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업(朴慶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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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8년(선조 1)~ 1630년(인조 8년)= 63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때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이다. 자는 응휴(應休)이고, 호는 암수(巖叟)·추탄(秋灘)이며, 초명은 박승업(朴承業)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인데, 증조부는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박은(朴誾)이고, 조부는 행 사섬시 첨정(僉正)박인량(朴寅亮)이며, 아버지는 빙고(氷庫)별좌(別坐)박무(朴懋)이다.

선조~인조 시대 활동

1594년(선조 27)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 등을 지냈다.

1613년(광해군 5) 강릉부사(江陵府使)가 되었는데, 강원도시(江原道試)에 부정이 있었다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1614년(광해군 6) 5월에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그 해 6월 무렵에 동래부사(東萊府使)로 나가 있었는데, 박치의(朴致毅)를 무고(誣告)했다하여 탄핵을 받았다. 1622년(광해군 14)에 청주 목사(淸州牧使)가 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 전에 박경업이 탄핵했던 공신들의 탄핵을 받아 일시 유배되었다가 다시 서임되었다. 1628년(인조 6)에 명(明)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철산 가도(椵島)에 진을 치고 우리나라에게 후금을 칠 것을 강요하자, 박경업은 감군접반사(監軍接伴使)에 임명되었다.

성품과 일화

박경업은 강개(慷慨)하고 고집이 세었다고 한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죽창한화(竹窓閑話)』에 근거하여, 그에 관한 일화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가 처음 정언이 되었을 때 이조 판서이기(李墍)의 아들이 통진현감(通津縣監)이 되었는데, 고을을 다스리는 것이 보잘것없어도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박경업이 즉시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당시 최관(崔瓘)이 삼사에 출입하여 명성이 자자하였는데, 그의 아버지가 용강 현령(龍岡縣令)으로 있었으므로 온 경내가 원망하고 괴로워하였으나 또한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박경업이 그들 부자를 논박하니, 조야(朝野)가 눈을 씻고 보았으며 강직한 명성을 크게 떨쳤다. 그 뒤에 여러 번 대간이 되어 조금이라고 공론(公論)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비록 권귀(權貴)라도 피하지 않고 분연히 논핵하여 한 달에 파면된 자가 거의 십여명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원한을 쌓아온 것이 오래되어 마침내 벼슬길이 통달하지 못하였다. 여러 고을의 수령을 맡으면서 자못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었으나 매사에 비방을 얻었으며 연속해서 대간의 논박을 입었으니, 논박하기를 좋아한 보복이라 여겼다.

묘소

묘소는 현재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식금리에 있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