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득기(洪得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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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35년(인조13)∼1673년(현종14) = 39세]. 조선효종의 부마(駙馬)이다. 자는 자범(子範), 호는 월호(月湖)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당홍(唐洪)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우의정홍중보(洪重普)이고, 어머니 한산이씨(韓山李氏)는 이조 판서이현영(李顯英)의 딸이다. 남녕군(南寧君)홍명구(洪命耈)의 손자이고, 영의정홍치중(洪致中)의 삼촌이다. 동춘당(同春堂)송준길(宋浚吉)의 문인이다.

인조~현종 시대 활동

1648년(인조26) 부마로 간선(揀選)되었고, 1649년(인조27) 14세에, 숙안군주(淑安郡主)와 혼인하여 익평부위(益平副尉)에 봉해졌다. 그해 세자가 즉위하자, 세자의 둘째딸인 군주는 숙안공주가 되었고, 그는 익평위로 진봉(進封)되어,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임하였다. 효종은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을 초청하여 <북벌(北伐)>을 추진하면서, 종친과 부마가 그들에게 글을 배우도록 하였다. 이에 홍득기는 동춘당송준길의 문하에서 경의(經義)를 공부하였다. 그의 학문이 진보되자 송준길은 사람들에게 “옥당(玉堂)의 차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부마가 된 것이 한스럽다.”라고 칭찬하였다. 당시 청(淸)나라에서 조선 대신의 자제를 질자(質子)로 보내도록 요구하자, 1649년(효종1) 15세의 나이로 사은사(謝恩使) 정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효종은 맏딸이 요사(夭死)하였으므로 그와 공주를 맏이로 여겨 매우 사랑하였다. 1659년(효종10) 왕이 승하하자, 염(殮)하는 일을 감독했는데, 예법을 제대로 갖추었기에 조야에서 국상(國喪)을 잘 치렀다고 칭찬하였다.

현종 시대 활동

1660년(현종1) 홍득기는 현종의 처남이었기 때문에, 왕위 책봉의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왕위 책봉에 대한 사은사는 왕의 가장 가까운 친인척이 임명되는 것이 관례였다. 1661년(현종2) 효종의 신위(神位)를 종묘에 부묘(祔廟)하였는데, 현종은 그의 수고한 공로를 포상하여 종1품상 광덕대부(光德大夫)로 승품하였다. 1666년(현종7) 현종이 온천에 가서 병을 치료할 때, 수가(隨駕)한 공으로 정1품하 성록대부(成祿大夫)로 승급되었다. 1669년(현종10) 아버지 홍중보가 우의정이 되었다가 1671년(현종12)에 60세로 돌아갔는데, 홍득기는 여묘살이를 하다가 몸이 많이 상하였다. 1673년(현종14) 효종의 영릉(寧陵)을 여주(驪州)로 천장(遷葬)할 때에 왕릉 아래에서 잠을 자면서 정성을 다해 천장을 감독하였다. 천장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 병이 위독해져 그해 11월 27일에 정침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꼭 39세 주기(週期)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평소 그와 사이가 좋았던 현종은 크게 슬퍼하여 3일 동안 철조(輟朝)하였고, 4전(殿)에서는 각기 사람을 보내 호상(護喪)하였다. 3년 상을 마칠 때까지 그 녹봉을 그대로 지급하고 거두지 않았다. 당시 세자였던 숙종도 따로 사람을 보내 치조(致弔)하였다. 그가 죽은 지 12년 뒤인 1685년(숙종11)에 숙종이 정1품상 유록대부(綏祿大夫)로 추숭하였다.

성품과 일화

홍득기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눈썹이 성기고 얼굴이 희었으며, 기량이 넓고 행실이 단정하였다. 어려서부터 부모 곁에서 책 읽기를 좋아하였다. 천성이 인자하여 벌레나 개미 한 마리를 밟지 못하였고, 나무나 풀 한 포기를 마음대로 꺾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부마가 되었는데, 그 행동이 의젓하고 풍채가 늠름하여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았다. 성품이 겸손하고 신중하며 소박하여 인망이 높았다. 궁궐에서 머물러 잘 때마다 효종이 밀석(密席)을 마련해 주고 경사(經史)를 토론하게 하거나 시를 읊는 데 참여하여 화운(和韻)하도록 명하였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겸손한 태도로 마치 말을 못하는 사람처럼 시비곡직(是非曲直)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무늬있는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고, 성색(聲色)과 완호(玩好)를 물리쳤다. 조용한 곳에서 경서를 탐독하였으며, 홀로 시를 읊거나 글씨를 쓰면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래서 효종과 현종의 그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남달랐다.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에는 현종이 그가 졸(卒)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1674년(현종15) 1월에 승정원에 하교하기를, “익평위홍득기가 갑자기 요절하였으니, 그 놀랍고 슬픈 마음을 어찌 말로 표현하겠는가? 그리고 생각하면, 선조(先朝)께서 관심을 쏟아 사랑한 것이 보통을 훨씬 넘었으며, 시강관(侍講官)으로서 나를 보좌하는 등 정의가 친밀했으니, 다른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해당 부서로 하여금 제수를 넉넉히 지급하여 나의 뜻을 나타내도록 하라.”고 하였다고 적고 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처음에 경기도 여주 소유곡(巢由谷)에 장사지냈다가, 나중에 경기도 이천(利川) 설봉산(雪峰山) 아래로 묘소를 옮겼다. 부인 숙안공주가 62세로 돌아가자, 경기도 지평현(砥平縣) 서쪽 화곡(花谷)의 언덕에 합장하였다. 박세당(朴世堂)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숙안공주는 효종과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둘째딸로 자녀는 1남을 두었다. 외아들은 홍치상(洪致祥)이고, 손자는 홍태유(洪泰猷)이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