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산성(金井山城)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금정산성 |
한글표제 | 금정산성 |
한자표제 | 金井山城 |
관련어 | 관방(關防) |
분야 | 정치/군사·국방/방어시설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이규철 |
장소 | 부산 금정산 |
관련 인물 | 이지형(李枝馨)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금정산성(金井山城)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현종실록』 8년 1월 15일, 『숙종실록』 28년 11월 13일, 『정조실록』 11년 10월 3일 |
조선시대에 부산의 금정산 정상에 설치한 산성.
개설
사적 제215호로 성벽의 둘레 17,336m, 높이는 위치에 따라 1.5~3.2m이다. 해발 801m의 금정산 꼭대기에서 서남쪽으로 계곡을 따라 축조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산성 중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동서남북 네 곳의 성문과 수구문, 암문(暗門) 등이 배치되어 있다. 동문과 남문은 1972년, 서문과 수구문, 망루 등은 1974년에 각각 복원되었다. 산성의 크기나 축성 방법 등을 살펴보았을 때 여러 차례에 걸쳐 축성과 수축, 개축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위치 및 용도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금정산 정상에 있다. 돌로 쌓은 산성으로, 낙동강 하구와 동래 일대가 내려다보이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을 겪고 난 뒤 국방 체제를 강화하고 바다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금정산성을 축성했다. 축조 흔적을 조사했을 때 삼국시대부터 같은 위치에 산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삼국시대부터 바다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감시하고 방어하기 위해 축성되었던 산성으로 파악되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조선시대에 축조한 것이다.
변천 및 현황
1667년(현종 8) 통제사이지형(李枝馨)이 금정산성의 지리적 이점을 강조하며 수축해서 요새로 삼을 것을 건의한 기록을 볼 때, 산성은 이미 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현종실록』 8년 1월 15일). 하지만 당시에는 축성을 승인받지 못하였다. 1702년(숙종 28) 경상도관찰사조태동(趙泰東)이 동래는 바다를 방비하는 중요한 지역으로 해적이 침입하는 길목인데, 조그마한 성도 없다며 금정산성의 축성을 청해 윤허를 받았다(『숙종실록』 28년 11월 13일). 『증보문헌비고』에는 1701년(숙종 27)부터 1703년(숙종 29)에 걸쳐 쌓았으며, 성벽의 둘레는 9,011보, 높이가 15자(약 4.5m)로, 사방에 성문이 있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는 증축 내지 보강 공사 등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후 숙종의 재위 기간 동안 금정산성의 축성을 반대하는 신료들의 상소가 종종 확인된다. 숙종대의 기록에서는 이후의 조치에 대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정조대의 기록에서 금정산성을 축성하고 폐지했던 이유 등을 논의하는 내용이 확인된다(『정조실록』 11년 10월 3일). 또 1740년(영조 16)에 발간된 『동래부지(東萊府誌)』의 관해 및 성곽 조에는 1707년(숙종 33)에 동래부사한배하(韓配夏)가 너무 넓기에 남북으로 두 구역을 구분하는 중성(中城)을 쌓고 좌기청(座起廳)·내동헌(內東軒) 등의 관아 건물과 기타 부속 건물 등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숙종대 이후 금정산성에 병력을 상시적으로 배치해 경계 등의 임무를 수행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금정산성을 필요한 상황에 따라 군사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가 반영되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이 외에도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1872년(고종 9)에 제작된 「금정산성진지도(金井山城鎭地圖)」가 소장되어 있다. 아울러 숙종 이래로 산성 수축공사의 경위를 새긴 금정산성부설비(金井山城復設碑)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형태
성벽의 몸체에서 성벽 위 여장(女墻)의 기초석인 미석(眉石)까지의 높이는 낮은 곳이 1.5m이고 높은 곳은 1.8∼2.1m에 이른다. 미석은 두께 10㎝ 내외의 판석을 사용했다. 이를 20㎝ 정도 돌출시켜 쌓았다. 여장은 위치에 따라 20∼80㎝ 정도 높이로 남아 있다. 동문 터 주변의 복원된 부분은 높이가 90㎝에 이른다. 가장 높게 남아 있는 북쪽 벽 일부는 안쪽 벽 바닥에서 여장 윗부분까지의 높이가 1.2m로, 조선시대 다른 성곽의 여장 높이와 거의 같다. 다만 바깥벽 미석을 기준으로 하면 높이가 80㎝이며, 특히 미륵암 북쪽 암반 주변에는 1m 정도의 성벽도 남아 있다. 따라서 여장을 포함한 성벽의 높이는 원래 3m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돈대(墩臺)로 추정되는 제3망루 남쪽과 일부 구간에서만 여장에 총을 쏠 수 있도록 뚫은 총안(銃眼)이 설치되어 있다. 이 때문에 여장은 특수한 곳에만 설치했거나 복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체성벽은 기저부에서 높이 1.5m까지는 길이 0.8∼1.1m, 두께 25∼70㎝ 크기의 큰 깬돌과 조그마한 돌을 이용하여 쌓았다. 그 위로 길이 30∼50㎝, 두께 15∼30㎝ 크기의 납작한 깬돌[板狀割石]과 조그마한 돌을 쌓았다. 성벽에 사용한 돌은 금정산의 화강암반으로 구간별로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중성벽은 길이 0.4∼1.2m, 두께 50∼70㎝ 크기의 비교적 큰 돌을 사용하여 쌓았는데, 부산 주변 수군진성(水軍陣城)의 성벽처럼 큰 깬돌 사이로 조그마한 돌을 끼워가며 세워쌓기한 수법도 보인다. 또한 산성을 드나드는 작은 문인 아문(亞門) 주변의 성 바깥벽 및 남문 동쪽 벽에 약 5m 구간마다 수직줄눈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일정한 구간별로 순차적으로 성벽을 축조해 나갔던 것 같다.
참고문헌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동래부지(東萊府誌)』
- 경성대학교박물관, 『부산 금정산성 금정진 복원부지내유적 시굴조사』, 2004. 금정구청·경성대 한국학연구소, 『금정산성 금정진 복원 기본계획』, 2004.
- 부산직할시, 『금정산성전돈대지 발굴조사보고』, 197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