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무(佾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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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각종 제사와 회례연에서 여러 사람이 줄을 이루어 벌여 서서 추는 춤을 이르는 말.

개설

일무(佾舞)는 길례 및 가례 등의 국가의 큰 행사 때 추었으며, 동지(冬至)와 정조(正朝)의 회례 의식 및 양로 의식 때에도 공연하였다[『세종실록』 「오례」]. 또 종묘와 사직에 대한 제향, 산천성황제(山川城隍祭)와 합쳐서 지내는 풍운뇌우제사, 문선왕(文宣王) 즉 공자에 대한 제사 및 선농(先農)·선잠(先蠶) 등에 대한 제사를 지낼 때도 일무를 추었다. 약적(籥翟)을 들고 문무(文舞)를 추고, 간척(干戚)이나 창·검·궁시 등의 무기를 들고 무무(武舞)를 추었는데, 온화하고 점잖게 춤추는 모습을 통해 신과 사람이 화합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여겼다(『순조실록』 30년 4월 9일).

내용 및 특징

1. 일무의 종류

일무는 벌여 선 줄의 수에 따라서 팔일(八佾)·육일(六佾)·사일(四佾)·이일(二佾)로 구분한다. 팔일이란 횡렬 8명과 종렬 8명씩 정사각형 모양으로 열을 지어 서는 것인데, 가장 규모가 크고 조밀하게 사람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는 모습을 나타낸다. 따라서 팔일무는 하늘로부터 천하를 지배하도록 임명을 받은 황제의 위상에 걸맞은 춤으로 여겨졌다. 그런 까닭에 황제가 조상이나 하늘에 제사할 때, 또는 사직 등 국가의 통치 영역을 대표할 만한 곳에 제사를 지낼 때는 주로 팔일무를 공연하였다. 조선 숙종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신종(神宗)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대보단(大報壇)을 세우고(『숙종실록』 30년 10월 14일), 새로운 악장과 팔일무로써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숙종실록』 31년 3월 9일), (『정조실록』 3년 2월 14일). 그러나 1749년(영조 25)에는 대보단에서 제사를 지낼 때 육일무를 연행하였다(『영조실록』 25년 4월 11일). 이후 1897년(광무 1)에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에는 종묘와 사직의 제향 때 팔일무를 상연하였다.

대한제국을 선포하기 전까지 조선에서는 종묘와 사직, 풍운뇌우, 선농·선잠, 문선왕 등의 제사에서 제후국의 격식에 따라 육일무를 공연하였다. 사일무와 이일무는 조선시대에 연행된 예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조선이 신분제 사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제후 아래에 대부(大夫)와 사(士)의 구분이 있었을 것이므로, 사일무와 이일무도 각각의 격에 따라 연행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 일무의 형태

1464년(세조 10) 이후 종묘 제향 때 공연한 육일무는 횡렬 6명, 종렬 6명의 정사각형 형태였는데, 조선시대 초기의 사직 이하 나머지 제사들에서는 모두 횡렬 6명, 종렬 8명의 직사각형 형태로 열을 지어 일무를 추었다. 일무의 형태에 대한 논의는 중국 서진(西晉)의 학자인 두예(杜預)와 후한(後漢)의 학자인 복건(服虔)의 서로 다른 의견에서 비롯되었다. 육일무의 경우 두예는 횡렬과 종렬 각 6명씩 총 36명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복건은 횡렬 6명, 종렬 8명으로 총 48명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 두 가지 설을 모두 수용하였지만, 조선시대 후기에는 모든 제사에서 정사각형 형태로 열을 지어 일무를 추도록 하였다(『인조실록』 7년 6월 21일).

3. 일무의 구성

일무는 문덕(文德)을 표현하는 문무와, 무공을 연출하는 무무로 구성되었다. 조선시대의 제사에서는 신을 맞이하는 영신(迎神), 폐백을 올리는 전폐(奠幣), 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초헌(初獻) 때에는 문무를 추고, 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아헌(亞獻)과 마지막 술잔을 올리는 종헌(終獻) 때에는 무무를 추었다. 문덕과 무공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은 악장을 통해 노래로 표현하고, 일무는 그 외형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었다. 제사에는 예식의 순서가 있고, 각 순서에는 사용하는 춤과 음악이 정해져 있었다[『세종실록』 「오례」], [『세종실록』「악보」].

4. 일무의 도구

일무에서는 문무와 무무의 상징성을 드러내기 위해 각각 도구를 사용하였다. 문무의 경우 취주 악기인 약(籥)과 꿩 깃을 묶어 만든 적(翟)을, 무무의 경우 방패와 도끼인 간척이나 창·검·궁시 등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들 도구는 아악과 속악에서 각각 달리 사용되었다. 중국에서 전래된 아악이 연주되는 동안에는 약·적과 간척이, 세종 때 향악에 근거해 새로 만든 속악 보태평과 정대업 등이 연주될 때는 약·적과 창·검·궁시가 사용되었다.

5. 일무대의 위치

조선시대 제향에서 일무를 추는 일무대(佾舞隊)의 위치는 천지인(天地人)의 사상적인 특징을 반영하였다. 월대(月臺) 위에 악대를 배치하여 ‘천’의 위치로 삼고, 전정(殿庭), 혹은 묘정(廟廷) 아래에 악대를 두어 ‘지’의 위치로 삼았다. 그리고 지에 해당하는 헌가(軒架)와 천에 해당하는 등가(登歌) 사이에 일무대를 배치하여, 천지 사이에 인간이 존재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조선시대의 일무대는 각 묘당의 신도(神道)를 중심으로 뜰 서쪽에 위치하였다.

변천

고려시대의 아악은 고려 예종 11년인 1116년에 송나라에서 대성악(大晟樂) 및 문무·무무를 들여와 왕이 친히 관람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또 고려 공민왕 19년인 1370년에는 명나라 태조가 아악을 보내왔는데 이때 횡렬 6명, 종렬 8명 총 48명의 일무를 사용했다. 조선시대 제사 때 일무를 공연하는 제도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전승되었다. 그러므로 조선에서 수용한 육일무 역시 48명이 추는 일무였다.

조선 건국 초기부터 1463년(세조 9)까지 모든 제사와 회례연에 48명이 추는 일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부터는 종묘 제례의 경우 횡렬 6명, 종렬 6명 총 36명의 일무를 공연하도록 했다. 『악학궤범』에 따르면, 나머지 제사에서는 계속 48명이 추는 일무가 연행되었다. 그런데 조선시대 후기에는 일무 제도에 일부 변화가 있었다. 「사직단국왕친향도병풍(社稷壇國王親享圖屛風)」에는 36명의 일무대가 그려져 있고, 1629년(인조 7)에 문무와 무무의 일무대 수를 36명으로 헤아리고 있음을 볼 때(『인조실록』 7년 6월 21일), 조선후기에는 종묘는 물론 사직 등 아악의 일무도 모두 36명이 춤추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종 연간에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에는 황제국의 격에 맞는 팔일무를 사용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다시 육일무를 연행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악학궤범(樂學軌範)』
  • 『시악화성(詩樂和聲)』
  • 『대한예전(大韓禮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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