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득우(洪得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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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41년(인조19)∼1700년(숙종26) = 60세]. 조선 후기 현종~숙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숙범(叔範), 호는 수졸재(守拙齋)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인데,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우의정홍중보(洪重普)이고, 어머니 한산이씨(韓山李氏)는 이조 판서이현영(李顯英)의 딸이다. 영의정홍치중(洪致中)의 삼촌이고, 효종의 부마 홍득기(洪得箕)의 동생이다.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의 문인이다.

현종 시대 활동

1662년(현종3) 22세로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에 1666년(현종7) 영남 유생 유세철(柳世哲) 등 1천여 명이 상소하여 송시열이 제정한 기년복(朞年服)은 법제에 어긋난다고 주장하자, 그는 기년제의 정당성을 내세우고 영남 유생들에게 죄를 주도록 청하는 소를 올렸다. 그의 상소에 대하여 현종은 “굳이 배척하는 데 급급할 것이 없다고 본다. 나중에 서로 의논하여 예법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라고 답했다.(『백호전서(白湖全書)』권20) 이때 노론과 남인의 복제(服制)에 대한 예론(禮論) 논쟁이 유생들 간의 싸움으로 비화되자 홍득우는 스승 송시열의 기년복을 옹호하여 노론의 선봉에 나선 것이다. 1670년(현종11) 음보로 정릉(靖陵) 참봉과 선공감 역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과거 시험에 거듭 실패하자, 과거를 포기하고 음직으로 나갔다. 묘당(廟堂)의 천거를 받아 1674년(현종15) 전설사 별좌에 기용되었다. 이어 군자감 주부와 공조 좌랑으로 승진하였고, 통진현감(通津縣監)으로 나갔으나 얼마 후에 병으로 사임하였다.

숙종 시대 활동

1676년(숙종2) 홍득우는 고인(故人)이 된 송준길을 위해 변명하고 그 원통함을 하소연하였다가 사판(仕版)에서 삭제되고 정거(停擧)되는 벌을 받았다. 이어 대간의 탄핵을 받아 전라도 무안(務安)으로 유배되었다가(『송자대전(宋子大全)』 부록7) 전라도관찰사의 죄인 석방 계청(啓請)으로 말미암아, 김수항(金壽恒) 등과 함께 특별히 석방되었다. 1679년(숙종5) 장악원 주부에 임명되었다가, 사복시 주부로 옮겼다. 1682년(숙종8) 영평현령(永平縣令)으로 나갔다가, 혜국랑(惠局郞)을 거쳐 호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중추부 판사김수흥의 천거로 발탁되어 1683년(숙종9) 담양부사(潭陽府使)에 초배(超拜)되었다.(『임하필기(林下筆記)』 권19) 당시 큰 흉년이 들었는데, 그는 성심껏 백성들을 구휼하여 경내(境內)에 굶어죽은 자가 없었으므로, 그 공으로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었다.

1685년(숙종11) 충원부사(忠原府使)로 옮겼고 1687년(숙종13) 오위장에 임명되었다가, 중추부 첨지사로 옮겼다. 1688년(숙종14)에 순흥부사(順興府使)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시사(時事)가 날로 변해 가는 것을 보고 사직한 뒤 조상의 선영 아래에서 6년 동안 은거하였다. 1694년(숙종20) 다시 밀양부사(密陽府使)로 나갔다가, 1695년(숙종21) 장례원 판결사로 옮겼다. 1696년(숙종22) 그가 밀양부사로 있을 적에 선정을 베풀었다고 이조에서 보고하였다. 1697년(숙종23)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임명되었다가, 1698년(숙종24) 삼척부사(三陟府使)와 안동부사(安東府使)를 역임하였다. 1700년(숙종26) 강원도관찰사에 발탁되었으나, 부임하기도 전에 7월 2일 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60세였다.

성품과 일화

홍득우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풍모가 준수하고 기질이 단중(端重)하며, 성품이 간결하고 엄격해서 평소 기쁘고 슬픈 감정을 밖으로 나타내지 않았다. 약관(弱冠) 때부터 송시열과 송준길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스승들의 가르침을 받고 수양하려고, 하루 종일 옷깃을 가다듬고 단정히 앉아서 마치 큰손님을 대하는 것처럼 거경(居敬)하였다. 그러나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하고 가끔 우스갯소리도 했는데, 사람들이 웃고 즐기다가 자기가 심취된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아홉 고을의 수령관을 두루 맡았는데, 가는 곳마다 청렴하게 다스려서 선정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올 때에는 한 가지 물건이라도 가지고 온 것이 없었다. 벼슬하지 않고 집에 있을 때에는 자주 양식이 떨어졌으나, 태연하며 마음을 쓰지 않았다. 자리 옆에다 두 개의 옛날 거문고를 두었는데, 경전과 사서를 읽거나, 문장을 쓰는 여가에 거문고를 타면서 유유자적하였다. 그는 스승 송시열의 무고한 죽음을 신원(伸寃)하려고 일생 동안 온갖 힘을 기울였다.

무덤과 후손

묘소는 경기도 풍덕(豐德) 효례동(孝禮洞)의 언덕에 있는데, 부인과 합장하였고, 손자 홍진유(洪晉猷)가 지은 묘표가 남아 있다. 죽은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부인 경주김씨(慶州金氏)는 홍문관 부제학김경여(金慶餘)의 딸로 자녀는 1남 3녀를 두었으니, 외아들 홍치중(洪致中)은 과거에 급제하여 영의정을 지냈으며, 차녀는 좌의정이태좌(李台佐)의 처가 되었다. 손자 홍제유(洪濟猷)는 참봉, 홍진유는 군수를 지냈다.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호전서(白湖全書)』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한수재집(寒水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