 찰방과 역승을 둘 것을 건의하였다. 그에 따라 소산역은 황산역(黃山驛)·덕천역(德泉驛) 등 11개 역과 함께 황산도에 속하게 되었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 그 뒤 조선후기까지 황산도의 속역으로 존속하였으나, 1896년(건양 1)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영남대로(嶺南大路)의 첫 역인 소산역은 대로의 종결지인 동래휴산역(休山驛)과 낙동강 하구의 양산(梁山)을 잇는 역할을 했다. 소산역의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동래현 북쪽 15리로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동래부 북쪽 20리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남쪽의 휴산역(休山驛)에서 20리, 동쪽의 기장 고촌역(古村驛)에서 20리, 북쪽의 양산위천역(渭川驛)에서 40리 떨어져 있었다. 오늘날의 위치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동 하정마을이며, 역촌이라고도 불린다.
『선조실록』에는 임진왜란 당시 소산역과 관련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1592년(선조 25) 4월에 왜군이 동래성으로 쳐들어오자 병사이각(李珏)은 소산역에 진을 치고 협공하겠다는 핑계를 대고는 동래부사송상현(宋象賢)을 내버려 두고 도망쳤는데, 결국 하루도 안 되어 성이 함락되고 송상현은 전사하였다(『선조수정실록』 25년 4월 14일).
한편, 2007년에는 소산역의 존재를 입증하는 비석 2기가 발견되었다. 하나는 ‘수의상국 이공만직 영세불망비’이다. 고종 연간에 암행어사이만직이 무흘에서 휴산을 거쳐 소산역에 와서 백성들의 복지를 위해 기금을 조성했는데, 소산역의 감관(監官)과 색리(色吏)들이 그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1878년(고종 15)에 세웠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황산 이방 최연수 애휼역졸비’이다. 휴산역과 소산역에 근무했던 이방최연수는 역졸을 아끼고 보살폈는데, 상급 관리들이 그 인격과 덕망을 기리기 위해 1697년(숙종 23)에 송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여지도서(輿地圖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
- 『경상도내각관계사조(慶尙道內各官癸巳條)』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 『부산일보』, 2007. 1. 17, 「문헌 속 소산역, 정말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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