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보(戶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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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으로 중앙에 가서 번을 서거나 군사훈련 등의 실무를 수행하는 호수와 그에 딸린 봉족, 혹은 보인을 함께 가리키는 말.

개설

조선시대 군제는 16세부터 60세까지의 양인(良人) 신분의 모든 남성을 군역 복무자로 하는 양인개병제(良人皆兵制)를 원칙으로 하였다. 이 중에서 중앙에 번을 서러 가거나 지역을 지키는 정군(正軍)호수(戶首)라 하고, 이 호수의 경제적 뒷받침을 맡은 자들을 봉족(奉足)이라고 하였다. 호수의 역종에 따라 상응하는 수의 봉족이 배정되었는데, 이 호수와 봉족이 하나의 군호(軍戶)를 이루었다. 군호의 편제에 기초한 호수와 봉족을 ‘호보’라 통칭하였다.

내용 및 특징

역의 종류에 따라 나누어 주는 보인(保人)의 수는 달랐다. 갑사(甲士)장번(長番) 환관에게는 2보를 주었다. 양계(兩界)의 갑사는 1정(丁)을 더 주었다. 기정병(騎正兵)과, 취라치(吹螺赤), 대평소(大平簫), 수군(水軍)은 1보 1정을 주었다. 교대로 번을 서는 내관, 기잡색군(騎雜色軍), 한성에 머무는 제주자제(濟州子弟) 등도 같았다. 보정병(步正兵), 장용위(壯勇衛), 파적위(破敵衛), 대졸(隊卒), 팽배(彭排), 파진군(破陣軍), 조졸(漕卒), 봉수군(烽燧軍), 차비군(差備軍)은 1보를 주었다. 어부(漁夫), 보잡색군(步雜色軍), 제주의 기·보정병 및 수군 등도 같았다. 이 밖에 여러 잡직계열의 관원·생도 등은 동거하는 족친 중 1명, 서리·악생(樂生)·악공(樂工)·수부(水夫) 등은 2명, 원주(院主)는 3명을 주었는데, 각각 다른 역에 배정하지 않도록 하였다.

변천

1464년(세조 10)에 봉족제(奉足制)를 개편하여 2정을 1보로 한 보제(保制)가 성립되었다. 군호 단위의 호보 구성이 정군과 납포군으로 바뀐 것이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납포가 매월 1필 이하로 규정되어 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납포는 1515년(중종 10)에 1년에 2필을 징수하는 순수한 세납으로 규정되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군역은 그 복무를 타인이 대신하게 하고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는 대립(代立)을 발생시키고 있었다. 지방의 정병도 자신의 대역(代役)을 찾았으며, 지방관도 군포를 받고 군역을 면제해 주는 방군수포(放軍收布) 행위에 열중하였다. 임진왜란 후에는 실역(實役)을 지지 않는 대가로 1년에 2필씩의 군포(軍布)를 냈다. 병조가 오히려 이를 주관하여 국가 재정에 충당하기도 하였다. 실역이든 보인이든 군역을 피하기 위한 노력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단순한 도망만이 아니라, 승려가 된다든지 세력자의 그늘에서 사노(私奴)가 되어 합법적으로 군역에서 벗어나기도 하였다. 반면에 정부는 임진왜란 직후부터 오군영과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용병제(傭兵制)를 실시하면서 여러 종류의 군보(軍保)를 증설하고 보포를 징수하였다.

17세기 말 이후 양역의 소속별·역종별 정족수가 재확인된 이후로, 1필 이상의 부담을 줄여서 군포를 1필로 균일화하는 논의가 있었다. 그것은 군포 부담을 일부 토지에 전가시키는 대신 모든 양인 군보가 1필의 군포를 납부하는 균역법으로 귀결되었다. 이로서 군호에 기초하여 편제된 호보의 체제는 사라졌다.

참고문헌

  • 『각사수교(各司受敎)』
  • 『수교집록(受敎輯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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